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6호 7월 11일자]


학승이 물었다.
“두 개의 거울이 서로 마주 볼 때 어떤 거울이 밝은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구나.”

問 兩鏡相向那箇最明 師云 闍黎眼皮蓋須彌山

산 밑에 가서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눈동자에 산이 비추어있을 것이다. 그때 눈동자 주인이 눈을 끔벅이면 산이 일시에 덮여버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의 눈꺼풀 하나가 산을 보이게 하기도 하고 덮어버리기도 한다. ‘눈꺼풀이 수미산을 덮는다’는 말은 모든 것에 대한 평가는 그대 주인공의 뜻에 맡기겠다는 의미이다.
거울은 청정 본성을 비유한 것이다. 청정 본성은 차별이 있을 리 없다. 누구의 본성도 밝음은 같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선지식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본성이 빛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조주 선사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언변이 좋았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평생 몇 마디의 말로 사람을 제접할 뿐, 때리거나 소리를 꽥꽥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임제 선사는 할과 방을 즐겨 써서 사람을 제접했으므로 두 선사만 해도 접화 방법이 다르다. 빛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임제 선사에게 가서 깨닫지 못하지만, 조주 선사에게 가서 도를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조주 선사에게는 깨닫지 못하던 사람이 임제선사의 할에는 금방 잠에서 깨어나고 마는 경우가 있다. 빛이 다르므로 그 빛에 반응하는 인연도 다르다. 다만 그러할 뿐 누구 빛이 더 밝고 밝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주인공의 뜻한 대로 평가할 뿐이다.

학승이 물었다.
“저는 최근에 총림에 입문했습니다. 스님의 지시를 구합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창천(蒼天), 창천(蒼天)!”

問 學人近入叢林 乞師指示 師云 蒼天蒼天

창천(蒼天)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러서 감탄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너는 본래 맑고 맑다. 도대체 무엇을 닦고 배운단 말인가? 다만 너 자신이 완벽한 경지를 간직하고 있는 부처임을 스스로 알면 돼!” 하고 소리 지르는 것이다.
본 납자가 부연 설명하자면 “초심자라고? 아, 싱그러운 모습 그대로여! 더 이상 때를 묻히지나 말라. 가리켜 달라고? 말도 안 돼. 너는 그대로 붓다야. 그 무엇도 가리킬 것이 없어. 그러다가는 되래 때가 뭍을 지도 몰라. 그대로 천년이고 만년이고 붓다의 길을 가라. 원래 세상은 밝고 티 한 점 없는 청정 세계야. 너의 인식을 바꾸라고. 멀쩡한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어. 세상은 그야말로 낙원이고 창천이야.” 라고 말하겠다.
만일 학승이 “수행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하고 재차 묻는다면 “너는 본래 완성이야. 원래 행복해. 거기서 조금이라도 뭘 찾으면 엉뚱한 길로 가는 거야. 단지 네가 붓다라는 사실만을 자각하고 붓다의 길을 가라.” 하고 말하겠다. 천하의 납자들이여, 나의 이 가르침이 잘못되었는가, 잘 되었는가?

학승이 물었다.
“전구(前句)는 이미 가버렸고 후구(後句)는 밝히기 어려울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뭐라고 말하면 틀려버려.”
학승이 물었다.
“스님께서 가려내 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물어라(問), 물어(問).”

問 前句巳往後句難明時如何 師云 喚作卽不可 云請師分 師云 問問

사실 도를 드러내기 전에 뭐라 하는 것은 다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막상 도를 드러내는 말[後口]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이 되던지 알고 보면 틀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도를 논할 것인가? 조주 스님은 무엇이든지 좋으니까, ‘물어라 물어’하고 말하고 있다. 도의 세계를 말 몇 마디로 설파하는데 이력이 난 노승은 말로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식이다. 천하의 납자들이여, 조주 선사의 이 답변이 틀린 것인가 맞는 것인가? 내게 묻는다면 “비온 뒤에 산색은 푸르다”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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