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전체 고민한 철인·선사·대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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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담=김광식 동국대 교수
  • 승인 2013.08.1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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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굴의 無影樹 〈26〉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원행 스님

원행스님 / 자광사 주지, 삼화사 주지, 구룡사 주지 등 역임 현재 월정사 부주지
“세상 제일 행복한 사람은 걸망 진 스님”
시·서·산문·철학·음악 등 통달
“참고 멀리 내다보고 다녀라” 가르침 생생
“인재 하나 키우려면 30년 걸려”
유지 받들어 글로벌 인재 육성해야


-탄허 스님은 원주의 지학순 주교(천주교)와 교류하였다는 말이 있어요.
지학순 주교도 월정사 방산굴로 스님을 자주 찾아와서 스님과 시국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어요. 그럴 때에 저는 차상을 올려다 드리고 나왔기에, 두 분의 대화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요. 하여간에 두 분은 시국과 나라를 고뇌하시면서 많은 소통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원주와 연고가 있는 최규하 대통령도 스님과 만나신 적이 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원주 봉산동 출신입니다. 그래서 저와도 많은 인연이 있습니다. 국무총리 시절에는 구룡사 불사를 후원해 주시고 그랬지요. 부인인 홍기여사도 불자이고요. 하여간에 12·12가 터지고 나서 최규하씨가 대통령권한대행이라는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 오르던 그날 저녁에 제가 월정사에 있었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극비리에 오셨어요. 탄허 스님을 만나시려고. 저는 차대접만 해드리고, 방을 나와서 두 분이 하신 대화는 전연 알 수가 없지요. 두 분은 고뇌에 찬 표정이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수심이 많은 얼굴이었구요. 하여간에 분위기가 그랬어요. 그렇게 대화를 하신 후에 다음날 새벽 두 시쯤 가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방산굴로 찾아오신 고승은 누구이었을까요?
글쎄요. 큰스님이 여러 분 오셨지만 저는 춘성 스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춘성 스님은 선사이시지만 화엄경에 조예가 깊어서 그런지 월정사에 자주 오셨어요. 방산굴에서 탄허 스님과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그 스님은 선승이시지만 염불 목소리가 좋다고 그래요. 그 스님의 상좌인 견진이라는 스님도 염불이 좋았는데 죽었어요. 하여간에 겨울에 오대산에 오시면 동치미와 노란 갓김치에 얼음을 띄워서 칼국수로 냉면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준비가 되지 않으면 바로 강릉으로 택시를 대절해서 겨울 냉면을 잡수시러 가고 그랬지요. 춘성 스님은 탄허 스님이 안 계실 때에도 보궁기도를 오셨다가 들르셨는데, 만화 스님과도 교류를 하시고 그랬죠.

-탄허 스님의 인재양성에도 깊은 뜻이 있었지요?
탄허 스님은 역경을 통해서 후학, 인재들이 동양사상과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시대를 내다보는 예지로써 젊은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에 주력한 결과입니다. 스님은 한반도, 세계를 내다보시면서 추후, 4~50년 후에는 계룡산이 이 땅의 중심이 된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청남대, 육해공군의 삼본부가 들어간 신도안, 지금의 행정복합도시인 세종시 등이 다 계룡산 근처입니다. 그런 연고로 스님께서는 유성의 학하리에 인재양성의 거점을 만들려고 하셨어요. 이런 것이 스님의 예지력, 통찰력에 의거한 성인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탄허 스님은 승속을 막론한 젊은이들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조갑제 기자와 스님이 대담을 하실 때에 제가 지켜보면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조갑제가 스님에게 “5천만의 모든 국민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다 출가를 하면 누가 나라와 국가와 사회를 지키고 경영을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스님은 멍청이라고 하시면서 그때에는 살림살이만 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런 시대에는 입고 먹는 수준의 사회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조갑제가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어요. 이 질문에 스님은 “이 세상에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지고, 각처를 만행하는 스님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그런 수행자들의 뒷모습이 제일 멋있고, 행복한 모습이라고 하셨지요. 그런 삶이 제일 행복한 삶이고, 넉넉한 삶이라고 그리 말씀했어요. 저는 아직까지 스님의 그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스님은 그런 삶 이외에는 극락과 편안한 삶이 없다고 했어요. 저는 출가 후에 월정사의 원주와 재무를 오래 보았고, 말사의 주지도 하였고, 지금은 경을 보면서 살림을 살고 있지만 저도 스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탄허 스님은 유불선을 회통한 큰스님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제가 탄허 스님의 공부를 해 보니 탄허 스님의 사상 및 실력의 다양성이 대단합니다.
스님은 시, 서, 산문, 수필, 철학, 음악 등 모든 것에 통달하신 것 같습니다. 화엄경 특강을 하실 때에 국악인들을 불러서 창을 들었을 때에 스님은 지음자희(知音者稀)에 대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자기 소리를 알아주는 자는 드물다고 하셨지요. 하여간 스님은 소리에도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등 일곱 가지의 구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색과 맛에도 다양하고 미세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것들을 세부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평소에도 스님은 특별하고 격조 있는 모임이 있으면 국악 가수들을 가끔 불러서 소리를 듣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당시 미술가들도 스님을 가까이 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접촉을 하고 그랬지요. 벙어리로 유명한 화가인 운보라고 있지 않아요. 그 분은 탄허 스님이 이리역 폭파 사고가 일어나자 서화전을 열고, 그 판매금을 불우이웃에게 전달해주었을 때에 공동으로 전시회를 하자고 제안을 해오기도 했어요. 스님의 글씨와 그 분의 그림을 갖고 하자고 그 분의 따님인가 부인이 교섭하였지만 안 되었지요. 하여간 성악가, 미술가, 종교가들이 스님을 도인으로 보고 접근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보았는데, 탄허 스님은 사람의 눈을 중요시하였다고 그럽니다.
탄허 스님을 점쟁이나 예언가로 표시하면 안 됩니다. 탄허 스님은 사람을 딱 관찰하시면 우선 체형을 다 보시는 것 같아요. 한번 척! 보시고서도 그 사람의 음식, 신체구조를 알아봐요. 망문문진(望聞問診)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외면, 체구, 언어, 행동, 병증, 체질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것을 스님은 하셨어요. 스님은 그럴 때에 눈이 80%, 귀가 10%, 코가 5%, 치아가 5%로 구분해서 점수를 준다고 그래요. 눈과 귀가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러시면서 스님은 눈이 좋아야 살림살이를 잘 한다고 하셨어요. 눈은 사람의 정기(精氣)라고 하시면서, 눈을 보고서 사람을 판단하였지요.

-탄허 스님과 원행 스님 간에 있었던 가장 특별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1981년의 오대산 분란 당시일 것입니다. 그때 오대산 문도 스님이 아닌 스님이 주지 발령장을 끊고 들어와서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스님은 방산굴에서 저를 부르시더니 “월정사를 사수하라, 타 문도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스님은 “니가 월정사에서 10년간 재무를 하였으니 월정사를 다 팔더라도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저는 문도, 주민들을 결속시켜 그를 저지하는 분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외부 문도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지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갖은 고초를 겪고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탄허 스님은 만화 스님을 비롯한 3~4명의 스님과 함께 제가 출감하는 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원주교도소 인근에 있는 여관에서 스님을 만났습니다. 여관 방에서 저는 스님에게 3배를 드리면서 “목숨을 바쳐서 지켜냈습니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후임 주지로 동수 스님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저는 스님에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였더니, 스님은 저에게 “이래서 너는 멍청이야”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그런 조치, 결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보니 거기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어요. 지금은 그런 전후 사정, 내적 갈등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때에는 납득하지 못했지요.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스님은 저에게 그 자리에 있던 신도회장에게 먹과 붓을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그 여관방에서 귀중한 글씨를 써주었습니다. 그 글씨는 중국의 선종이라는 왕이 향엄선사 문하에서 숨어서 지내던 유배라는 고난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에 탄허 스님, 만화 스님이 열반하셔서, 월정사를 떠나 해인사 장경각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탄허 스님의 연고가 많은 유성의 학하리 자광사 주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광사가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사를 하기 위해 큰스님들을 초청해서 법회를 하였는데 그때 일타 스님이 오셨습니다. 그 무렵에 저는 탄허 스님에게 받은 그 글씨를 족자로 해서 제 방에 걸어 놓았는데, 일타 스님이 저에게 그 글씨의 내용을 아느냐고 물어요. 저는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하였더니, 일타 스님은 그 글의 내력을 설명해 주시면서 그 글의 대구(對句)가 있다고 하시면서 그날 제 방에서 대구를 써주었습니다. 이래서 저는 탄허 스님, 일타 스님이 써주신 귀한 유묵을 잘 보관하고 있지요.

-김동건 변호사가 그 시절 스님에게 탄허 스님의 유묵 전각(인의자실)을 받았다고 그럽니다.
그때에 제가 자광사에 가니깐 대전 지방의 스님들이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자광사에는 탄허 스님의 글씨를 많이 팔아버려서, 팔아먹을 글씨도 없는 자갈밭, 잡초가 우거진 그런 곳에 왜 왔냐고 그랬어요. 그 이전에 자광사는 소송이 걸리고, 좋지 않은 소문들이 많았나 봐요. 제가 그런 좋지 않은 자광사 소문을 정상화시키는 데 3년이나 걸렸어요. 그러자 차츰 신도들이 모여들어서 불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탄허 스님의 글씨가 있는 부산, 장성, 금산 등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스님의 글씨를 얻어서 전각을 만들어서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마 김동건 변호사가 받은 인의자실(忍衣慈室) 유묵 전각은 그때에 드렸던 것입니다. 인의자실 유묵은 석주 스님도 많이 써서 신도들에게 주시고 그랬지만, 그 전에는 탄허 스님이 먼저 하셨을 것입니다. 탄허 스님은 유묵의 계인(契印) 도장에도 인의자실을 새겨서 사용했어요.

-탄허 스님이 참을 인(忍)자를 그렇게 하였다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
스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오대산의 불우한 환경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오대산에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는 참을 인과 관련된 비사가 있어요. 제가 원주를 볼 때에 전라도 대흥사의 큰스님인 천운 스님이 오대산에 기도를 하러 오시면 제가 만나 뵙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운 스님께서 역학하시는 거사와 함께 오셨습니다. 천운 스님께서 저를 좋게 보시고, 제가 고생하는 것을 안타깝게 보셔서 그랬던지, 같이 온 그 거사는 제가 일하는 원주실로 들어와서는 참을 인자를 단풍나무에 새긴 도장을 갖고 와서 저보고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듯이 그 도장을 달력의 그날에다가 찍고 일을 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1000일 간을 그렇게 매일 아침에 그 도장을 찍고 일을 시작했어요. 이러는 것을 은사인 만화 스님도 아시고, 탄허 스님도 잠시 보시고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시곤 했어요. 사실 그 시절 오대산은 어렵고, 춥고 그랬어요. 그런 것은 말로 다 못해요. 이런 연유로 제가 자광사에서 인의자실을 전각하게 된 것입니다. 참음으로써 옷을 입고, 자비로써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참는 것은 청담 스님이 유명하지만, 탄허 스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어요. 참는 것은 지금도 저의 모토입니다. 제가 성질이 급하고, 멋대로인 면이 있어요. 이런 제가 지금껏 스님 노릇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탄허 스님의 가르침에서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벌써 중노릇을 때려 치우고 속인이 되었거나, 다른 절로 갔을 것입니다. 저에게 참으면서, 멀리 내다보고 다니라는 탄허 스님의 가르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무섭고 매몰찬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사회와 세속을 멀리 내다보라는 탄허 스님의 가르침이 있어서 오늘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탄허 스님 탄신 100년을 맞이하면서, 앞으로 탄허 스님 연구의 방향을 어떻게 나가면 좋겠습니까?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탄허 스님은 불교만을 위해서 고민한 분이 아니고, 한반도만을 내다본 분이 아닙니다. 우주와 세계를 통섭하시면서 새로운 방향, 세계를 제시한 어른이십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에 스님은 철인, 도인, 대학승으로 말할 수 있어요. 이런 분은 백년 아니 천년이 지나도 나오기 힘든 어른이라고 봅니다. 이런 입장에서 탄허 스님을 연구하고,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강원도, 한국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세계적인 차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2018년에는 이곳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됩니다. 즉 평창과 더불어 스님의 생각 및 업적의 연구를 글로벌화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봅니다. 또 이것을 기점으로 월정사, 재단, 자광사, 전국에 흩어진 관련 스님 등이 한데 뭉쳐서 스님 사업, 현창에 나서야 된다고 봅니다. 나아가서는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글로벌한 인재를 육성해야 합니다. 100년 후를 내다보고 인재발굴에 나서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한 사람의 인재를 키우려면 30년이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30년간 그 사람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고 즉 사상, 생각, 됨됨이, 성격 등을 점검해 보고 나서야 그 사람을 믿게 된다고 말씀했어요. 인격, 내력 등을 총체적으로 평가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 주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인재를 발굴한 이후에는 그 사람에게 자가용도 주고, 연구비도 대학교수 이상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하여간에 한 사람을 적어도 30년은 키워야, 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주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 인재들은 지조를 지키고, 벼슬에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야만 사찰, 교단, 불교가 발전할 수 있다고 보신것이지요. 이런 취지를 스님께서는 방산굴, 자광사, 대원암에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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