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 텅텅 빈 날엔 바람 불면 울고 싶다

바람 부는 날

눈이 쌓이고 있다. 싸락눈이다. 한결 바람도 차갑게 느껴진다. 오후 5시 반, 산사엔 어둠이 빠르게 찾아든다. 산자락에 어둠이 깃들 이 때쯤이면 산은 텅텅 빈 채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비어있음의 적멸의 의미를 일깨워주며 적조로움의 편안함을 내게 안겨준다. 슬프나 슬프지 않고, 쓸쓸하나 쓸쓸하지 않게 비워둠의 여유를 일깨워 주고 있다. 습관처럼 나무침대에 앉아 졸고 있지만 화두는 새가 되어 추억의 숲을 날고 있다.

어린 시절의 코흘리개 아이가 절집에 온 후, 잔심부름으로 시작해 밥 짓고, 국 끓이고, 반찬 장만하며 길고 긴 5년이라는 세월을 넘기게 된다. 아이의 얼굴이 태어날 때부터 수상쩍게 생긴 탓도 있지만 승려 될 수 있는 기회를 대학 나오고, 고등학교 졸업자인 잘 생긴 행자들에게 우선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손등이 거북이 등처럼 트고 터져도, 매 끼니마다 쌀 씻어 밥 지으며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울먹였다. 김칫독에서 포기김치를 꺼낼 땐, 김치 국물이 터진 손등에 스며들어 외마디 비명을 지를 만큼 뼛속까지 파고드는 아픔이었다.

쌀뜨물에 김치 국물에 트고 터진 손등이 아리고 부어 왔지만 그럴 때마다 밤이 되면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울먹였고, 고향집이며 어머님을 찾고 부르며 베갯잇을 적시는 일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손등에 바르는 약은 멘소래담, 약 이름이 정확한지는 모를 일이나 멘소래담도 아껴서 발라야할 만큼 행자시절은 아프고 시린 추억으로 남아있다.

질기고 긴 행자 수업을 마치고 통도사 강원에서 경전 속의 어려운 한자 익히기를 한동안 하다가 깨달음을 위해 해인사로 오게 된다. 성철 스님이 방장으로 계신 해인총림의 선원은 대장부들의 활기참이 가득한 열려 있는 도량이었다.

그런데 내겐 화두 몰입이 쉽지 않았다. 온갖 망상번뇌가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순서도 절차도 없이 날아다녔다. 앉아있는 한 시간이 지루했고 어떤 때는 남아있는 5분도 지겨워 벽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원망하는 일도 많았음을 고백한다.

3개월 동안 누워 잠자지 않고 앉아서 정진하는 여섯 명에 뽑혀(사연이 길지만) 조사전에서 용맹 정진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요령껏 앉아서 졸았고 사물이 둘로 셋으로 보이는 착시현상과 환시(幻視) 환청으로 정신 이상증을 일으켜 한 달반 만에 조사전 선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뒤 군에 입대해 3년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불교신문사에서 편집국장으로 심부름을 하게 된다. 불교신문사와 총무원에서 10여 년을 허송세월한 후 늦게야 철이 든다.

영혼이 있는지, 내생이 있는지, 부처의 깨달은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아 인도에서 3, 네팔에서 2, 티베트에서 3, 중국에서 7년을 합쳐 15년을 해외에서 치열한 구도자로 머물게 된다.

인도에서 종교적인 아름다운 체험을 통해 영혼과 내생에 대해,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 온갖 의혹이 일시에 풀리게 된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의 좋은 스승, 착한 벗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이후, 티베트에서는 죽음을 예견하는 죽음의 자유로움을 익히게 된다.

중국의 7년은 이, , , 쓰로부터 시작해 중국의 고어(古語)를 배우며 아함부와 망등부의 경전내용을 살피게 된다. 수행과정을 드러낼 것도 감출 것도 없는 일이지만 참봄()’, ‘참앎()’을 이루었다면 비밀스럽게 사라질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회향을 해야 한다.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살되 법거량을 즐긴다. 꾸밈과 조작됨이 없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일상이 평화롭고 행복하다. 헐떡임과 흔들림을 줄여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

이제 한 수행자가 늙디 늙어 마침표 찍을 날을 기다리며 추억의 줄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오늘 저녁처럼 싸락눈이 쌓이고 바람이 불고 산이 텅텅 비인 날에는 바람만 불어도 울고 싶다. 바람 부는 날엔 죽음도 앞당겨 어디론지 한 점 바람으로 떠나고 싶다. 흔적도 없이, 자취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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