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과 현대미술 - ⑤ 오토 피네(Otto Piene)

작품 활동 중 禪사상 접한 철학도
‘ZERO운동’ 핵심 멤버로도 참여해
물감대신 불을 이용한 작픔 세계는
삼독·번뇌 태우려는 구도심을 의미
“삶의 존재 가치 찾아 나선 예술가
禪을 통해 세상의 평화·자유 꿈꾸다”


▲ 오토 피네의 작품 ‘Die Sonnebrennt(1966).’ ‘태양을 태우다’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작품은 불가능한 사실을 인식으로 전환하는 창의성을 보여줬다.
작업실에 등장하는 불꽃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불꽃은 시간이 흐르면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즉 물감 대신에 불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가 있다.

오토 피네(Otto Piene, 1928~2014, 독일)은 삶의 방향에 전환을 가져다줄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미학적 패러다임을 구축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선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후 쾰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도한 그는 ‘ZERO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불은 일상에서 꼭 필요한 수단이다. 인간이 진화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 또한 불의 발견이다. 불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중심에 있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거대한 것들도 모두 사라지게 하는 위력을 가진 불은 예술에서는 새로운 생명력을 잉태하는 개념으로 해석되고 표현된다.

오토 피네가 자신의 작품에 불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삶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일들 속에서 진정한 정신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던 그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존재방식에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 되고자 하고, 무엇을 얻고자 하며, 무엇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이 점차 정리가 되며 현실의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내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ZERO운동의 중심멤버로 활동을 하는 그는 제로운동의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즉, ZERO운동은 예술운동이며, 문화운동 나아가서 정신의 변화를 만들어 가야한다는 시대적인 요구를 투철하게 고뇌하며 일상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들을 모색하게 된다.

변화한다는 것은 과거의 것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과거의 가치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속도에 가속력을 높여 주는 것이 예술가들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의 특성은 창의성이다. 즉, 과거에 나타난 그 어떠한 천재성도 시간이 흐르면 보편화되고 더 이상 그 천재성이 유효하지 않게 된다. 다시 새로운 창의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그의 미학에서 “예술은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그것은 천재들만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능력이 있으면 천재가 되는 것이다. (현재는 모두가 천재들이다)

수행자들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보이는데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깨달음에 다다르면 수행의 방법들보다 깨달음의 가치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천재성(깨달음)을 들어내는 것이다. 즉,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창의적인 관점들이 요구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오토 피네는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불을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 불은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좋은 도구였으며 자신이 인식하는 예술의 가치를 표현하는 재료로서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보인다.

불은 공기가 존재하여야 한다, 공기가 존재하지 않으면 불은 사라진다. 여기에서 공기는 정신성을 상징한다. 창의적인 정신성이 동반하지 않는 불은 그저 일상의 요리에서나 사용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성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오토피네는 철학적 사유를 이야기한다. 일상의 환경 속에서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변화가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인지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고정된 대상일 뿐이며, 우리의 삶도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 같다.

공기와 불은 항상 공존한다. 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정신도 깊은 성찰을 통한 본질적 가치를 인지하여 행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가치가 없이 드러나는 행위는 일상일 뿐이다. 그 속에서 어떠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다시 말해 동일한 예술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정신적인 깊이가 수반되지 않는 행위는 그저 스스로를 위한 유희일 수 있다.

▲ ‘Grusse Feuerblume(1965).’ 꽃이 가지는 보편화된 이미지와 형상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꽃을 통하여 느껴지는 존재의 가치를 찾아 표현했다.
‘Grusse Feuerblume(1965)’는 ‘커다란 불로 만든 꽃’이며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후에 불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이미지이다. 꽃을 그리는 방법은 오랜 시간 변화하며 다양한 역사적인 꽃그림들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제시되는 불을 이용한 꽃의 이미지는 새로운 시도이며 예술가의 정신성이 들어 있는 추상화된 작품이다. 그는 실제적인 꽃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많은 예술가들이 꽃을 그리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을 잘 아는 오토 피네는 자신은 꽃이 가지는 보편화된 이미지와 형상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꽃을 통하여 느껴지는 존재의 가치를 찾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교한 시간성과 불의 화력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나타나는 우연적인 형상은 보는 사람들에게 전혀 꽃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꽃에 대한 어떠한 관계성도 없어 보이는 작품에 작가는 왜 이작품의 제목으로 ‘커다란 불로 만든 꽃’을 제시했을까?

관념적인 관점에서 꽃을 생각한 관람객이라면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어렵다고 할 것이다. 어렵다는 것은 주관적 판단이다. 필자 역시 전시를 진행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 많은 관람객들은 어렵다고 생각할까? 세상에 처음부터 어려운 것은 없다. 단지 익숙하지 않고 자신이 인지하는 코드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자신의 관념적 사고 속으로 모든 존재하는 것을 넣어놓고 이해하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지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그 어떠한 것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만 변화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보이는 것만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 만큼 모순적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변화를 추구하던 오토 피네는 이 작품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하기를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작품의 제목을 다른 것으로 했어도 그 의도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Die Sonnebrennt(1966)’는 ‘태양을 태우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앞의 작품과 유사하게 이해 될 수 있다. 태양을 불로 태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작가는 불가능한 것을 하고자 하였을까? 이러한 시도 역시 창의적 사고의 발상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하여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인식적 변화의 관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더불어 현존재의 가치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오토 피네가 선택한 방식이다.

필자는 오토 피네의 작품들을 실제로 보면서 서양식 수행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의 옛 수도 본(Bonn)에 있는 독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작품들을 처음 본 순간 필자는 그가 선(禪)을 수용하여 이해하고 이를 자신의 삶과 예술의 과정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존재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하여 느낄 수 있었다.

오토 피네를 비롯한 당시의 예술가들이 이해한 선은 현 존재의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 같다. 자신들이 처한 시대적인 암울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신적인 방식을 추구하던 그들에게 선사상은 창의적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사고의 전환은 대상에 대한 성찰과 관조 나아가서 표현에 대한 변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본질적 의문 등에서 시작이 되며 이를 통하여 새로운 규범들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규범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외형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가치를 인지하고 그 가치를 시대에 맞게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여 본질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본질적인 관점에서 보면 변화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간화선에서 1700공안을 각 개인적 관점에서 참구를 하지만 그들이 도달하는 꼭짓 점은 하나이다. 마치 히말라야 산을 올라가는 길이 수천이 되나 정상에서는 모두가 만나듯이 과정의 다름을 통하여 본질의 가치가 다르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방법을 가지고 존재가치를 논하여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토 피네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철학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선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며,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통한 통찰력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며 나아가서 관람객이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는 예술을 지향하게 된다.

그에게 불은 삶의 과정에서 늘 따라다니는 탐진치를 태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의 삶의 존재가치를 찾아 나선 예술가는 선사상을 수용하며 수행자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세상의 평화와 자유를 꿈꾸었다.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그의 작품들은 현존하며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여 통찰하라고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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