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기고한 적도 없고 산속에 살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중에게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故 김주일 국장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지금은 앞서서 몸의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산속에 살고 있는 중보다도 낫습니다. 몸을 버렸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지난 1월 4박 5일간 라오스 출장을 함께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한국을 넘어 불교국가의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들을 함께하자며 인팽사원에서 기도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김주일 국장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야기하지 못한 아쉬움이 먼저 일어났지만, 세상의 일
팔만사천법문이 하나로 돌아가는 안내서인데, 그 참뜻을 알지 못해 오온을 가지고 수없는 행위의 반복으로 거듭나고자 하겠지만, 그 행위가 오히려 본질을 방해하는 줄을 어찌 가늠하겠는가. 가만히 앉아 허공을 보고, 흐르는 물로 목마름을 해소하는 일이 따분한 것 같지만, 다시 구해야 하는 것 없으니, 중생이라는 마음으로 부처를 향하려는 마음 또한 부질없는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서둘러 돌아갈 곳을 잊고 보니, 때에 맞게 주어지는 것 이외에 따로 찾아야 할 것 없고, 내가 세상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니, 세상이 나를 굴복시키는 것도
깨달음이 없듯 가르침도 없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 듣고 이해한 오온의 미사여구들이지, 가르침에는 어떤 사실적인 것을 적시하기 위해 언어도 개념도 사용할 수가 없다. 만약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를 배워서 언어로서 깨달음을 표현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헛발질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된다. 스스로가 표현하는 것은 깨달음을 표현하고자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표현하고자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아 엉키게 되고, 출발점이 뒤죽박죽이게 된다. 출발점이
‘무엇이 부처입니까?’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주 깊은 곳에서 눈물이 핑 돌면서 예전에 한 번도 인식하지 못한 감격이 일어야 하지만, 무엇을 감격해야 할지 모르니 다른 말들이 아무 소용없어진다. 이 말 이전이야 그 놈의 집 앞마당이었으니 선뜻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놈이 저절로 자신의 앞마당에서 나와 목을 내밀어 주니, 그때가 단번에 목을 벨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놈의 목을 벨 용기를 내지 않고, 주춤하면서 기회를 놓치면, 엉뚱한 방향으로 수행을 하면서 목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
오온이 없다는 뜻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장 전체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하나의 문제 같지만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이 문장을 하나의 문장으로 생각하고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누구도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물음에 대해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장을 분리하여 오온의 의미는 무엇이고, 없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별해서 참구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문장 전체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부처님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수행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 있는 곳에서 집 없는 곳으로 떠나 수행승이 됩니다.” 아마 초기경전인 〈니까야〉를 읽어 보신 분이라면 왕을 비롯해 누구에게나 진리를 참구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궁금할 것이다. “번잡한 곳에서 번잡하지 않은 곳으로 떠납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이 그 해답이 될 것이다. 번잡한 일을 하면서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
“그대는 앉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이 말을 듣고 남악 회양 선사가 기왓장을 들고 와서는 좌선하고 있는 마조 스님 앞에서 기왓장을 갈고 있었다.우리는 무엇을 참구하려고 할 때, 그 알려는 마음으로 인해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이켜 보지 않고, 자신이 부처가 되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만다. 아마도 대부분은 무엇이 덫인 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걸려든다. 그리고 또 어떤 대상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틈도 없이 출발부터 하기도 한다. 수행에서 대
‘나’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나’라는 인식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관념에 초점을 모으고 살아간다. 이때부터 일어나는 모든 느낌과 생각은 우리의 본질과 상관없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관념의 정보를 바탕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생겨난 새로운 관념의 정보는 퇴색하여 필요 없는 정보와 바꿔가면서 자신에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가는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닌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렇게 생
자신의 삶을 의심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가상현실)’에 등장하는 ‘네오(Neo)’는 자신의 삶에서 흥미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네오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해커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는 일과 세상일이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무엇이 사실적인 삶인지 모르고 헤매는 중이라 의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모피어스(Morpheus)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가상이 아닌 사실을 경험한다. 영화 속에서 표현하는 가상의 세상과 진짜 세상은 그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없이 듣게 되는 본인 이름이 변해가는 본인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불렸을 때, 스스럼없이 바로 대답했다면 그는 어느 때 대답한 것이 그의 진짜 이름에 대답한 것이 되겠는가. 시간 속에서 몸은 쉼 없이 변하고 있다.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마음도 변한다. 변하지 않으려는 것도 또한 변하는 것이다. 아마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으로도 손댈 수 없는 본바탕일 것이다. 바탕은 지나가는 무엇이 나타나더라도 변했다고 하지 않고, 무엇이 사라지더라도 변했다고 하지 않는다. 바탕은 그 바탕으로서 움직임이
여섯 감각기관이 없는 사실을 찾아내어 발견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한, 시작 없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해 알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의 뇌는 세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의 뇌는 분석된 정보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통해 더 나은 것을 찾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다양한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하는, 알지 못하는 심리적인 압박에 의한 인식 작용 때문일 것이다. 지속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물질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보고자 하는 마음은 생길 수가 없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물질을 발견하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콩을 심어 콩이 나고 팥을 심어 팥이 나는 이치들뿐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이치를 벗어난 마음을 가진다면 염치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미 주어진 세상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그만큼을 원해서 지금 그렇게 일어나고 있는 것뿐이므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각양각색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사실은 없다.그 차이는 사람의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각자의 마음 작용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다. 이
진리는 ‘믿는다, 믿지 않는다.’는 것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없고, ‘한다, 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 차이가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타나거나 나중에 나타나는 차이는 분명히 있다. 빠르고 느린 차이가 있다고 해서 지식이나 사량분별하는 마음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기에 행위 없이 나타난다. 이때의 행위 없음은 동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작용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번의 돌아보는 앎에 있다. 이때 돌아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꿰뚫는 일이지만 특별함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있다 보니, 언제나 확고한 어떤 앎의 상태나 어떤 앎의 느낌으로 사물을 확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적인 찰나의 앎의 상태는 없다. 지금 바로 알고 있는 그 마음뿐이다. 그 보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 외에 생각으로 키운 마음도 아니고, 생각으로 줄인 마음도 아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마음만 없다면 보이는 그대로의 마음이 전부다. 다만 그대로의 마음을 취하여 해석하면 안 된다. 그대로의 마음은 속함이 없기 때문에 ‘있다, 없다’의 개념으로 판단하면 그대로의 마음이 되지 못한다. 판단
세상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물음에서 우리는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동시에 그 질문자가 말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을 말하는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우선 질문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인식시켜주어야 한다. 그 잘못된 질문이 무엇으로부터 나왔는지도 알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왜 이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모든 마음을 담기 때문에 그 질문자에 대해서는 완전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은 시대가 변하더라도 수행자들의 뇌리에 맴도는 화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구하는 이는 많지 않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 질문에 왜 허둥대며 움직이느냐이다. 허둥대는 것이 무엇인지만 알면 자신이 무엇인지에 거의 가까이 닿게 된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지만 아마 대부분은 놓치는 부분일 것이다. 몸과 마음은 어떤 일을 추진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성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진하는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되돌아보기 어렵다. 만약 되돌아본다면 추진할
선지식이 전하는 말길을 따라 수행을 지어가다보면 이런저런 아리송한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참구하게 되는 여러 선어(禪語)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자주 접하는 표현에는 ‘둘이 아니다.’,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모양도 아니고 모양이 아님도 아니다.’ 등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모양 짓지 않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까? 딱 부러지게 규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구도 그것을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못 본 것이냐고
알면 너무 쉽고, 모르면 너무 어렵다.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해와 해석만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단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작곡가가 하나의 음표를 이용하여 다양한 음률을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의 단어도 아주 다양한 표현을 가지고 있지만 사전적인 하나의 의미로만 알고 있다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음률을 듣지 못한다. 음표가 위치에 따라 춤을 추듯, 단어도 음률을 가지며 춤을 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단어 혼자만으로는 춤을 출 수가 없다.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력을 가지게 된다. 그
어디에도 없는 세상과 어디에도 없는 나를 만들어 놓으면 본질에 대해 궁구하더라도 끝내 그 본질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방향성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세상에서 배우는 방식처럼 앞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배우고자 하는 자에 대하여 객관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배우는 자가 살아온 나이와 경험은 진리와는 아무 연관성이 없음을 알고, 출발하는 순간부터 마음으로 일으키는 분별을 쉬고,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말이 있다. 선뜻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유는 시작점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문제의 답에 빠지게 되면 헤어날 수가 없다.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일으키는 생각은 사유의 폭을 넓히지 못한다. 사유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묶여 있는 관념을 어떻게 풀어 놓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닭과 달걀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면 어떤 논리를 전개하더라도 나중에 자신의 궤변에 자신이 도로 갇히게 된다. 모양과 언어가 사용된다고, 그것이 존재한다고 단정하면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