봄의 직지, 그 절집의 古梅
봄의 직지, 그 절집의 古梅
  • 노재학 불교사진작가
  • 승인 2016.03.1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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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선암사, 통도사, 화엄사, 백양사의 고매

화엄사 각황매
가장 오래된 수령 630년 선암사 백매
가장 일찍 피는 고매, 통도사 자장매
검붉은 색채가 인상적인 화엄흑매
절집 고매의 꽃과 향은 세세생생의 헌공

선암사 백매 홍매, 탐매기행 일번지
메마른 나뭇가지에 꽃이 핀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사태다. 마음 속 한 물건이 청정해지면 우주법계가 청정해지는 법이다. 한 꽃이 피니 수 백 수 천의 꽃이 핀다. 매화는 그 봄의 경이로운 사태를 기별한다. 일지매(一枝梅)의 가지, 봄의 마중물이고, 봄의 직지(直指)다.

매화향을 일러 암향(暗香)이라 한다. 달무리의 교교한 기운이 흐르고 사위가 적막할 때 비로소 스며드는 은은한 향기인 까닭이다.

문인 묵객들이 고매(古梅)를 찾아 잔설이 남은 산야를 소요하는 것을 두고 탐매(探梅), 또는 심매(尋梅)라 한다. 꽃과 향을 찾아가는 탐미적 추구가 아니라 청빈하고 고아한 마음을 찾아가는 일종의 구도행으로 여긴 것이다. 깊은 산 속에 깃든 고매 한 그루를 고결함과 지조, 고매한 덕망을 갖춘 성리학적 군자(君子)로 인격화 하였기 때문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 전기의 〈매화서옥도〉 등에서 탐매와 심매에 나선 선비의 이상향을 향한 구도행을 접할 수 있다. 추위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군자를 찾아가는 길인 까닭에 불교의 수행과정을 그린 심우의 운수행각에 견줬던 것이다. 그 때 갖춘 매화의 덕성이 빙자옥질(氷姿玉質)이요, 아치고절(雅致高節)이다.

전통사찰 몇 몇의 절집에 아치고절의 품격을 갖춘 고매가 있다. 이른 봄 탐매가들의 숱한 발길을 불러 모은다. 벌이나 나비 보다도 사람들의 발길이 더 분주하다. 수령이 150년 이상 된 매화를 흔히 고매라 부른다. 선암사, 통도사, 화엄사, 백양사, 순천 송광사, 개암사, 산청 대원사, 불영사, 표충사, 고창 문수사, 단속사지 등에서 드물게 야매와 고매를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선암사 백매와 홍매, 통도사 자장매와 영취매, 화엄사 흑매와 야매, 백양사 고불매 등은 한국 고매의 아치고절을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매화를 관상할 때 세 가지 요소에 심미안의 촛점을 둔다. 수형과 꽃잎 색, 꽃향기가 그 셋이다. 즉 형태와 색과 향을 관상하는 것이다.

선암사 무우전 백매, 홍매 군락(수령 400년~550년, 3월 하순 절정)
순천 선암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매 군락의 집단성을 갖춘 탐매기행 일번지다. 선암사 자체가 불국으로 경영한 전통원림이자 자연생태 수목원이다. 전통 고매의 유전자와 원형질이 실존하고 있는 매화의 성지다. 수령 150년이 넘는 고매가 선암사에 22그루나 있다. 무우전 돌담길과 대웅전, 원통전, 장경각, 해우소 부근 등 경내 곳곳에서 암향을 퍼트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매와 홍매도 그 곳에 있다. 원통전 뒤 백매는 630여년으로 추정하고, 무우전 돌담의 홍매는 550여년으로 추정한다. 매화 수형과 꽃잎 색, 암향 등의 세 덕목을 두루 갖춰 고매의 전형을 보여준다.

매화는 네 가지를 오히려 귀하게 여긴다. 늙은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마른 것을 귀하게 여기며, 성글게 핀 것을 귀히 여기며, 오므린 꽃봉오리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선암사 고매 등걸은 마른 명태처럼 여윈데 기운생동의 힘과 매혼이 흐른다. 먹빛 몸통과 가지마다 파란 녹의 이끼와 일엽초, 철편 같은 비늘을 뒤덮고 있어 쇠처럼 단단해 보인다. 쭈삣쭈삣 엉켜붙은 비늘의 가지에서 숱한 풍상과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에 봄의 꽃이 피니 그야말로 ‘철골생춘(鐵骨生春)’이다. 무우전의 나무이니 무우수(無憂樹)의 인연에 닿는다. 무우수는 세존께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실 때 마야부인께서 잡았다는 나무다.

3월말 선암사 무우전 돌담길은 철골생춘의 길이다. 백매, 홍매가 뒤섞여 핀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장경각으로 가는 돌담길에 희귀한 수양 녹악매도 있었다. 백매, 홍매의 꽃잎들은 다섯 장 꽃잎을 가진 홑꽃인데 앙증맞도록 작다. 꽃잎의 색상도 차분하고 침착하다. 향은 맑고도 차가우며 깊다. 깊고도 오래된 색과 향을 지녔다. 그 고매들이 절집의 오래된 돌담길에 늘어서 있거나, 검은 먹빛의 기왓골에 무심히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유위를 넘은 무위의 경영이 문질빈빈의 경지다. 전통의 고유성이 지닌 고전주의, 자연주의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통도사 자장매(수령 350여년, 2월 중하순 절정)
통도사 자장매, 봄의 기별
한국의 고매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피는 매화는 통도사 자장매다. 자장매는 영산전 뒤편 영각의 처마 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어령선생이 책임편집하여 2003년 발행한 〈매화〉라는 책에서는 수령을 350년으로 보고 있다.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2월 중순에 진분홍의 꽃이 핀다. 그 무렵이면 전국의 탐매객들의 발길로 자장매 아래로 반질반질한 길 위의 길이 생긴다. 무채색의 대지에 홀연히 피워 올린 진분홍의 꽃사태로 사람의 마음에 던지는 파문은 크다. 오래된 색과 침향이 던지는 수직의 파문이다. 어깨를 움츠린 사람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으며 봄을 기별한다.

그때 자장매의 가지는 단순한 나무줄기가 아니라 관세음보살께서 손에 쥐고 계시는 버드나무 가지와 같은 생명과 자비의 메타포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매화의 이름은 통도사 창건주이신 자장율사의 법명에서 차용했다. 〈삼국유사〉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편에 52 지식수(知識樹) 설화가 전해진다. 자장께서 당신이 태어난 집을 허물고 원영사 절을 지었다. 낙성회를 열어 강론할 때 하늘사람 52분이 현신하여 강론을 들었다. 그때의 기이한 행적을 기념하여 제자들을 시켜 52 그루의 나무를 심게 했으니 그 나무들을 ‘52 지식수’라 부른다. 자장매의 이름은 52 지식수의 역사성을 계승하려는 의지의 천명이다. 한 그루의 나무에 사람의 행적과 역사가 뱄다. 이미 식물학적 나무의 차원을 넘어선 인문의 나무가 된 것이다.

백양사 고불매(수령 300여년, 3월 하순 절정)
화엄사 흑매, 뜰 앞의 잣나무
화엄사 각황전 추녀 밑의 각황매(장육매)는 색채에서 가장 인상적인 매화로 손꼽힌다. 각황매는 붉다 못해 검붉어서 ‘화엄사 흑매’로 부른다. 조선 숙종 때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중건하면서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300여년에 이르는 홍매다. 화엄사엔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희귀한 470년 수령의 야생 백매가 길상암 가는 길에 있지만, 백매는 아예 뒷전이고 지정문화재도 아닌 이 홍매에 시선이 쏠린다. 그만큼 매화의 수형과 색채가 독보적이다. 주간은 용틀임하듯 힘차게 솟구쳐서 양산처럼 살을 펼친다. 붉은 꽃을 달고 있는 가지들은 수양버들 가지만큼 가늘고 낭창하다.

가지들이 수양매처럼 아래로 처져 바람을 타곤 한다. 선홍의 나뭇가지들이 바람 타는 장면이 가관이다. 3월말 각황전 추녀 밑을 장엄할 무렵이면 강렬한 선홍빛으로 사람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한번 보고나면 그 색채의 느낌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꽃잎은 홑겹 다섯장인데 애틋하도록 자그맣다. 작은 크기의 꽃이지만 적색왜성처럼 찬란히 빛난다. 불가에서 전하는 선 중에서 48칙을 모아 해설한 책이 〈무문관〉이다.

책의 37칙이 '정전백수(庭前柏樹)', 곧 '뜰 앞의 잣나무'다. 화엄사 각황매는 선가의 화두인 뜰 앞의 나무로 다가온다. 교외별전으로 전하는 불립문자의 나무 같다. 고려불화 〈관경16관변상도〉는 명상과 염불 등 16관을 행하면 극락에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형상화한 불화다. 16관중 제 4관이 수상관(樹想觀)으로 보배나무를 상념하는 관이다. 한 그루 매화나무를 관하고, 청정불국토의 상념에 젖는다. 화엄사에 화엄의 꽃이 있다.

화엄사 각황매(수령 300여년, 3월 하순 절정)
백양사 고불매, 침향의 육법공양
전통사찰의 고매 중에서 암향의 깊이가 으뜸으로 꼽는 매화는 장성 백양사 고불총림의 고불매(古佛梅)다. ‘고불’은 ‘본연의 부처님’을 말한다. 고불총림의 말 속에는 부처님 본연으로 돌아가려는 청정가풍의 수행결사 정신을 담고 있다. 고불매는 대웅전 뜨락의 우화루(雨花樓) 측면 통행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3월말이면 연분홍 우화의 꽃사태가 장관을 연출한다. 우화루 공간을 우화의 꽃비로 잡화엄식하니 기막힌 인연이다. 우정사업본부는 2010년 식목일 기념으로 발행한 〈한국의 명목〉 시리즈 두 번째 묶음에서 이 고불매를 소개했다. 우표도안 설명문에는 1700년경에 심어진 후, 186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심었다고 소개한다.

1863년 큰 홍수로 대웅전 건물 등이 피해를 입은 것이 이전불사를 하게 된 결정적 요인으로 전해진다. 불전 건물터를 새로 닦으면서 그 곳에 있던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을 현재의 자리에 옮겼다는데 현대들어 불사과정에서 백매는 베어진 것으로 알려져 애석함을 남긴다.수령 300여년의 우여곡절이 기구하고 파란만장하다. 고불매가 피기 시작하면 절집 뜨락은 그윽한 침향의 향연에 잠긴다. 향 공양은 부처님께 올리는 육법공양 중의 하나다.

절집 고매의 매향은 수 백년 묵은 침향의 공양이자, 꽃 헌화의 공양 예경이다. 지상의 노거수를 통한 향과 꽃의 공양은 용화삼회를 발원하며 펄에 묻어 침향을 길어 올리는 매향(埋香)의식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오래된 고매 한 그루, 세세생생 향을 길어 올리고 헌화의 예경을 올린다. 절집 고매의 빛 속에 결코 마르지 않는 화수분의 암향이 깃들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로되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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