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호 7월 25일]

 

학승이 물었다.
“학인은 특별한 것을 묻지 않겠습니다. 스님께서도 특별한 대답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조주 스님이 말했다. “괴짜군.”

問 學人不別問 請師不別答 師云 奇怪

절에 오면 다들 특별한 무엇을 찾는다. 그런데 와서 보면 특별함이란 없다. 남들처럼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곳, 사람이 그저 살아가는 곳이 절이다. 이렇게 평범한 곳이지만 거기서 도(道)와 참 진리, 높은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선사의 말은 특별하지 않다. 그저 평범한 말들일 뿐이다. 다만 평범한 말에 대한 뜻을 모르기 때문에 평범한 말이 특별한 말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조주 스님의 ‘개가 불성이 없다’는 말이나, ‘사람 잡는 칼 따위는 쓰지 않는다’, ‘나는 고봉의 정상에 올라가지 않는다’, ‘뜰 앞의 잣나무’ 등의 말은 모두 평범한 말이다. 그 의미를 해득하고 보면 더욱 평범하다는 것에 실감이 갈 것이다.
그런데 특별함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음이 항상 이분법으로 나누어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 남과 여, 부자와 가난한 자, 잘난 자와 못난 자 등의 상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본 〈조주록〉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양변을 떠나서 읽으면 〈조주록〉이나 기타 선사들의 선문답은 그저 아이들이 장남 삼아 떠들어내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삼승교(三乘敎)를 떠나서 어떻게 사람을 교화하십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이 세계가 존재한 이래 해와 달이 바뀐 적이 없었어.”

問 三乘敎外如何接人 師云 有此世界來 日月不曾換

석존이 중생의 근기를 3가지로 나눈 것이 삼승이다. 삼승 중에서 성문과 연각을 합하여 2승이라고도 부르고, 보살승만 따로 떼어서 일승(一乘)이라고도 한다.
일승(一乘)은 단계를 설정하지 않는 평등주의이다. 누구든지 마음이 있으면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다 붓다라 칭한다. 보살 이상이 1승이다. 이승(二乘)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다. 성문은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法)에 연연해하지 않는 경지이고, 성인 초입에 들어간 사람이다. 연각(緣覺)은 낮은 근기의 수행자로서 겨우 인과법을 듣고 깨달은 자이다.
부처님 말씀에 3승이 있지만 이것은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달라 방편으로 나누어 놓은 것에 불과하고 붓다의 뜻은 오직 일승(一乘)을 전하려고 했을 뿐이라 했다.
조주 선사는 해와 달이 바뀐 적이 없듯이 선사들이 아무리 독창적인 가르침을 편다해도 결국 삼승을 떠나서 따로 가르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선불교가 중국에서 발달한 불교이나 선불교에도 부득이 초급과 고급자들의 가르침이 각기 다르다는 말이다. 애석하지만 선불교 안에도 근기의 차별은 있다. 그대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학승이 물었다. “삼처(三處)로는 통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식(識)을 벗어나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식(識)이 곧 분 밖의 일이다.”

問 三處不通如何離識 師云 識是分外

삼처는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을 말한다. 육근은 눈·귀·코·혀·몸·뜻의 사람의 여섯 가지 기관을 말하고, 육진은 물질ㆍ소리ㆍ향기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인데 육근에 닿는 6가지 대상이다. 육식은 안계ㆍ이계ㆍ비계ㆍ설계ㆍ신계ㆍ의식계인데 육근에 육진이 닿자마자 향기가 난다, 맛있다 등을 판단하는 작용을 한다.
눈은 색깔을 보고 본 것에 의하여 식(識)이 빨간 색인지 파란 색인지 구분을 한다. 이 구별하는 의식을 식(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몸으로 보거나 느끼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면 절대 도를 통하지 못한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종합적 의식으로도 도를 짐작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식(識)을 벗어나 도를 통할 수 있을까?
조주 선사는 역설적으로 식(識) 자체가 이미 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잘 생각해보아라. 식으로는 도저히 도에 근접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식이 없으면 무엇으로 도를 알 것인가.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