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광주 증심사

증심사 대웅전 전경 모습.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한국전쟁당시 불탄 것을 1971년 중건했다. 현재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1호다.
통일신라 860년 철감선사 도윤 개창
광주 명승지 1호의 문화유산 도량
해마다 오백전서 ‘오백나한제’ 열려
90cm높이의 철조 비로자나불 ‘압권’

며칠 차가운 바람이 불더니 다시 봄 맞이를 하듯 따뜻한 기운이 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꽃바람이 아직 내륙에는 닿지 않았지만 사람들 옷차림의 변화는 벌써 민감하다.

날씨가 풀리고 꽃이 피면 사람들은 산과 들로 꽃구경을 간다. 빛고을 광주 시민들은 무등산을 간다. 시민이라면 한번쯤 무등산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친근한 곳이 무등산이다. 무등산(無等山)이란 명칭은 고려 때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이다.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은 세간의 모든 중생과 같지 않으므로 무등(無等)한 것이요,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기에 무등등(無等等)하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무등산을 대표하는 사찰 중 가장 중요한 사찰을 꼽으라면 증심사(證心寺)를 말한다. ‘마음을 증득한다’는 의미의 사찰이다. 증심사는 광주 동구 운림동에서 무등산 중머리재를 오르는 산머리 왼쪽에 위치한 사찰로 송광사 수말사이자 광주 명승지 1호의 문화유산이다.

비로전 및 오백전 전경
마음을 증득하는 곳, ‘증심사’
대부분의 절은 그 절이 지어진 내력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일과는 다른 데가 있어 신비롭고 환상적인 스토리일 때가 많은데 아무래도 종교적인 공간이다 보니 그리 윤색되는 면이 있다.

증심사는 통일신라시대인 860년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스님이 개창하고, 고려 선종 11년인 1094년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했다. 조선 세종 25년인 1443년에 김방(金倣)이 다시 중수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게 된다.

이후 광해군 원년인 1609년이 되어서야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3대 선사가 힘을 모아 중창하게 된다. 그 후 신도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한국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다시 1970년에 이르러서야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복구되었다. 참 우여곡절이 많은 사찰이다.

그럼 증심사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을까. ‘마음을 증득하다’는 뜻을 가진 증심(證心)은 왜 붙여졌을까. 증심사는 창건과 관련해 독특한 연기설화를 지니고 있다. 신라시대 무주땅에 한만동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 이야기는 한만동의 할아버지가 태수 벼슬을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태수의 집에 득이라는 종이 있는데 툭하면 술에 취해 상전에게 대들기가 일쑤였다. 어느날 술에 취한 득이가 사라져 버리자 노한 한태수는 득이의 처를 광에 가두고 만다. 봉변을 당하게 될 득이의 처는 갓 시집온 한만동의 어머니가 도와 도망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한만동의 어머니가 돌아가 초상을 치르는데 한 스님이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생전에 은혜를 입었던 득이의 아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혜를 갚기 위해 무등산 자락에 묘 자리를 잡아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만동은 승주고을의 원님이 되었고 집안에도 점점 부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리가 얼마나 좋은 명당인지 궁금했던 한만동은 지관에게 그 자리를 살피게 했는데 지관은 그리 좋은 자리가 아니라며 옮기라 하였다. 이를 믿어버린 한만동은 하인을 시켜 묏자리를 파기 시작했고 한 노승이 나타나 이를 말렸다. 지관에게 속은걸 알게 된 한만동은 다시 묏자리를 메우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노승은 절을 세우고 불공을 드리라 일렀다. 그때 한만동이 액땜하기 위해 노승이 잡아준 터에 세운 절이 지금의 증심사라고 한다

조선시대 때인 1500년대의 책들에 ‘증심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가 1800년대 이후에 ‘징심사(澄心寺)’라고 불렀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지금도 무등산을 올라가는 많은 시민들과 증심사를 찾는 신도들이 저절로 마음을 증득하는 수행자가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는 없을 듯 하다.

증심사 고려오층석탑(사진왼쪽)과 조선칠층석탑
오백 나한과 얽힌 사연 전해져
증심사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 외에도 불사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전해진다.

조선시대로 넘어와 세종 임금 때 광주에 경양방죽을 축조한 김방이 관세음보살의 현몽을 좇아 세 번째(1443)로 증심사를 크게 일신시켰다 한다. 이곳에 오백나한을 모시고 오백전을 지은 이도 김방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1592) 때 불탔고 광해군(1609) 때 석경, 수장, 도광 스님에 의해 한 차례 더 큰 불사가 있었다. 일제 때에는 한국불교의 정통임을 자부하는 도량으로 자리매김 하기도 하였다.

그 후 증심사는 한국전쟁 때인 1951년 4월 22일 밤 9시에 불이 나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 회승당, 취백루 등의 건물이 불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근 주민들의 도움으로 오백전을 화마로부터 지켜냈다는 점이다.

지금도 해마다 오백전에는 ‘오백나한제’가 열린다. 스님들의 바라춤과 영산재, 그리고 화마를 이겨낸 오백나한들의 영험함을 받기위한 기도객들로 붐빈다.

증심사 신라삼층석탑
예술성이 넘치는 문화재 많아

증심사 경내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석탑 3기가 모셔져 있다. 특이한 점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석탑으로서 예술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경내에는 지방문화재인 오백전(五百殿)ㆍ3층석탑ㆍ5층석탑ㆍ7층석탑ㆍ오백나한(五百羅漢) 및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31)ㆍ석조보살입상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 중 3층석탑은 통일신라시기 탑으로 증심사 창건 이후의 역사를 대변한다. 대웅전을 우측으로 돌면 3층석탑이 모습을 보인다. 통일신라 말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철감선사가 증심사를 창건한 시점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땅과 맞닿은 기단부가 2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3층으로 탑을 쌓아올린 형태로 높이가 3.41미터다. 높지 않은 높이에 기단이 두툼하기 때문에 퍽 안정감이 느껴진다. 거기에 지붕모양인 지붕돌의 네 귀퉁이를 하늘을 향하도록 추켜올려 경쾌함까지 전해준다. 화려한 장식이 없는 대신 정제된 우아한 맛까지 살아있는 탑이다. 1971년 해체 복원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고려 후기 만들어진 5층석탑은 복장유물을 잃어버린 사연이 있다. 5층석탑은 탑 자체보다는 탑 내부에서 나온 보물들로 더욱 유명해졌다. 1933년 해체 수리를 하던 중에 탑 안에서 19센티미터의 5층 철탑을 비롯해 작은 철부처 2구, 수정 1개, 염주로 추정되는 청옥 23개, 그리고 금동불 2구가 나왔다.

그중에서도 금동불 2구는 통일신라시기 유물로 국보로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은 것들이었다. 이 중 부처님이 서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입상’은 크기가 15.9센티미터로 작은 불상이었다. 나머지 1구의 불상은 ‘보살입상’으로 크기가 18.2센티미터로 금동불이었다.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쓴 보관이며 두르고 있는 옷의 결 따위가 섬세하고 정교하게 살아 있었다.
국보급 불상의 출토에 세상은 떠들썩 했다. 다행히 이 2기의 불상은 증심사 대웅전 내 유리상자에 보관돼 일반인이 참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던 1948년, 여순사건이 터지게 된다. 무등산 일대에 빨치산이 자주 나타나자 광주경찰서가 이를 보관한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중에 이 유물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말았다. 결국 국보 2점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탑에서 발견되었던 나머지 유물들도 그때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7층석탑은 조선 중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탑신 부분에 연꽃과 산스크리트어를 새겨 넣은 단순하고 소박한 양식의 탑이다.

대황사에서 모셔온 철조비로자나불
대황사서 옮겨 온 철조비로자나불

안타까운 사연은 증심사의 철조비로자나불에도 전해진다. 이 불상은 처음에는 대황사라는 고찰에 있던 불상이었다. 오래전 폐사된 이후 대황사지에 1934년 전남도청이 들어서게 된다. 그로 인해 대황사에 있던 철조대불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왔다.

처음 이 철조비로자나불이 모셔진 곳은 대웅전이었다. 1963년 보물 131호로 지정된 뒤 1970년대에 비로전을 새롭게 지어 모시고 대웅전에는 삼존불을 모셨다.

이 철조비로자나불은 약 90센티미터 높이로 타원형 얼굴에 길고 예리한 눈. 머리카락은 고동처럼 곱슬곱슬한 나발형이다. 고개를 약간 안쪽으로 집어넣었고 양쪽 어깨에 걸친 옷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형상이다.

증심사에는 이처럼 신라 고려 조선시기의 다양한 유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서로 닮은 듯 각자의 색깔을 발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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