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유지 한국불교 세계화에 활용해야
스님의 유지 한국불교 세계화에 활용해야
  • 대담=김광식 동국대 교수
  • 승인 2013.09.0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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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굴의 無影樹 〈29〉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명우 스님

명우 스님 / 영은사 수행, 성심사 주지 역임, 전국비구니회 회장
“짝할 이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라”
스님이 처음 주신 말씀 화두
‘학자’로만 알았는데 매일 참선정진
“마음을 찾고, 마음을 잘 써야”
가르침 대상에 차별 안 둬
유불선 회통, 불교를 떠난 ‘유불선’ 없어
스님 잊히는듯해 안타까워

 

-영은사에 간 과정과 탄허 스님에게 인사드린 것을 말씀해 주세요.
들어갈 때가 1962년 가을이었어요. 영은사로 들어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들어갔지요. 영은사에 가서는 일소굴에 계신 탄허 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겨우 스물네 살이었어요. 저를 처음 보신 스님은 저에게 “지혜도 많고, 모든 것을 다 알지만 너와 더불어 짝할 사람이 없구나. 참 안됐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라”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처음에는 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말인지를 몰랐지요. 그래서 그것이 일종의 화두가 되었어요.

-영은사에서 배운 것을 들려주세요.
저희 비구니 세 명은 영은사의 작은채에 살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공부는 영은사 큰방에서 아침 공양을 하고 배웠는데, 대중 전체와 함께 배웠습니다. 배운 과목은 기신론, 노자 도덕경, 주역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때 스님에게 배웠던 과목들의 노트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저는 스님에게 배우면서, 스님의 말씀과 판서해 주시는 것을 잘 모르지만 전부 기록했어요. 제가 그렇게 하니까 스님은 저에게 “필체가 참 좋구나” 그러셨지요. 제가 거기에서 스님에게 배우면서 감명이 깊었던 것은 경 공부를 하기 이전에 매일 새벽 꼭 참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대중들이 각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큰방으로 들어와서는 참선을 했어요. 탄허 스님이 가운데 앉으시고, 비구 스님들이 상판에 앉으시고, 비구니들은 떨어져서 앉았지요. 참선을 30~40분씩 매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탄허 스님은 어떤 말씀도 안 하십니다. 이렇게 참선을 하고, 아침 공양을 한 다음에 경공부를 사시마지 올리기 전까지 했어요. 제가 동화사 내원암으로 출가를 했기에, 거기는 선방이어서 비구니 노스님들과 함께 정진도 했지만 탄허 스님과 같이 딱 하니 정진을 하면서 화두라는 것을 그때에 알았어요. 제가 영은사에 오기 전에 탄허 스님에 대해서 듣기로는, 스님은 유가와 노장, 불경을 잘 아시는 학자 스님으로 알고 갔는데 가서 보니 새벽마다 큰방에 앉아서 정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것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래셨군요. 탄허 스님은 경전에만 능한 강백스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언입니다.
그렇게 매일 새벽으로 앉아서 참선을 하시고, 그 후에 공양을 하고는, 저희 대중들에게 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님은 말을 않고서, 참선 수행을 하면서,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죠. 저는 그때에 중 되고 몇 년이 안 되어서 그런지, 그것이 제 마음에 남았지요.

-그 무렵 탄허 스님이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스님은 저희들에게 마음을 찾고, 마음을 잘 써야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때에 탄허 스님은 저희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지만, 마음을 잘 써야 한다고 하신 것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저에게 스님은 “네가 아무리 노자 도덕경을 배워서 도(道)를 잘 안다 하여도, 마음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셨어요. 그러시고 스님은 노자 도덕경과 주역을 가르치시면서도 그것을 꼭 불교로써 설명을 해주셨어요. 유교, 장자 등을 말씀하셔도 꼭 불교로 회통을 쳐서 설명을 해주시고, 저희들을 이해시켜 주셨습니다. 그때에 제가 스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겠다고 하면, 스님은 그 내용을 칠판에 써주시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을 다 베껴서 배우고 그랬지요. 저는 그래서 스님에게 가르침 받은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언제 영은사에서 나오셨는가요?
제가 거기에 1년 반 정도 있으면서 공부를 하였어요. 그런데 제 노스님인 본공 스님께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 영은사에서 나오라고 그러셨어요. 노스님은 제가 대중생활을 하지 않고, 비구 스님들이 있는 곳에서 공부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어요. 혹시 제가 비구스님네들이 있는 곳에서 있다가, 중노릇을 제대로 못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러신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고민을 엄청했어요. 할 수 없이 탄허 스님에 말씀을 드리니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라는 뜻을 표시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나오게 되었지요. 그때 제가 간다고 인사를 드리니까 저에게 글씨를 하나 써주셨어요. 그것은 여기 성심사 관음전에 액자로 보관하여 걸어두었는데, 그 내용은 “불여만법여려무시삼마(不與萬法如侶無是甚磨)”입니다. 이것은 제가 영은사에 와서 처음으로 스님을 뵈었을 때에 저에게 하신 그 말씀을 써 주신 것입니다. 그 글씨 말미에는 ‘명우상인(明又上人)에게 탄허(呑虛)’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뜻은 저에게는 만법을 함께 짝할 사람이 없으니, 오직 공부하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나오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영은사에서 나와 바닷가에서 버스를 타려고 한참 기다릴 때에 혼자 막 울었어요. 제가 간다고 하니, 어느 행자가 가다가 먹으라고 감을 세 개를 주더라구요. 도로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면서 그 감 하나를 먹다가, 너무 슬퍼서 울었습니다.

-명우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 배운 의미를 어디에서 찾으시는가요?
저는 스님에게 배운 의미를 ‘마음을 제대로 잘 써야 하는 것’에 두고 싶어요. 스님은 주역이나 도덕경 같은 것을 가르치시면서 마음을 잘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마음을 잘 씀으로 인해서 부처가 될 수도 있고, 노자나 성현이 될 수가 있다고 하셨어요.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고 하시면서 마음을 어떻게 먹냐에 따라서 성공이 결정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저희들이 “공부할 때에도, 참선할 때에도, 오직 마음 집중을 잘 해야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요(要)는 나쁜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 스님의 말씀이었지요. 저는 그런 스님의 말씀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어요. 무엇보다도 그 유묵을 갖고 나와서, 그 유묵에 담긴 내용을 저의 전체 생활의 길로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스님이 주신 글, “너는 공부를 잘 하더라도 너와 짝할 벗이 없을 것이니, 그것이 왜 그런가”에 나온 화두를 항상 가슴에 새겼지요. 이것이 제 마음에 닿는 말씀이었어요.

-그후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다시 만났는가요?
저는 청암사에서 배우고, 다시 개심사로 왔어요. 개심사에서는 성능 스님에게 전강을 받았지요. 성능 스님은 박한영 스님에게 전강을 받아서 강맥을 이은 비구 스님이십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서울의 청룡사로 오게 되었지요. 청룡사의 주지이셨던 윤호 스님이 저의 문중이고 그래서 청룡사의 학인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그 전에 제가 영은사에 있다가 서봉사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명성 스님이 저에게 연락을 해서, 청룡사로 오라고 그래서 간 것이지요. 청룡사에 가니 명성 스님은 동국대 대학원에 다녔고, 저는 학인으로 있었지요. 그런데 그때에 명성 스님이 일중·여초 선생에게서 붓글씨를 배웠어요. 제가 중고교에 다닐 적에 서예첩의 교본에 나오시던 유명한 서예가였지요. 그래서 저도 명성 스님과 같이 서예를 배우다가, 나도 동국대에 가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동국대에 들어갔지요. 그렇게 동국대에 가서 공부하다가 졸업할 무렵에 탄허 스님이 청룡사에 오셨어요. 탄허 스님은 거기에 오시기 전에는 홍은사에 계셨는데, 사실은 저는 탄허 스님이 청룡사에 오시기 전에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저는 윤호 스님과 스님을 모시는 것을 상의도 하였어요. 저는 탄허 스님이 큰스님이시니깐 청룡사의 조실방으로 들어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문간방으로 들
어오셨어요. 저는 그래서 속으로 무척 마음이 아팠지요. 저로서는 배우던 스승이니깐, 문간방에 계신 것이 마음이 아팠어요. 그러나 저는 그 절의 주지도 아니고, 그 절에 얹혀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학교에 다니는 처지이니 제 의견을 낼 형편도 아니었지요. 스님이 들어오셔서 제가 인사를 드리면서 죄송하다고 그러니깐, 스님은 특별한 말씀을 안 하시면서도 제 마음을 다 아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스님을 뵈면서 반갑기도 하였지만, 괴롭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제 마음을 표현할 수도 없었지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탄허 스님은 청룡사에서 동양학 특강을 하였는데 그 강의를 들으셨지요?
그럼요. 스님이 보제루에서 몇 달간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들었어요. 동국대 상무이사를 보던 법안 스님, 그리고 명성여고 교장을 하던 황진경 스님도 와서 들었어요. 또 스님을 무척 따라다니던 명호근, 전창열, 손창대 같은 사람도 와서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탄허 스님을 따르고 배우던 사람들과 인연이 깊었어요. 그때 탄허 스님을 시봉하던 사람이 지금 민족사의 윤창화 사장입니다. 그리고 그때 스님 방에서 중국어 선생을 초청해서 탄허 스님과 함께 몇 명이 중국어를 배운 일이 있습니다. 저도 그때 스님과 같이 배웠어요. 저는 그때에 배운 노트를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스님은 그때에 언제인가는 중국이 개방될 것이고, 일본은 물에 가라앉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특별한 인연을 가지셨군요.
저는 그 이후에도 스님에게 인사를 다니고 그랬죠. 석파정, 대원암, 학하리에 찾아갔어요. 진관 스님, 자민 스님과 많이 갔습니다. 찾아가면 스님은 어떤 표현을 잘 안 하세요. 그냥 ‘왔냐’는 정도이지요. 그리고 스님은 사진을 절대 안 찍으시려고 그랬어요. 스님은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그냥 계시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스님을 모시고 가서 사진을 찍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저를 보시면 국수를 먹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스님은 저에게 “명우야, 나 국수 먹으러 갈까” 그러십니다. 그러면 저는 “예, 그래요” 하고는 국수 대접을 해드렸지요. 스님이 청룡사로 오시면 청룡사에서 해 드렸고, 그 이후에 이곳 성심사를 제가 지은 후로는 성심사에도 자주 오셨어요. 오시면 항상 국수를 정성껏 만들어 드렸어요.

-성심사에는 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지요?
이곳 성심사 대웅전의 대들보에 스님의 글씨가 있어요. 그 대들보를 대패로 싹 깎아 놓았더니, 스님이 그 대들보에 오르셔서 붓으로 직접 쓰셨지요. 그리고 관음전을 지을 때에도 오셔서 상량문을 써주셨어요. 관음전 낙성식에 오셔서는 관음전의 앞문을 활짝 여시고는, 성심사 앞에 있는 모든 산들이 성심사에 날아오고 있다고 하시면서, 제가 성심사를 위해 노력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고 그러셨어요. 그 무렵에는 이곳 성심사 주변에 주택이 없었어요. 성심사에서 멀리 보이는 인왕산, 관악산이 성심사를 향해서 오고 있다는 그런 멋진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러시면서 저에게 “소박하게 그리 살아라, 산란하게 살지 말고 언제든지 부처님 마음으로 바르게 살아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스님의 말씀대로 이곳 성심사를 옛 모습 그대로 두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는 큰스님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스님의 뜻과 가르침을 기리는 데 잘못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죄송할 뿐이지요.

-탄허 스님은 오대산 수도원, 영은사 수도원을 다시 복구해서 인재양성을 하시겠다는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셨지요.
그게 스님의 원(願)이었지요. 저는 스님에게서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스님은 누구에게도 잘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고, 좋은 도량을 만들어서 인재양성을 하시겠다고 그러셨어요. 스님께서는 사부대중이면 비구니건, 재가자건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랬어요. 비구니들이 비구 스님이 있는 절에 가서 배우는 것이 힘들잖아요. 저희들을 영은사에 오게 해서, 영은사 작은 채에 머물게 하면서 배우게 한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명우 스님은 최근에 전국비구니회 회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후배 비구니 스님들에게 탄허 스님을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탄허 스님은 불교를 으뜸으로 하시면서도, 유불선 삼교를 통해서 불교의 법문을 하신 어른입니다. 유불선 모든 것을 하셨어도, 그 근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두셨습니다. 요컨대 불교를 떠난 유불선이 없다고 하셨어요. 수많은 조사 스님들이 나타나셨지만 그렇게 삼교를 회통해서 불교를 세우신 분은 없었어요. 이런 스님이 나올 수가 없어요. 역사 이래로 없는 분입니다. 스님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 분이 가시고 나서 누가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내년이면 스님 탄생 100년이 되는데 소감은 어떠신지요?
스님은 우리 스님네들이 공부하는 기본 경전을 다 현토 번역을 해놓으셨어요. 그러나 그리 다 해놓았지만 탄허 스님은 종단과 스님네들에게 잊혀졌어요. 그래서 탄허 스님 기념사업은 문도·재단 차원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단 차원에서 받들어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종단 차원에서 유지를 받들어서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하는 데 활용해야 합니다.
저도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지금껏 스님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스님에게 받은 은혜는 많지만 저도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자책했어요. 며칠 전 윤창화 사장님으로부터 교수님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고서는 저 혼자, ‘이럴 수가 있나’ 하였지요. 그러면서 제가 스님에게 배울 때 쓰던 노트를 찾아서 뒤적거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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