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22〉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이동식

 

이동식 / 이화여대·경북대 교수 정신치료학회 회장. 신경정신의학회 회장 등 역임 현재 정신과 의사
〈서장〉공부, 불교가 ‘정신치료’ 확인
스님 만나는데 2년 걸려
가르침 핵심 ‘유불선은 하나’
“비굴하지말고 자존심 가져라” 강조
스님 정체성 한마디로는 어려워

-일제 말기부터 한국 문화에 대한 가치를 느끼셨군요. 미국에 갔다 와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셨는가요?
내가 미국에 정신분석을 공부하러 1954년에 갔는데, 앵커리지에서 기름을 넣는다고 할 때 72세 된 캐나다 사람이 내 옆자리에 탔어. 그 사람이 날보고 “어디로 가느냐”고 그래. 그래서 뉴욕에 간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무엇하러 가느냐”고 해서, 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에게 미국은 기초가 없는 고층건물이라고 그랬어. 건물이 높이 올라갈수록 붕괴된다고 하였단 말야. 그러면서 장차 미국은 도(道)가 프리베이할 것이라는 이런 말을 하더라구. 그런 말을 듣고서 미국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해 보니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야. 시간이 너무 걸려, 돈도 많이 들고. 그래서 원래는 뉴욕대학에 3년 있으면서 공부하려고 하였는데 마지막 1년은 계약 취소해 버리고 1958년에 그냥 와 버렸어. 돈도 많이 들고, 배울 것도 없어서 2년 있다가 돌아왔지. 돌아오면서 구라파를 돌아보고 왔는데, 그때에 베니스 섬에서 열린 세계 제1회 철학자대회에 참가해서 서양 일류 철학자라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이게 뭐 이야기하는 게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야. 나는 귀국해서 생각하기를 한국 전통문화가 세계 최고이다, 한국인이 최고이다라는 그런 결론을 얻었어. 그러나 이런 생각을 얻어도 그것을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었어. 왜냐, 사람들이 안 믿으니깐.

-그러셨군요. 그러면 언제, 어떤 계기에 의해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는가요?
내가 1962년부터 성북동에 동북의원이라고 해서 정신병원을 냈어. 그것이 언제인가? 그런데 역경원에 이재복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울증이 걸린 이 사람을 어떤 사람이 나에게로 보냈어. 그 사람은 역경위원인데 대처승이고, 대전 보문학교의 교장이었어. 이 사람이 여기 2층에 입원해서 있었는데 처음 1주일은 아무 말도 없다가, 그 이후에는 〈서장(書狀)〉을 꺼내서 보더라구. 그 사람이 그 책을 보면서 나에게 그 내용을 물어보더라구. 내가 그 사람의 말에 답을 하다 보니 불교라는 것이 완전히 정신치료라는 것을 알았지. 불교가 순전히 정신치료다 이거야. 불교의 근본은 집착을 없애는 것이야. 나는 애응지물(碍膺之物)이라는 그것을 집착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정신분석으로 말하면 핵심감정이지. 그 이재복이라는 사람이 날보고 그 책을 한번 번역해 보라 그러는 거야. 그때에는 지금보다 한문 실력이 더 있었어. 그렇게 답을 하면서, 불교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그런 인연으로 불교를 알게 되었군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가요?
그래서 나는 동국대 조명기 총장을 찾아갔지. 조명기 총장은 일제 시대에 경성제대 종교사회학과 조수로 있었거든, 나는 정신과 부수(副手)로 있었으니 내가 알고 있었어. 그래서 동대 총장실로 찾아갔지. 그래서 만났지. 그게 1965년이야. 그래 조명기에게 우리가 불교를 배울 터이니 강사를 소개하라 그랬어. 그래서 소개받은 이가 죽은 이희익과 조계종단 교무부장을 하던 숭산 스님이야. 숭산 스님은 그때에는 행원이라고 했어. 그런데 이희익은 찾지 못해서 우리들은 행원 스님에게서 서장을 배우기 시작했어. 우리가 처음으로 배운 곳은 서울대병원에 학생심리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시작했어. 그런데 그 연구소의 조교가 방해를 해서 철학교수 연구실에서 했어. 방해한 조교는 서울 문리대 교수를 하다가 은퇴했지. 그런데 숭산 스님하고 시작하다가 숭산 스님이 많이 바빠서 두 번인가를 하다가, 자기 후임으로 넘긴 사람이 월운 스님이야. 월운 스님에게서 끝난 거지. 〈서장〉을 다 떼었거든. 그때 배운 사람이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심리학과 교수, 대학원생들이었어. 정신과 교수는 나중에 들어왔어. 김규용이라고 동국대에 있다가 서강대로 간 그 친구도 들었어.

-그러면 이제 탄허 스님과의 만남을 들려주시지요.
나는 그렇게 동양사상을 공부하면서 정신분석과 도를 결합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누가 그랬나? 동양사상의 도에 대해서는 탄허 스님이 많이 안다고 그래. 세월이 오래가고, 내가 금년부터는 기억이 좋지 않아서 소개해준 사람은 기억이 안 나. 그래서 학회에서 초청하려고 하였는데 잘 안 되었어. 그래 2년이 안 되어서 탄허 스님이 동국대에 와 있다고 해서 내가 갔거든. 탄허 스님이 바쁘다고 하면서 기회를 안 주어서 간 거야. 동국대에 참선하는 데(대학선원)를 가서 나도 참선을 한 시간 이상을 하고서 그때 만났는데, 만나는 데 1~2년 걸렸지. 그게 아마 처음이지. 그 이후로는 자주 만나게 되었지.

-참으로 어렵게 만나셨군요. 그것이 1966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만난 장소가 주로 어디였나요?
지금 기억나는 것은 고려대 옆의 대원암이야. 대원암에서는 단 둘이 많은 이야기를 서로 하였지. 그리고 그것이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탄허 스님이 나를 초청해서 월정사에 같이 간 적이 있어. 동국대학 불교대 승가학과 1기생의 첫 연찬회를 월정사에서 5박 6일 하였는데, 그때 나하고 동료 교수인 박홍규 교수, 서울대에서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그 교수와 김규용이라고 중세철학을 한 우리 또래인 그 교수도 같이 갔어. 그러고 또 내 제자들 상담하고 심리학하는 교수들도 갔거든. 교육 프로그램을 하니깐, 같이 가자고 해서 간 것이지. 그래 그런 연찬회를 하니, 나도 강연해 달라고 해서 갔어. 고속도로가 나지 않았을 때, 울퉁불퉁하는 길을 버스를 타고 갔지. 그때 탄허 스님이 월정사 조실로 있었거든. 그때 내 나이가 사십대였을 거야.

-탄허 스님이 고려대에 가서 교수님들에게 강의를 하였어요. 이런 강의에 이박사님이 관여하신 것이 없나요?
그거는 탄허 스님의 부탁으로 내가 만들어 준거야. 월정사에서 연찬회를 마치고 내가 서울로 돌아올 때에 탄허 스님이 버스 타는 데 와서 지식인들을 모아서 뭘 강의하도록 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어. 그래서 고려대에서 강의를 하게 됐지. 그때에 배운 책이 아직도 여기에 있어. 그리고 화엄경을 번역해서 낸 몇 십 권 책도 그때 돈 50만 원 주고 산 것도 있어. 하여간 그래서 내가 고려대 교수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교수와 학생들이 강의를 듣도록 하였어. 그래서 외부인도 오고 그랬어. 강의한 것은 장자와 영가집 등이었지. 처음에는 듣는 사람이 많아서 좌석이 모자랐거든. 그래 서서도 듣고 그랬어. 그런데 그때에는 학생 데모가 심해서 휴교령이 자꾸 내리고 그래서 사람 수가 자꾸 줄고 그랬어. 또 탄허 스님이 고대 철학과 교수인 손명현 교수를 자주 놀리고, 수도 줄어서 30명밖에 안 되니 탄허 스님이 재미가 없어 그만 하려고 여러 번 그랬어. 하도 그러기에 탄허 스님이 나보다 나이가 여덟 살인가 더 많았지만, “스님이 불교를 더 잘 아나, 내가 불교를 더 잘 아나 한번 해 보실까요” 그랬어. 대종사(탄허 스님)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구(이 대목에서 이박사는 ‘허허’하면서 웃었다). 내가 그렇게 하니깐 탄허 스님도 웃으셨지. 운허 스님은 강의를 할 때에 한 사람만 있어도 했거든.

-탄허 스님과 박사님은 만나면 서로 좋은 기분이었겠네요?
나와 탄허 스님은 만나면 서로 좋았지. 탄허 스님은 풍전호텔에서 몇 백 명에게 강의를 하는데 거기는 자기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데, 우리 모임에는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니깐 제일 좋아했지. 그리고 참 탄허 스님이 나한테 말하기를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은 스스로 남에게 굴복하지 말고, 그리고 남을 무시하지도 말고 남을 너무 높이지도 않는 것이 좋다”고 했어. 이 말은 비굴하게 살지 말고, 자존심을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 그러니깐 자존심과 도는 같은 것이야.

-탄허 스님에게 배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탄허 스님에게서 제일 크게 얻은 것은 유불선이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지. 내 생각과 완전히 같은 거야. 이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아. 내가 주장하는 도정신치료라는 것은 서양의 정신분석하고 동양의 도가 같다는 것이지.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가 결국 하나라는 것, 이게 핵심이야.

-그러니깐 박사님의 도정신치료는 탄허 스님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군요?
영향이 있지. 누가 나하고 의견 일치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어. 딴 사람은 없었어. 내 말을 동의하는 사람이 있어야 내가 자신이 생기지 안 그래? 내 말에 동의해 주는 사람은 탄허 스님밖에 없지. 나의 이론은 탄허 사상에서 시작된 거야. 유불선이 하나라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탄허 스님 친필 /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 “생사가 이것이요, 이것이 생사가 없는 소식이다.” 탄허대종사께서 쓰신 부안 내소사 해안선사 비문에서 발췌.
-탄허 스님의 첫인상이라고 할까, 느낌은 어떠하셨는가요?
그때 탄허 스님이 50대였지. 탄허 스님에게서 들은 것이 직지인심 자심반조인데, 그것도 핵심이지. 서양의 정신분석, 정신치료에서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과 이런 것들이 일치해.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말하는 자기 마음을 보는 것, 그것은 동서양이 일치해. 내가 주장하는 도정신치료는 개념이 아니고, 경험이야. 경험만이 진리라는 것이지. 서양에서도 이론과 지식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

-탄허 스님도 입산 이전부터 도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찾다가 불교에 입문하셨지요?
나도 그런 것은 본인에게서 들었어. 입산 이전에 유교와 장자를 통달하였다고. 그래서 딴 사람과 달리 내가 탁 들어왔지. 그래서 나하고는 기분이 좋게 만났을 거야. 그리고 탄허 스님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 날보고 정치교수라고 농담을 하고 그랬어.

-박사님은 탄허 스님 이외에도 경봉 스님과도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봉 스님을 만난 것은 1972년 근처일 거야. 탄허 스님을 만날 때에 비슷하게 만났어. 내가 만난 스님 중에서 선이 제일 깊은 스님은 경봉 스님이야. 그 스님은 순수 도인이지. 탄허 스님은 유불선 회통을 주장하여서 경봉 스님과는 약간 달라. 그리고 도선사에 있던 청담 스님과도 만났지. 청담 스님이 거처하는 절에서 4박 5일간 있으면서, 먹고 자고 그랬어, 심리학·철학 교수들하고. 청담 스님도 정신분석을 이용해서 법문을 하고 그랬는데, 정신분석과 불교에서도 자존심과 정신건강이 핵심이야. 정신분석에 투사라는 말이 있어. 자기가 깨닫지 못하면 마음을 밖에서 본다는 것이지. 청담 스님은 바른 마음을 설명할 때에 그림도 그렸는데, 그런 것이 정신분석과 완전히 통하지.

-박사님이 지켜본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 탄허 스님의 정체성은 학승으로는 최고이지. 물론 탄허 스님은 내가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인 힘이 있지. 그러나 학승보다는 도(道) 쪽에 정체성이 많지. 탄허 스님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좀 어려워.

-얼마 전 박사님께서는 도(道)정신치료를 개척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도정신치료가 후학들에게 계승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박사님의 사상에 불교의 영향이 있다는 것도 더욱 분석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그렇지. 지금은 미국 친구가 많이 하고 있어. 내 철학에 탄허 스님과 인연이 있어. 도 치료를 정립한 것, 내 사상에 불교가 있다는 것은 후세에 참고가 될 것이야. 공부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가 이런 것을 한 것도 50년 넘게 공부한 결과야. 지금은 나처럼 한 분야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없어. 예전에 학자들은 독립정신이 많았다구. 요즈음 학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 운허 스님도 그렇고, 이상은씨도 그런 말을 했어. 그 전의 학자들은 독립정신이 있었다구. 운허 스님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절에 숨어서 스님이 되었다고 그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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