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한국을 떠난지 33일차를 맞은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 792km를 행선하여 부처님의 고향에 성큼 다가갔다.순례단은 인도에서 부처님 출가와 정각, 그리고 초전법륜과 전법에 관하여 활동했던 흔적을 따랐다.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가 있는 네팔 접경 지역을 10여km 앞둔 3월 13일은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온 이유를 참구하며 한발씩 정진했다.순례단은 이날 콜리족의 환대를 받았던 브렛터와를 출발하여 칸드퍼, 굴레리아를 거쳐 코리야까지 행선했다.수많은 경전에서는 부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부처로 태어나는 것이 예정되어
“스님들이 우리 지역에 오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부처님 설법이 2700년 전에 있었지만 오늘날 생생히 들리는 듯합니다. 이곳에서 3km 걸어가면 있는 로히니 강은 물 때문에 콜리야족(콜리족)과 샤키야족(석가족)이 싸웠을 때 부처님께서 설법하셔서 화해시키신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해결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은 바로 대화입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배워 화합할 것입니다.” - 무하마드 자심 치안판사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그리고 불교도들이 공존하는 곳, 부처님께서 석가족과 콜리족을 화합시킨 마을에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화합의 장이 마
이국땅에 불법을 전하기위해 원력을 세운 전법자들은 수많은 난관을 뚫어야 했다. 관습과 제도, 낯선 이에 대한 냉대는 물론 각종 박해에도 맞서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는 이교도의 공격이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불교는 세계종교가 되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신흥종교였으며, 수많은 이교도의 냉대 속에 순교의 정신 없이는 전법 포교가 불가능했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은 3월 12일 하르푸르부터 지역거점도시인 마하라즈간지를 거쳐 네팔 국경 근처인 브렛터와까지 26km를 행선했다.이날 순례단이 거쳐간 마하라즈간지(Maharajgan
인도의 불교 성지 순례는 보통 8대 성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북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UP주)와 비하르주, 네팔에 흩어진 이들 성지를 순례하는 것은 큰 공덕으로 여겨졌다. 룸비니와 보드가야 등 아소카 석주에서 보는 것처럼 아소카 왕이 순례한 기록도 있다.이중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정각지 보드가야,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르를 특히 4대 성지라고 하며, 기원정사가 있는 쉬라바스티, 부처님이 즐겨찾은 바이샬리, 마가다국의 수도로 죽림정사가 있는 라지기르, 그리고 도리천을 방문하고 어머니 마야데비에게 불법을 설한 후 다시
길 위에서 탄생하시고, 길 위에서 깨달으시고, 길 위에서 가르침을 펴시고, 길 위에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 부처님의 길을 따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이 인도 부처님 길 위에서 불교 중흥의 원력을 담은 108원력문 초안을 공개했다.대중 속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월결사 정신을 담아 전법과 포교의 원력을 담은 108원력문으로 참회 일변도 였던 기존 108참회문을 대체하여 향후 불교 대표 기도문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10일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와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의 사이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부터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까지 인도와 네팔의 접경지역으로 향하는 순례의 여정은 순례단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열반지에서 다시 탄생지로 가는 여정은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걸은 기록이 남겨져 있지는 않지만, 그 가르침이 널리 퍼졌던 이 곳을 걷는 것 만으로도 순례단에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이날 순례단은 쿠시나가르를 출발하여 세마라까지 약 28km를 행선했다. 열반당과 다비장 사이의 잘 닦인 길부터 마을과 마을을 잇는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의 제방길까지 다양한 길을 걸으며 2500년 전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오른 쿠시나가르에서 순례단은 다시 한번 불제자로 불교중흥의 발원을 하며 의지를 다졌다. 뭇 중생에게 행복의 가르침을 전하고 열반하신 부처님께 순례단은 어떠한 물질적인 공양보다 중요한 불제자로서 그 길을 따라 행복을 전하겠다는 마음을 올렸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9일 쿠시나가르 열반당에서 열반지 대법회를 봉행했다.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 인도순례길에 오른지 29일차, 누적거리 총 689km, 인도 현지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순례단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환희로움으로 가득
‘가자, 쿠시나가로!’ 카쿠타 강에서 목욕을 하고, 춘다를 위로한 부처님은 쿠시나가르로 향하며 이렇게 말하셨다. 늙고 병든 몸이지만 대중의 앞에 서서 당당히 걸어가신 모습으로 부처님은 그렇게 걸으셨다. 낡은 수레와 같았다, 혹은 사자와 같이 당당했다는 인간붓다 그 자체, 부처님을 닮아가는 순례단도 그와 같이 걸었다.인도 순례 중후반부를 부처님 열반길을 따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8일 부처님께서 열반을 향해 걸은 마지막 길을 따라 걸었다. 약 30여일간 쌓인 피로도, 아픈 몸도 순례단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7일 27일차 순례를 진행했다. 비하르주 두바울리야를 출발하여 마다착, 마쵸아 비하르커드를 거쳐 다시 우타르프라데시주(유피주)로 들어와 쿠시나가르 권역의 삐뻐라까낙까지 24km를 행선했다.이날 삐뻐라까낙에서 춘다의 공양이 이뤄진 춘다마을 파질나가르까지는 4km 남짓 떨어진 곳, 순례단은 열반의 여정에서 일어난 공양의 의미를 화두로 정진했다.보드가야 파트나 바이샬리 등이 있는 비하르주를 벗어나 유피주 접경에 들어서자 마을주민들이 나와 북과 트럼펫을 불고, 꽃공양을 올리며 순례단을 환영했다. 공양
쿠시나가르에 도착하여 반열반에 드시던 날 부처님의 몸은 황금색 가사보다 더 빛났다. 부처님은 강에서 목욕하시고 사라수 두 그루 사이, 북쪽으로 머리를 둔 채 침상 위에 발과 발을 포개고 오른쪽 옆구리를 붙여 사자처럼 누우셨다. 마지막 유훈을 남기신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시니 이때가 바이샤카(Vaisakha) 2월 보름날 밤이다.음력 2월 15일인 3월 6일, 열반재일을 맞은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부처님 열반 후 사부대중이 열반회를 열었던 것처럼 사부대중이 함께 정진했다. 이날 행선은 고팔간지부터 칼라스쿨와, 쉬브라지푸르,
부처님은 한 평생을 일관되게 깨달음의 길을 전하신 길 위의 스승이셨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여래라 할지라도 육체를 타고난 중생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마지막 하안거 장소인 바이샬리에서 부처님은 열반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시고, 수구초심(首丘初心)으로 고향 쪽을 향해 길을 떠난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3월 5일 사다우아에서 고팔간지까지 약 24km를 이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걸었다. 고팔간지는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까지는 약 72km 떨어진 곳이다.부처님께서 열반으로 나아간 길, 근본으로 돌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 43일 여정의 반결제에 따라 순례단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한다. 3편에서는 인도순례단 석보원 기록원의 도움으로 순례단과 인도의 불심을 느낄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한편,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은 3월 4일 케사리야 대탑을 바라보며 행선을 시작하여, 후새니, 두마리아, 카라스카트를 거쳐 사다우아까지 총 26km를 행선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의 여정을 따라온 랏차비족을 위해 발우를 띄워 전한 칸타키강을 건너 마을과 마을을 다니며 불심을 전했다. 부처님의 열반길을 따르는 순례단은 3월 8일 열반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