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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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지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붓다, “변화가 존재 본질강조해
인생의 변화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이 과정서 영적 성장이 이뤄진다
지금부터 마음 수행을 시작해보길

어느 날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내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어났다. 지난 몇 달간 명상센터 차기 이사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들이 쌓여 무의식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이제는 제주를 떠나고 싶다. 아픔에도 때가 있는가? 돌아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왜 이렇게 아픔이 반복해서 일어나는가? 아픔도 파도처럼 순환이 일어나는가? 최근의 일을 보면 동료와의 지루한 갈등, 이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달갑지 않은 시선들, 나도 이제는 그러한 주변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수행으로 다져진 내적 힘이 형성될 때도 되었는데, 명상수행은 내 마음을 안정시켜주지 않았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언젠가 떠난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떠나갈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떠나는 이유는 존재하는 그곳이 부적합하여 존재에 불편함이 느껴질 때 일어난다. 이사장직을 그만둔 입장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방에 계속 머무를 수 없기도 하거니와 더 이상 나의 역할이 명상센터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매주 명상지도사 자격과정을 강의하는 것과 토요일마다 전문상담사 슈퍼비전이 있으니 그 일에 대한 책임이 남아있다. 나는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일을 수행이라고 생각하며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이곳의 일이 때때로 벅차고 힘들어도 삶 자체가 수행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 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하나는 내가 진정 수행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느냐는 점이다. 말하자면 내가 가정을 꾸리면서 수행의 길로 온전히 가고 있는가? 그리고 제대로 수행을 하고 있느냐이다. 다른 하나는 수행자라고 하는 나를 어느 스승이 제자로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수행자는 누구나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수행 길이 흔들리지 않아 정진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명상센터나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준다면 아낌없이 내 줄 수 있는가? 그리고 명상센터는 내가 진리와 자비를 바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인가하는 점이다. 무엇보다 내가 내면의 경험을 이해하고 내면의 자유를 얻고자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나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재가수행자로서 겪는 어려움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찾는 스승이 지닌 지혜와 고결함에 신뢰와 존경을 느껴야 한다. 또한 내 존재 내면에 기쁨이나 여유,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내가 나의 내면의 생각을 깊이 들여다봐야 하고, 상황이 옳다 싶으면 과감히 뛰어드는 적극성도 가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수행자가 갖춰야 할 조건이 지극히 부족하고 수행자로서 살아갈 허울만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붓다는 단지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제자들에게 거울이 됐다. 그분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아무런 칭찬이나 비판의 말씀이 없어도 자신이 불자로서 정체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때 만나는 순수함이 바로 우리 자신의 참본성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만일 부처님의 마음 상태라면 어느 누구를 보더라도 그들 본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한결 같이 만난 스승이 있었다. 나다니엘 호오돈의 <큰바위 얼굴>이다. 단지 책속에서만 존재하므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분은 내 안에 늘 함께 살아왔다. 마치 소설속의 소년처럼 어렸을 때부터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만날 수 있었던 큰바위 얼굴이 바로 그분이다. 큰바위 얼굴은 어느 때 만나도 변함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성장을 이끌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최초의 영적 경험은 어린 시절에 이뤄진다. 그 경험은 신비하고 성스런 대상과의 자연스런 일체감으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은 나의 수행에서 그런 일체감을 다시 발견하게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부모님과 존경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면 그 역시 다른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서 존경과 신뢰가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온전한 사랑을 받았고, 그 힘은 자라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진정한 자비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욕구를 배려하고 자신의 한계를 존중한다. 이러한 사랑과 자비의 힘도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붓다도 한계에 부딪친 때가 있었다. 어떤 비구들이 다른 수도승들을 계율 위반으로 비난했고, 비난 받은 이들은 사실을 부인하면서 상대방이 계율을 어겼다면서 맞받아쳤다. 이때 그들 앞에 나타난 붓다는 모두 서로에게 사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의 제자였음에도 붓다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붓다는 온갖 방법으로 그들을 순종시키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붓다는 그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버려두셨다. 그리고는 비구들을 떠나 숲속으로 가셨다. 거기서 동물들에 둘러싸여 생활하며 고요히 명상에 들어가셨다. 붓다는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그 이상은 손을 떼셨다.

나도 이제 늦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한계에 이르렀고 제주국제명상센터에 대한 역할도 한계에 달했다. 이 나이에 세상 만물을 향해 끊임없이 자비를 베풀기도 어렵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만이라도 온전히 자비를 베풀어야 할 때라고 본다. 그래서 늦었지만 나를 위한 수행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흔히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위해 살다가 세상을 위한 삶으로 의식을 확대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나를 위한 의식으로 축소하려고 한다.

붓다는 마음챙김에 관한 가르침에서 우리 행동을 자극하는 마음상태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항상 선한 일만 원하리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착각이다.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집착이 일어날 때, 두려움이 생길 때, 의존심이 솟아날 때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찬찬히 내면의 소리를 듣다보면 의존과 사랑을 구분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열릴 때, 집착에서 벗어날 때, 상호존중과 배려가 나타날 때를 구분할 수 있다. 이런 분별에 근거하여 우리 행동은 지혜롭고 자비로워질 수 있다. 지혜로운 행동과 의존적 행동을 구별하는 데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가족의 욕구 충족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불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영성생활이 지속될 것이라고 본다.

내 인생에서 다양한 변화들을 피해갈 길은 없다. 그 변화 속으로 들어가는 비결은 수없이 반복해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인생의 괴로운 단계들을 헤쳐 나갈 때 이런 순환과 그 과정에 우리 마음을 내맡기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중국 선종 3대 조사 승찬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정한 깨달음과 통일성의 경지는 불완전함을 근심하지 않을 때 나타난다.”

우리 몸은 완전치 않고 마음도 완전치 않으며, 우리 감정과 온갖 관계들 역시 완전치 않다. 하지만 불완전함의 근심을 떨치는 것을 이해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불완전함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나의 인생에서 발달단계는 저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씨앗을 품고 있다. 그것이 어느 때인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 나의 경우 요가 아사나를 시작한 것이 나이 50세에 들어서였다. 그때 나는 늦은 나이여서 몸으로 하는 요가를 배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을 듣고 요가지도자께서는 참 좋은 나이에 요가공부를 하려고 하시네요. 요가는 늦은 나이가 없습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의지가 있을 때입니다라고 용기를 주셨다. 이를 계기로 하타요가를 꾸준히 하게 되었고 방학 때마다 인도 비하르 요가대학에 가서 요가연수를 받았다. 그 후 영성요가에 중점을 두면서 라자요가를 하게 되었고, 아봐타와 위빠사나 공부를 함께하였다. 그리고 제주국제명상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수행자로서의 준비를 하였다. 영성생활은 내가 자신에게 적합한 인생의 과제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성숙한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여태까지 적합한 인생의 과제를 명확하게 알고 수행을 해오지는 않았다. 붓다는 끊임없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인생이 펼치는 끊임없는 순환들을 존중하고 그에 따른 내면의 과제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영적 성장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

만물의 변화는 자명한 이치인데도 우리 사회는 자연의 흐름을 놓쳐버린 채 온갖 방법으로 변화를 무시하도록 가르친다. 어린아이들은 자유롭게 뛰어 놀며 건강한 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 훈육과 때 이른 입시교육에 시달린다. 수많은 중년 남성들은 계속해서 청년으로 살려하고 여성들은 마치 영원히 늙지 않겠다는 듯이 젊음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늙는다는 것이 패배라도 되는 양 그것에 저항하고 두려워한다. 인생의 자연스런 순환을 존중할 때 우리는 인생의 각 단계마다 영적인 면이 담겨있음을 발견한다. 각 단계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가져오는 지혜와 경험을 담고 있다.

마음의 지혜는 여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있다. 그것은 항상 여기 있었고, 언제든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와 통일성이 우리의 진짜 모습인 참 본성이다. 영성수련을 시작하거나 명상서적을 읽거나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마다 나는 필연적으로 이 진리, 즉 인생 그 자체의 진리를 향한 열림의 과정을 시작한다.

붓다는 말한다. 지극히 완벽한 순간이나 사물도 바로 다음 순간 변하고 만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마음의 자유이다. 그리고 모든 가르침에는 오직 한 가지 맛만 있으니, 그것은 자유의 맛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진정 수행자로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계속 일어났고 이제는 스승에 대한 의존이나 기대는 떨쳐 버리고 나 자신이 홀로 설 수 있는 좁은 의미의 수행이라도 하고자 한다. 나의 자유와 행복은 나 자신의 깊은 깨우침에서 일어난다. 남들이 어떤 말로 반박하더라도 그것은 중요치 않다. 나의 영적 삶은 내가 자신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온전히 연결됐을 때만 확고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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