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보시 공덕은 한량이 없으니…

중생에게 번뇌가 거듭됨은
자신을 위해 보시하기 때문

己施一切 得報如芥子 (위기시일체 득보여개자)
救一厄難人 勝餘一切施 (구일액난인 승여일체시)
星雖有光 不如一月明 (중성수유광 불여일월명)
生垢心重 所施恒(중생구심중 소시항위기)
菩薩悲心施 如灰去(보살비심시 여회거중예)
救濟慈悲施 普群生類 (구제자비시 보위군생류)
如是慈悲施 功德無窮盡 (여시자비시 공덕무궁진)
如此微妙施 安樂諸(여차미묘시 안락제중생)

번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체에 보시하는 것은 개자(겨자) 씨만큼의 과보를 얻을 뿐이지만, 한 명의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나머지 일체에 보시하는 것만큼 수승합니다.

뭇 별들이 비록 빛을 내지만 하나의 달의 밝음 같지 않듯이, 중생에게 번뇌심이 거듭되는 것은 늘 자신을 위해 보시를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자비심으로 보시하기에 중생의 번뇌가 재처럼 식었고, 자비로운 보시로 구제하되 두루 모든 중생들을 위해 합니다.

이와 같은 자비의 보시는 공덕이 한량이 없고, 이와 같은 미묘한 보시는 모든 중생을 안락하게 합니다.

해설
초의선사가 이르기를, “중생이 중생인 것은 욕심이 많아서다. 그러나 욕심으로 치면 부처만큼 욕심 많은 이가 없다고 했다. 놀라운 직관력이 아닐 수 없다. 부처만큼 욕심 많은 이가 없다니! 온갖 중생을 다 구제하시려는 부처님의 원력(願力)욕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제바라 보살의 가르침은 좀 더 직접적이다. ‘중생에게 번뇌심이 거듭되는 것은 늘 자신을 위해 보시를 하기 때문입니다(生垢心重 所施恒?)’라고 했다.

오늘날에 이르러 원력(願力)’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불자들이 원력이라는 말 대신에 기도(祈禱)’라는 말을 즐겨 쓴다. 기도는 신께 바라는 바를 비는 일이다. 소원을 비는 일이며, 또한 비는 의식을 이르는 말이다. 불교에 있어 기도라는 말 보다는 원력을 세운다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원력의 근본은 중생구제에 있다. 원력은 곧 보살심이자, 보살행을 다짐하는 마음이며 실천이다.

대표적으로 불자들이 예불 때마다 독송하는 천수경이 원력을 발원하는 내용이다. ‘개경게부터 이미 발원의 문장이 시작되고 있으며,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을 시작으로 관세음보살님께 발원하는 문장으로 경이 시작된다. ‘여래십대발원문이 그렇고, ‘사홍서원도 모두 발원문이다. , 불자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불법을 배워 지혜를 얻고, 방편을 얻어 중생을 구제하는 데 중심을 둬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마음의 자비로운 보시라야 공덕이 한량없고, 모든 중생을 안락하게 한다. 그러면 번뇌심이 거듭되는 자신의 중생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구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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