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디스토피아 서사는 계급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흔히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을 꼽는다.이 작품들은 모든 것이 감시되고 통제되는 사회의 폐해를 꼬집고 있다. 〈우리들〉의 주인공은 단일제국에 복무하는 수많은 번호 중의 하나인 ‘D-503’이다. 단일제국에서는 내밀한 사랑조차도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1984〉의 배경이 되는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도 국민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택배기사
모든 사람은 저 나름대로 재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이 나의 재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장자〉에 보면 ‘쓸모없는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치 없는 것은 없습니다.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대로 가치가 있고, 생채기가 있는 나무는 그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궁전의 대들보가 되어야 하고, 웅장한 집의 대들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쓸모가 없어서 산을 지킨다는 것은 쓰임이 없어 생명을 보전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쓰임이 없다고 하지만, 나무는 그
석가모니 붓다께서 말씀하신 수행법은 계(戒)-정(定)-혜(慧)이다. 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부정적인 느낌을 많이 느낄수록 그것은 더 큰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픈 몸과 아픈 마음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파도친다. 여기에 불을 붙는 격이 되는 언행이 곧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계를 지키기 않았을 경우, 그것은 몸과 마음의 고통이 되어 다시 파도친다. 서로 상승 작용하여, 아주 작은 썰물이라도 몇 배의 밀물이 되어 후려치게 된다. 그 이유는 잠재의식 속의 유사 고통을 자극하여 그것과 함께 증폭 작용을 하기 때문이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옳은가“정의(正義)란 결코 단순하게 정의(定意)할 수 없다”고 미셀 푸코는 말했다.하버드 법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도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답은 밝히지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실토한 바 있다. 이 책의 원제도 〈정의: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Justice:What’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그는 정의에 대한 상반된 여러 상황을 제시하며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숙고하게 한다. 예를 들면 영국이나 미국에서 대리모를 구할 때,
남국의 남녘, 바닷길이 끝나고 대륙으로 건너가는 섬들의 길목에 서귀포 보목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귤꽃 향기 가득하면 그리운 임이 오시는 날이다. 부처님 오시는 날이다.한 30여 년 전에 이곳을 처음 찾은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드문 남방의 돔 형태의 사찰이 신기하기만 했다. 사찰에 들어서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참배를 하고 나오니 자그마한 체구의 노스님이 나오셨다. 차담실로 안내를 받고 사찰을 짓게 된 유래를 들을 수 있었다. “절 앞에 보이는 오름 이름을 아시는가. 제지기오름이라고 하지. 절지기에서 변형된 이름이야. 예로부터
음양이 교차하는 오월올해는 음력 오월의 초입에 하지(夏至)가 들었다.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를 지나면서부터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한 해가, 하지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하지 다음 날은 양수(陽數) 5가 중첩되어 연중 양기가 가장 강하다고 여기는 단오(端午)이다. 이처럼 양력 유월의 21일과 22일에 나란히 하지와 단오가 들었으니, 민속 통념으로 보자면 나쁜 음기를 몰아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시절인 셈이다. 동지를 ‘작은 설’이라 불렀듯이, 대척점의 하지는 한 해의 반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날이다. 왕성한
-지금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말 흉내를 제대로 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가 조실스님에게 물었다.-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오. ‘살불살조의 경지를 그대들이 안다고? 만약 그대들이 안다면 무엄이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그는 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오. ‘그 대답은 붓다가 남긴 스리나가르의 칼이 할 것이다.’ ‘지금 칼이라고 하였는가?’ ‘그렇다. 나는 그 칼을 찾아 스리나가르로 갈 것이다.’-미쳤구나. 제정신이 아니야. 아버지를
〈원문〉“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옷 속에 여의주를 매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궁핍을 면치 못해 객지를 다니면서 밥을 빌어먹는 것과 같다. 비록 빌어먹는 신세지만 여의주는 그대로 옷 속에 있느니라. 문득 지혜로운 사람이 나타나 옷 속에 구슬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면 그는 여의주를 가지고 있으므로 큰 부자인 셈이니라. 그런데 이 여의주는 본래 그의 옷 속에 있었던 것일 뿐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니니라.아난아, 저 연야달다가 미쳐 달아났던 광기(狂氣)가 쉬면 미치지 않았을 때로 돌아오리라. 비록 광기가 쉬지 못한들 보리의 성품이
살갗 관법살갗 관법은 손가락 운동과 병행된다. 검지를 편안하게 구부린다. 자세는 의자에 앉은 바른 자세, 무릎 높이를 수평으로 유지하고,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세워 준다. 양손을 수평으로 해서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검지를 구부린다. 의지를 미심에 둔다. 삼차신경 안분지의 영역을 살펴보는 관법이다. 나선 호흡으로 꼬리뼈까지 들이쉰 다음 천천히 내쉬면서 머리부를 씻어준다. 자자작 자자작 자극이 생겨나고 심장 박동이 집중한 부위에서 느껴지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 쪽으로 올라간 경로에서는 두개골 안쪽 감각을 살펴본다. 눈
세상은 멈추어 고정된 실체가 없지만, 존재한다는 마음 때문에 해결하지 못하고 번민을 가진다. 우리가 번민에 대해 모르는 것은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오온은 번민이 생길 수 없다는 지극히 간단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번민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번민이 왜 개체적인 번민일까를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집착과 욕망에 따라 번민의 강도가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오온의 화합은 사람의 손금처럼 같은 것이 없다. 그만큼 형성된 길이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양이 같은 사람
5월의 산사 그리고 도심의 거리는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하는 연등으로 환하게 빛난다.감사하고 또 감사함으로 빛나는 5월. 그 가슴 벅찬 5월에 새겨보는 경구가 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즉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시불(卽心是佛). 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는 경구가 있다. 곧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며 진심이 아니면 부처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럼 ‘부처’라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 맑고 푸른 5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 주변의 모습, 모두가 부처의 모습 아닐까?그래서 “성불하세요”라는 인
표정/ 유인서서울역 화장실, 토닥토닥 화장중인 또래의 처녀에게 건네지는 거울 속 여승의 눈빛이 아슴하다 더러는 저 눈빛을 본 적이 있다 동성로 현란한 거리에서 지나가는 남녀들 보던 밀짚모자 속 어린 여승의 눈빛도 저것이었다 찰나 속의 하염없음예초기가 지나간 풀밭 위의 바람 냄새, 애벌 깎은 나무의 속껍질 냄새, 놋식기의 엷은 쇠비린내, 감기 끝에 돋아난 생비린내, 갓 버무린 겉절이 냄새 같은 사람의 냄새어둑살 내린 직지사 대웅전, 찢어진 파초그늘에서 훔쳐들은 젊은 스님네의 염불 소리도 저 부근에 있었다 세상 어떤 처연한 울음의 표정
죽음의 괴로움은 인간의 가장 근본이 되는 문제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리 부자여도 권력이 많고 부귀영화를 누릴지라도 죽음의 괴로움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나는 윤회나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 가는 사후 세계를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깨치고 첫 설법인 〈초전법륜경〉에서 당신은 “중도(中道)를 깨달아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문을 열었다”고 설하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중도대선언이다. 죽지 않는 문을 열어 보임은 부처님이 우리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부처님은 우리
3 이 분 마르기 전에 돌아오소서모르겠다는 듯이 난타가 눈을 치떴다. 그러자 아나율 사형이 몸을 돌리며 이런 말을 하였다.-너는 이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신심을 내었지만 우리는 오로지 지옥에 가기 위해 수행하고 있다.-무슨 소립니까?-모름지기 수행인은 지옥에 가기 위해 서원을 세운다는 말이다.-아니 지옥에 가기 위해 서원을 세우다니요?-진정한 수행승이라면 구해야 할 중생은 지옥에 있을 게 아닌가. 지옥을 천상으로 전환하는 작업. 그것이 곧 승이 할 일인데 너는 이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신심을 내고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원문〉부처님이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듣지 못했느냐? 실라성(室羅城)에 살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아침에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에 나타난 제 얼굴의 눈과 눈썹을 좋아하다가 홀연히 자신의 머리에는 얼굴과 눈이 안 보인다 하여 도깨비가 되었다고 화를 내며 까닭 없이 미쳐 달아났으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무슨 이유로 까닭 없이 미쳐 달아났겠느냐?부루나가 말하였다.“그 사람은 마음이 미쳤을 뿐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부처님이 말씀하셨다.“묘각(妙覺)이 뚜렷이 밝아 본래 그대로 밝고 미묘하거늘 이미 망(妄)이라 일컬은들
소통, 소망하는 글을 보관하는 통한 사찰의 중심 불전엔 당대의 종교장엄 역량이 결집한다. 특히 부처님 상을 모신 장대한 불단엔 불교의식을 위한 의례 장엄구들을 특별히 제작하여 배치한다. 향로와 촛대, 불패, 경전함 등이 그런 의례 장엄구들이다. ‘소통(疏筒)’도 그 중의 하나다. 소통은 ‘소대(疏臺)’라고도 부르는데, 이름부터 낯설다. 어디에 사용하는 의례구인지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소통은 불교의식을 행한 발원문 등의 글을 적어 넣어두는 통이다. 쉽게 말해 소원을 담은 글을 간직하는 통이라 보면 된다. 생김은 편평한 긴 사각기둥
눈, 귀, 코, 입, 얼굴, 두정부 피질의 네 모서리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면 두부체감각계가 교정된 것이다. 연수부 교정이 이루어졌으면 다음 단계 호흡으로 수련을 심화시킨다. 백회에서 끌어들인 나선의 느낌을 꼬리뼈 끝까지 이끌어간다. 천천히 호흡을 들이쉬면서 연수까지 내려왔던 나선의 느낌을 꼬리뼈 끝까지 끌고 간다. 경수부와 흉수부를 지날 때 느낌이 살아있는지 관찰하고 요수부와 천수부를 지날 때도 느낌의 상태를 관찰한다. 나선의 감각이 꼬리뼈 쪽으로 내려갈 때는 뻑뻑하게 억제된 느낌이 척수 전반에 걸쳐서 형성된다. 반복해서 수련하면
세상에 펼쳐지는 현상들과 근원은 어떤 관계가 있을 것 같지만, 어둠과 밝음의 관계처럼 서로는 한 번도 같은 공간에서 마주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이라는 공간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모아 새로운 원리를 만들고 나면, 어떤 큰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흥분하여 공표하는 것을 반복하지만, 그것은 진리의 일부분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진리라는 근원을 더 혼란스럽게 한 것일 뿐이다. 세상은 이러한 발견하고 발전된 혼란을 더 좋아하여 동조하게 되고, 다시 그들이 파놓은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 자신이 발견해야 하는 새로운 것을 인위적으로 찾는다.
마음 지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붓다, “변화가 존재 본질” 강조해인생의 변화 존중하고 받아들여야이 과정서 ‘영적 성장’이 이뤄진다지금부터 마음 수행을 시작해보길어느 날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내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어났다. 지난 몇 달간 명상센터 차기 이사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들이 쌓여 무의식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이제는 제주를 떠나고 싶다. 아픔에도 때가 있는가? 돌아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왜 이렇게 아픔이 반복해서 일어나는가? 아픔도 파도처럼 순환이 일어나는가? 최근의 일을 보면 동료와의 지루한 갈등, 이
부처님의 형상(形像)을 조성할 때, 필수 도상으로 여의주를 언급한 바 있다. ‘깨달음의 본체’로서의 여의주가 불교에 있어 핵심 도상(종교적 기호 또는 상징)임을 설명하였다. 청정범행의 완성이자 궁극의 불성인 법신(法身)으로서의 표상임을 논하였다. 본 글에서는 ‘깨달음의 작용’으로서의 빛(光, 광명)에 대해 풀이하고자 한다. 깨달음의 작용으로서의 빛 또는 광명은 부처님 형상을 조성할 때 ‘광배(光背)’로 나타낸다. 즉, 여의주와 광배가 없는 불상은 없다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여의주와 광배가 없으면, 부처님형상이라 할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