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8일 897호]

 학승이 물었다.
“높고 험준하여 오르기 어려울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고봉의 정상에 올라가지 않아.”

問 高峻難上時如何 師云 老僧不向高峰頂

높고 험준한 곳은 도의 세계이다. 학승이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은 높고 험준하다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물은 것이다. 그러자, 조주 선사는 “나는 높은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로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내가 가는 길은 그런 길이 아니라는 답변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처음 입문해 도를 이루고자 생각할 때라면 누구나 도는 높은 정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간혹 잠잘 때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릴 정도가 되어야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초심자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도는 그렇게 높은 곳에 있지 않다. 도는 마음이 있으면 항상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소한 일상 속에도 도는 있다. 또 깨달음은 어느 순간 스승의 가르침이 가슴에 새겨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행자 때 금강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던 육조 스님이 그 표본이다. 그후 조주 스님, 임제 스님 역시 단발의 가르침을 듣고 즉석에서 깨달았던 선사들이다. 이 돈오(頓悟)법이 선문의 정법이다.

학승이 물었다.
“모든 것(萬法)과 더불어 반려(伴侶)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사람이 아니다.”

問 不與萬法爲侶者是什麽人 師云 非人

반려라는 말은 ‘짝’이라는 말이다. 짝 하다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산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마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몸을 위해서도 살아가야 한다. 몸은 곧 물질이고 물질에서 마음이 나오므로 몸을 잘 가꾸어야 한다. 6바라밀과 10선계를 잘 행한다면 그가 곧 보살이고, 부처이다. 반드시 그의 몸에서 방광이 일어날 것이다.

무엇을 먹고 안 먹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혼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 아직도 그런 발상과 오만에 사로 잡혀있다면 그는 미개인이고, 불교를 저해하는 마구니 중에서도 상 마구니다. 이 몸으로 ‘아름다운 행’을 한다면 그가 바로 참 사람이고 불보살이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분에게 예배하고 찬탄하는 것을 쉬지 말아야 한다.

장관이 물었다.
“스님, 원컨대 종지(宗旨)인 중도(中道) 일구(一句)를 말씀해 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오늘은 장관에게 드릴 돈이 없습니다.”

問 請師宗乘中道一句子 師云 今日無錢與長官

불교의 종지는 중도(中道)이다. 선종, 교종을 막론하고 중도(中道)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부처님의 직접 가르침이 중도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120세까지 살았던 조주 선사는 당시 국왕은 물론이고 여러 계층의 신하들도 자주 찾아뵈면서 설법을 들었고, 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드렸다. 그 때 한 장관이 중도에 대해 조주 스님의 견해를 물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조주 선사는 “오늘은 장관에게 드릴 돈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중도대의를 설법했다. 선사의 설법이 짧게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이것이야말로 중도에 대해 명확하고 충분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도대체 중도가 무엇이기에 불보살을 막론하고, 역대 종사들이 이 앞에서는 더 이상 주를 달지 않고 주늑이 들고 마는 걸까? 만일 본 납자에게 조주 스님의 중도론을 평하라 하면 “조주 스님은 덕신(德信) 스님과 같아서 자비가 너무 많다”할 것이고, 만일 본 납자에게 중도에 대해 한 마디를 묻는다면, “임제 스님은 성질이 불같이 급해서 할 한 마디로 천하를 바꾸어놓는다”고 할 것이다. 천하의 납자들이여! 더 이상 뒤로 빠지지 말고 선지식을 찾아가서 지금 당장 당당하게 자신의 중도론을 개진하라. 그대들은 이미 천상천하에 우뚝 선 붓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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