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어지럽던 비상계엄하에서도 나라 운영에 대한 소신 당당히 밝혀 1960년대 대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강의 저서 〈부처님이 계신다면〉베스트셀러 “도를 도라고 부르는 순간 도가 아니다” 박정희 前대통령도 스님 유묵에 감동 ? -변호사님은 불교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 탄허 스님과도 인연이 많지요. 혹시 법불회 회원이었는가요? 저는 서울법대를 1965년도에 들어가서 1학년 시절에 탄허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한두 번인가 들었습니다만, 서울법대 불교학생들의 모임인 법불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어요. 그때 탄허 스님이 서울대에 오시면 허연 모자를 항상 쓰시고 다녀가는 모습을 본 기억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 당시에 금강경의 내용은 잘 몰랐어요. 그렇지만 1학년 때에는 법학 분야 이외에도
“짝할 이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라” 스님이 처음 주신 말씀 화두 ‘학자’로만 알았는데 매일 참선정진 “마음을 찾고, 마음을 잘 써야” 가르침 대상에 차별 안 둬 유불선 회통, 불교를 떠난 ‘유불선’ 없어 스님 잊히는듯해 안타까워 ? -영은사에 간 과정과 탄허 스님에게 인사드린 것을 말씀해 주세요. 들어갈 때가 1962년 가을이었어요. 영은사로 들어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들어갔지요. 영은사에 가서는 일소굴에 계신 탄허 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겨우 스물네 살이었어요. 저를 처음 보신 스님은 저에게 “지혜도 많고, 모든 것을 다 알지만 너와 더불어 짝할 사람이 없구나. 참 안됐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라”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처음에는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말
스님의 〈보조법어〉 읽고 발심 장자가 살아와도 스님 못 당할 것 물 흘러가듯 써내려 가시고 폭포수처럼 읽고 장강수처럼 해설 유불선 달통한 종합적인 도인 -스님의 책 〈내가 만난 선지식〉에 보면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간략하게 나옵니다. 어떻게 그런 인연을 갖게 되었는지 이번 기회에 알려주세요. 저는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우연한 기회에 송광사에 구경갔다가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에 만난 스님이 추강 스님이라고 송광사 주지까지 지낸 아주 훌륭한 스님입니다. 추강 스님을 만나고 나서 절에 들어왔는데, 효봉 스님이 그때 사미 신분으로 있었어요. 그때가 1957년 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송광사에서 추강 스님의 큰상좌인 벌교상고 교장선생님(조용순)의 상좌가 되어서 승적에까지 올라갔어요. 그때에는 비구
먹 가는 시간 아까워 사다 써 자신의 책 없어 〈화엄경〉도 빌려 권속 늘리려는 ‘전강’ 풍습 거부 宗旨 없으면 글자만 새기는 죽은 학문 장점만 보고 단점을 말하지 않아 -어떻게 해서 탄허 스님과 인연이 되었나요? 제 나이 스물한 살 때인가 동국대에서 스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1971년 경) 탄허 스님께서 동국대 대학선원장으로 계셔서, 1주일에 한 번씩 강의를 하러 오시더라구요. 근데, 오셔서 강의하실 때에 책은 안 들고 오시고, 분필 하나만 들고서 유불선 삼교의 원전을 전부 외워서 강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강의를 처음 보고서는 저는 너무나 놀랐어요. 그래 나는 저런 사람이 다 있구나, 얼마나 공부를 하면 저리 될까를 생각하였어요. 그때부터 스님은 나의 흠모의 대상이
“세상 제일 행복한 사람은 걸망 진 스님” 시·서·산문·철학·음악 등 통달 “참고 멀리 내다보고 다녀라” 가르침 생생 “인재 하나 키우려면 30년 걸려” 유지 받들어 글로벌 인재 육성해야 -탄허 스님은 원주의 지학순 주교(천주교)와 교류하였다는 말이 있어요. 지학순 주교도 월정사 방산굴로 스님을 자주 찾아와서 스님과 시국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어요. 그럴 때에 저는 차상을 올려다 드리고 나왔기에, 두 분의 대화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요. 하여간에 두 분은 시국과 나라를 고뇌하시면서 많은 소통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원주와 연고가 있는 최규하 대통령도 스님과 만나신 적이 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원주 봉산동 출신입니다. 그래서 저와도 많은 인연이 있습니다. 국무총리 시절에는 구룡사
스님은 선사이며 법사, 대종사 청담 스님, “이차돈의 순교 이래 제일의 불사는 탄허의 화엄경 번역” “통일 후 나라 이끌 인재 양성해야” 거사불교시대 올 것 예언 ‘본각선교원’은 거사 불교 준비 -교수님은 정년 퇴임하신 후 본각선교원을 여시면서 새로운 불교 활동을 하시는데 교수님의 불교 활동 저변에는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탄허 스님을 만난 것은 서울법대에 다닐 때(1961~1964)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 시절에 뵌 정황은 잘 기억나질 않아요. 그렇지만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입장에서 회고를 해보지요. 서울법대에는 법불회라고 동기생 10여 명이 만든 불교 서클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청담 스님의 법
한암 스님과 3년 편지… 출가 3년 묵언 팔만대장경 요지는 ‘명심견성’ ‘선악과’는 분별심… 깨치면 원죄 소멸 “흐르는 물도 아껴써야” 검소한 삶 ? -회장님은 탄허 큰스님을 어떤 스님으로 보고 싶나요? 저는 탄허 큰스님을 보통의 큰스님, 강백스님으로 부르는 것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선지(禪旨)로 모든 것을 말씀하신 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지가 큰스님의 당체입니다. 그것은 동산 큰스님의 49재 법문에서 큰스님이 하신 법문이 그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고 강조하고 싶어요. 제가 대학을 졸업한 그 해인 1965년도 여름에 부산 범어사의 동산 종정 스님이 열반하셨어요. 그 무렵 저는 선지식을 갈구하고 찾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산 스님의 49재 법회에 갔는데, 그때 탄허
대원암에서 민중불교 공부 모임 회칙 만든 후 출범전 안기부에 추적 스님, 새벽 2시 그날 강의 머릿속에 정리 탄허 스님에게 중용·대학 독강 공부 “바깥 경계에 끄달려 있는 이 멍충아” -대원암에서의 활동을 들려주시지요. 그때가 1975년 3월 경이었지요. 그때부터 내가 대원암에 자주 가서 스님을 뵙고, 상의를 하고 그랬어요. 공부를 하는 정식 모임은 두 번 정도를 가졌고, 비공식 모임은 여러 번 있었지요. 왜냐 하면 모임 준비에 대한 것도 상의하고, 스님이 나를 파악할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내가 사기꾼인지, 소문으로는 빨갱이라고 하는데 실제 그런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여간 그래서 나는 조계종에서 스님은 저 분(탄허스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고은, 황석영 그 사람들을 끌어들였지요. 고은, 황
? 〈서장〉공부, 불교가 ‘정신치료’ 확인 스님 만나는데 2년 걸려 가르침 핵심 ‘유불선은 하나’ “비굴하지말고 자존심 가져라” 강조 스님 정체성 한마디로는 어려워 -일제 말기부터 한국 문화에 대한 가치를 느끼셨군요. 미국에 갔다 와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셨는가요? 내가 미국에 정신분석을 공부하러 1954년에 갔는데, 앵커리지에서 기름을 넣는다고 할 때 72세 된 캐나다 사람이 내 옆자리에 탔어. 그 사람이 날보고 “어디로 가느냐”고 그래. 그래서 뉴욕에 간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무엇하러 가느냐”고 해서, 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에게 미국은 기초가 없는 고층건물이라고 그랬어. 건물이 높이 올라갈수록 붕괴된다고 하였단 말야. 그러면서 장차 미
“만해는 저울추·선사·혁명가야” 만해 연구의 결정적 동기부여 “공부는 한가지라도 10년은 해야” 탄허 스님 초청 사상강좌 개최 한양대 전체 들썩…일간지 보도 박한영 스님 잇는 대강백 -교수님은 강릉 지역에 살았고, 그 지역의 학교에 다니면서 큰 활동을 하였지요? 우리 집이 강릉포교당 근처예요. 그래서 학교는 강릉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인 1962년에 강릉불교학생회에 들어가서 강릉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8년까지 6년 동안 강릉포교당을 거점으로 활동을 하였지요. 중등부 부장을 중2 때에 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부회장을 하고, 고등학교 2, 3학년 때에는 회장을 하였어요. 내가 강릉불교학생회의 47대, 48대 회장인 셈이지요. 그 당시에 회장 선거할 때에
“대강백 관응 스님의 딸이 관응 스님에게 배우지 왜 나에게…” 영은사서 한달간 ‘장자’ 배워 탄허·관응 스님 밤새워 학문 토론 6·25 때 탄허 스님과 함께 피난 운문 강원 내외전 공부 스님 영향 -스님도 탄허 스님에게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오대산과의 인연부터 들려주시지요. 저는 탄허 스님과 인연이 있지만, 오대산의 방한암 스님과도 인연이 있어요. 이것부터 먼저 말씀드리지요. 저의 부친이 강백이신 관응 스님이신데 일제 말기에 노스님(관응)께서 월정사 강원의 내전 강사이셨어요. 그때 외전 강사는 동국대 교수를 지낸 원의범 교수이셨구요. 저희 집이 월정사 그 밑에 있는 마을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탄허 스님, 관응 스님, 원의범 교수는 동시대에 살면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요.
동국대 입학이 인연의 시작 스님 강의듣고 ‘불교’제대로 알게돼 연수원교수시절 모임 ‘다르마’ 권유 ‘인재양성’ 스님께 받은 가르침 ‘탄허 장학금’ 제정되었으면… -총장님도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남다르다는 것을 신문 보도를 통해 알았습니다. 우선 불교인연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고향이 경북 청도의 매전면입니다. 부모님이 불자라서 어릴 적에는 부모님을 따라서 절에 자주 갔어요. 그리고 고향에서 금천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인근에 있는 고찰인 운문사와 대비사에 소풍을 가서, 어린 시절부터 절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총장님은 1968년 동국대에 수석입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탄허 스님의 인연은 어디에서 이루어졌나요? 제가 1968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그해 5월인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