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승이 물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학승이 말했다. “그것은 간택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 밭일이나 하는 촌놈아, 무엇이 간택이란 말인가?” 問 至道無難唯嫌揀擇 如何得不揀擇 師云 天上天下唯我獨尊 云此猶是揀擇 師云 田奴 什?處是揀擇 조사들의 공격은 날카롭다. “무엇이 간택이란 말인가?”하고 반문했을 때 노승이 창을 들고 찌르는 것이다. 이때 학인은 한 손으로는 방패로 막고 한 손으로는 창을 들고 찔러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방패와 창을 동시에 쓰는 것인가? “견공은 던지는 흙덩이를 쫓아가지만 사자는 던지는 자의 눈빛을 째려본다.” 학승이 물
?학승이 질문했다. “질문이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상어(常語)가 어그러진 거야.” 問 無問時如何 師云 乖常語 선사들의 대답은 늘 평범하고 맞는 말이다. 상어(常語)는 평상시 대담이다. 상어가 어그러졌다는 것은 대담이 깨졌다는 것이다. 말없이 앉아있을 때, 상어 쪽에서 보면 대담이 깨진 것이다. 그것일 뿐이다. 그 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지 말라. 단순한 것이 답이다. 동시에 옳은 답이다. 선은 있는 그대로 말한다. 더 이상 나가면 도의 담백함을 잃는다. 학승이 물었다. “사방의 산이 마구 다가올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도망갈 길이 없다.” 問 四山相逼時如何 師云 無出跡 지진이 일어나 사방이 무너질 때 어디로 도망치면 좋을까? 일방이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의 적합한 뜻입니까?” 조주 스님이 침을 뱉었다. 학승이 물었다. “그 일은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은 또 한 번 침을 뱉었다. 問 如何是祖師的的意 師涕唾 云其中事如何 師又唾地 조사의 뜻? 나는 그것에 침을 뱉어 주리라. 침을 뱉는 뜻이 무엇인가 물었는가? 그것에도 나는 침을 뱉어주겠다. 누가 감히 조주 스님의 침 뱉는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하겠는가? 마음이 추악함으로 덕지덕지 때묻어있는 사람은 조주 스님의 이 행동을 보고 추악하다고 몸을 떨어댈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대들이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대의 심성이 깊은 병이 들어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슴에 손을 대고 자문해보라. 일상사에 흔들리고, 두렵고, 일치되지 않는가를. 그대가 조주 스님의 뜻
?학승이 물었다. “껍데기를 보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엇이 원인인가?” 問 不見邊表時如何 師云 因什?與? 껍데기는 양변(兩邊)의 세계이다. 상대적인 개념의 세계, 즉 선악, 빈부, 장단, 중생과 부처, 염정 등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언어는 이 양변에 걸린다. 양변은 껍데기의 세계이다. 사물의 진실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양변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양변은 완전히 사라진다. 더 이상 삶에 있어서 양변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누가 이런 경지에 들어갔다면 스승은 어떻게 평할까? 조주 선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그것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반문을 통한 가르침이다. 양변은 알맹이가 아니고 껍데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주의 주장이 떨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근본으로 돌아가 뜻을 얻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대답하면 곧바로 어긋나.”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의심하는 마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대답하면 곧바로 어긋나.” 問 如何是歸根得旨 師云 答?卽乖 問 如何是疑心 師云 答?卽乖也 근본은 삼라만상의 근원을 말한다. 우주 만물이 나온 곳, 사람이 나온 곳, 만가지 법칙이 나온 곳이 근원이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가 뜻을 얻을 것인가? 조주 선사는 대답하면 곧 어그러진다고 말했다.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근본인데 어찌 말로 표현할 것인가. 그곳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그것은 곧 어그러트리고 만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뭐라
?학승이 물었다. “즉금(卽今)을 없애버렸을 때는 무엇이 적합할 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즉금을 없애버리고 그것을 물어보지 말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적합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말했어. 물어보지 말라고.” 학승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커서 바깥이 없고, 작아서 안이 없다.” 問 盡?今時 如何是的的處 師云 盡?今時莫問那箇 云如何是的 師云 向?道莫 云如何得見 師云 大無外 小無內 가장 적합할 때는 지금이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이 최적의 시간이다. 매순간이 모이면 평생이 된다. 매순간 행복하면 평생 행복하다. 지금을 벗어나서 최적의 시점이 언제이겠는가? 그렇다면 가장 적
학승이 물었다. “길에서 도인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대해야 좋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진주(陳州)에서 온 사람은 허주(許州)의 소식을 알 수 없어.” 問 路逢達道人 不將語?對 未審將什?對 師云人從陳州來 不得許州信 길에서 도인을 만나 뭔가 뜻을 통해보려면 말이나 침묵 등으로 응대해서는 안 된다. 말이나 침묵으로는 진정한 도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응대하면 될까? 학인의 질문에 조주 스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지역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진주에서 살던 사람은 허주에 대한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인이 아니면 도인들의 대화를 모른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말에도 전문 용어가 있
?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모든 것의 근원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이야.” 학승이 말했다. “학인은 모르겠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두공(斗拱)은 차수(叉手)하고 있지만 알지는 못해.” 問 如何是萬法之源 師云 棟梁椽柱 云學人不會 師云 拱斗叉手不會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은 집을 짓는데 없어서 안 될 중요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집을 대표한다. 조주 스님이 용마루와 대들보와 서까래와 기둥이 근원이라고 말한 것은 집의 중심이 이들이듯 만물도 그 중심이 되는 것이 근원이라고 비유로서 말한 것이다. 그러면 만물의 중심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도(道)다. 그러면 도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만물이다. 그러므로 조주 스님이 집이 근원이
학승이 물었다. “각기 한 소질을 지닌 사람들이 몰려왔다면 그 일은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의 눈은 본래 똑바르니까 그 일에 대해 논하지 않겠네.” 問 衆機來湊 未審其中事如何 師云 我眼本正 不說其中事 손이나 발을 능숙하게 움직이는 자가 이 도를 익히면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 곧 도가 된다. 그러나 도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리 손이나 발을 움직여도 그것은 절대 도가 될 수 없다. 일대 장인은 원래 도에 가깝다. 그러나 손발을 능숙하게 움직인다고 다 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원하는 것 없이 다만 능숙하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어느 날 도와 맞닥뜨릴 날이 있을 것이다. 장인이자 곧 도인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도예가가 도를 행하면 도가 더욱 빛날
? 학승이 물었다. “학인은 특별한 것을 묻지 않겠습니다. 스님께서도 특별한 대답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괴짜군.” 問 學人不別問 請師不別答 師云 奇怪 절에 오면 다들 특별한 무엇을 찾는다. 그런데 와서 보면 특별함이란 없다. 남들처럼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곳, 사람이 그저 살아가는 곳이 절이다. 이렇게 평범한 곳이지만 거기서 도(道)와 참 진리, 높은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선사의 말은 특별하지 않다. 그저 평범한 말들일 뿐이다. 다만 평범한 말에 대한 뜻을 모르기 때문에 평범한 말이 특별한 말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조주 스님의 ‘개가 불성이 없다’는 말이나, ‘사람 잡는 칼 따위는 쓰지 않는다’, ‘나는 고봉의 정상에 올라가지 않는다’, ‘뜰 앞의 잣나무’ 등
?학승이 물었다. “높고 험준하여 오르기 어려울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고봉의 정상에 올라가지 않아.” 問 高峻難上時如何 師云 老僧不向高峰頂 높고 험준한 곳은 도의 세계이다. 학승이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높고 험준하다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 선사는 “나는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내가 가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라는 답변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처음 입문해 도를 이루고자 생각할 때라면 누구나 도는 높은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간혹 잠잘 때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릴 정도가 되어야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초심자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
학승이 물었다. “두 개의 거울이 서로 마주 볼 때 어떤 거울이 밝은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구나.” 問 兩鏡相向那箇最明 師云 ?黎眼皮蓋須彌山 산 밑에 가서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눈동자에 산이 비추어있을 것이다. 그때 눈동자 주인이 눈을 끔벅이면 산이 일시에 덮여버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눈꺼풀 하나가 산을 보이게 하기도 하고 덮어버리기도 한다.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다’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한 평가는 그대 주인공의 뜻에 맡기겠다는 의미이다. 거울은 청정 본성을 비유한 것이다. 청정 본성은 차별이 있을 리 없다. 누구의 본성도 밝음은 같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선지식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본성이 빛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