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23〉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여익구

故 여익구 前민주화 운동, 대불련 사무총장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여운형추모사업회 사무총장
대원암에서 민중불교 공부 모임
회칙 만든 후 출범전 안기부에 추적
스님, 새벽 2시 그날 강의 머릿속에 정리
탄허 스님에게 중용·대학 독강 공부
“바깥 경계에 끄달려 있는 이 멍충아”

-대원암에서의 활동을 들려주시지요.
그때가 1975년 3월 경이었지요. 그때부터 내가 대원암에 자주 가서 스님을 뵙고, 상의를 하고 그랬어요. 공부를 하는 정식 모임은 두 번 정도를 가졌고, 비공식 모임은 여러 번 있었지요. 왜냐 하면 모임 준비에 대한 것도 상의하고, 스님이 나를 파악할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내가 사기꾼인지, 소문으로는 빨갱이라고 하는데 실제 그런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여간 그래서 나는 조계종에서 스님은 저 분(탄허스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고은, 황석영 그 사람들을 끌어들였지요. 고은, 황석영 그 사람들도 불교 모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어요. 그 사람들이 불교적인 소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것을 갈망했지요. 기독교 측에서는 그런 모임이 많았지만, 불교에는 없었거든요. 탄허 스님의 인재양성에 대한 바람과 우리들의 갈망 그런 것이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대원암 모임은 민중불교회라고도 합니다. 그 공부 모임을 민중불교회라고도 불러도 되나요?
그 모임을 주도한 나는 처음 시작할 때에 민중불교회 조직을 만들려는 마음은 있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민중불교를 공부하자고 그랬고, 우리 모임은 민중불교 공부 모임이라고만 하였지요. 민중불교회를 만들기 위한 회칙은 나하고 전재성하고 같이 만들었어요. 고준환도 참여한 것 같고. 가리방으로 긁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도 민중불교회로 알았을 거예요. 그런 것에 대해서 합의를 했지요. 그렇지만 그 회칙에 의거해서 정식 출범을 하기도 전에 안기부의 추적, 구속을 받아서 출발은 못했어요. 그 회칙은 안기부에 뺏기고 지금은 나도 갖고 있지를 않아요.

-선생님은 그 후에 다솔사로 출가하였지요? 다솔사에 가서의 내용을 알려주세요.
다솔사에 가서 효당 스님에게 멱정(覓丁)이라는 이름을 받고 출가하였어요. 나는 그 멱정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요. 멱자는 찾을 멱이어서 찾는 놈이라는 뜻이고, 정자는 주역에 나오는 것으로는 작은 촛불이라는 뜻이에요. 효당 스님이 너는 큰 불꽃은 못 되니, 세상을 밝히는 작은 불꽃이 되라고 하면서 그런 이름을 주셨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1년간 있으면서 효당 스님에게서 천태사교의, 반야심경, 원효에 대한 것을 배웠지요. 그 중에서도 나는 반야심경에 대해 관심이 많이 갔어요. 효당 스님이 공(空)을 놓고 해석하는데, 공을 현대적으로 인식하면서, 그것도 역사의식으로 보시더라구요. 그러고 모택동의 우공이산(牛公移山)에 대한 이야기도 그곳에서 들었어요. 그때에 그곳에 효사라는 시인도 조금은 같이 있었고 채원화도 그때 거기에 있었어요. 효당 스님은 내가 지켜보니, 그 양반은 천재예요. 대처를 한 분이어서 그렇지, 참으로 아까운 분이에요. 대단한 인물이었어요. 내가 그 후에 탄허 스님을 찾아서 대원암으로 간 후에는, 효당 스님이 서울에 오면 가끔 대원암에 와서 탄허 스님과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사상이 무척 깊으시더군요. 그리고 탄허 스님과 정신적으로 교류가 있고 통하는 것이 있었어요. 두 분은 깊은 철학적 대화를 하시고 그러시더라구요.

-대원암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는가요?
그때부터 나는 스님의 시봉으로서 밥 나르고, 빨래하고, 목욕을 하시면 등을 밀어드리는 상좌가 되었지요. 그때 고대 출신인 최옥화(일초 스님)와 같이 시봉을 했어요. 그때 옥화에게 혼났지요. 스님과 한방에서 잤는데, 스님은 새벽 두 시 경에 일어나셔서 참선을 하시는데, 그러면 시봉인 나도 일어나서 참선을 하지만 꾸벅꾸벅 졸다가 벽에 머리를 부닥치고 그랬어요. 그러면 스님은 “젊은 사람은 혈기가 많으니 열을 식혀야 한다”고 하시면서 잠을 더 자라고 그러셨어요. 그러나 그러신다고 잠을 잘 수 있나, 못 자죠. 그러면서 스님에게 정식으로 학문을 배웠어요. 나를 놓고 일대일로 가르치셨어요.

-그렇게 가르치시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인데요.
그것은 스님이 나에 대한 애정이 많으셔서 그리 하신 것 같아요. 그때에는 그것을 몰랐는데, 지금이야 느끼고 있지요. 나는 스님에게 사서삼경을 배웠는데, 다 하지는 못하고 중용과 대학까지는 배웠어요. 그날 배운 것은 다음날 외워 바쳐야 했는데, 내 머리가 굳어 있었고 내가 학문에는 재주가 없어서 내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꼈지요. 나의 그런 자질에 대해서 스님도 답답하셔서 책을 내 던지고 그러셨어요. 스님은 내가 따라오지를 못하니까 “너는 바깥 경계에 끄달려 있다”고 하시면서 “안의 경계를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이 튼튼해지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막 야단을 쳤어요, “이 멍충아” 하시면서. 그래서 나는 절망했지요. 그래도 스님은 한 6개월을 끈기 있게 나를 가르쳤어요. 나를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려고 그렇게 하셨는데 잘 안 되었어요. 나도 내가 한탄스러웠고 스스로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때 내가 제대로 배웠으면 지금은 대학자가 되었을 터인데 그렇게 되질 못했어요.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월정사에 가서 지냈어요. 그때에 스님이 하신 것이 화엄회상, 화엄산림을 하셨지요. 거기에 내가 관여가 되었어요. 스님이 〈신화엄경합론〉을 펴내셨는데, 지금 원주 성불원에 있는 현각 스님이 그때 월정사 교무를 맡고 있었는데 현각 스님이 화엄회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나는 대원암 시절부터 현각 스님과는 친하게 지냈어요. 그 스님이 오대산 출신 가운데 학문적이고, 철학적이고 순수해서 나는 그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하고 통했어요. 현각 스님이 그런 아이디어를 냈지만, 자신이 그것을 탄허 스님에게 말씀드리기는 거북하니 나보고 스님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방산굴에서 스님에게 말씀을 드려서 스님에게 OK를 받은 것이지요. 그랬더니 스님은 그때 주지를 맡고 있었던 희찬 스님과 상의를 해서 오대산 차원에서 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그런 것을 하려면 오대산 조직이 동원되어야 하고, 많은 후원이 필요하잖아요. 많은 사람이 와서 공부를 하려면 먹고 자고 지내는 것이 간단하지 않아서 산중회의를 해서 동의를 받아 결정하였어요. 그런 큰 불사를 하려면 각 말사 별로 담당도 해야 하고, 신도들의 후원도 받아야 하지요. 그렇게 돼서 그 불사가 이루어진 것이에요. 나는 그 불사가 성사되는 것을 보고 스님이 나를 깊게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화엄산림 불사가 잘 진행되었지요?
그렇지요. 탄허 스님이 화엄경 특강을 한다고 공고를 하니까 정말 눈밝은 스님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더라구요. 200명 가깝게 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공고, 행정적인 실무는 현각 스님이 교무담당이어서 거의 담당하였지요. 그때 스님이 강의하신 것은 화엄경, 능엄경, 주역선해였어요. 나는 그때 방산굴 스님의 방에서 같이 지내면서 시중을 들었어요. 그리고 유학자 출신인 심백강도 방산굴에서 같이 지냈어요. 그 분은 한문의 천재여서 스님이 그 사람을 학자로 대우해 주었어요. 스님은 두 시 기상, 새벽 네 시 예불, 새벽 다섯 시 강의, 아침 공양, 여덟 시부터 강의, 열한 시 점심 공양, 오후 한 시 강의, 다섯 시 저녁 공양, 여섯 시 저녁 예불, 일곱 시에 강의, 열 시에 취침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력적인 강행군이었어요. 하루에 열 시간을 분필 하나만 들고, 세 달 동안 강의를 하셨지요. 그리고 내가 그때에 시중을 들다 보니까 스님은 새벽 두 시에 일어나셔서, 앉아서 뭔가를 중얼중얼 하시더라구요. 내가 보기에 그것은 주력을 하신 것이 아니라고 추정하는데, 그날 강의하실 것을 강의 초안을 머리에서 미리 돌리신 것이라고 봐요. 그런 것 같아요. 그 전에 내가 모실 때에는, 평소에는 그냥 참선만 하시지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았거든요. 머릿속에서 테이프를 돌린 거예요. 하루에 열 시간을, 3개월 가깝게 그렇게 하셨지요.

-그 불사에 참여한, 강의를 들은 대중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요?
강의를 들은 스님들은 전부 다 껌뻑 죽었지요. 대중들은 탄허 스님의 강의를 처음 들었던 것이지요. 직접 탄허 스님의 강의를 듣고서는 대단하다고 그랬어요. 그에 대한 반응은 말로 다 못 해요. 표현하기 어렵지요. 특히 나는 제안한 당사자여서 기쁨이 더 했지요. 하여간에 나를 포함한 모든 대중이 환희에 젖었어요. 주역선해 같은 강의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잖아요. 동양사상을 회통한 그런 강의는 아마 처음일 거예요. 조계종사에서도 처음이라고 볼 수 있어요. 나는 그때에 스님의 강의를 듣고서는 스님의 학문은 도저히 딸 수 없는 별이라고 생각했어요. 탄허 스님의 학문의 깊이에 감복하고, 나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수준이기에 그런 것에 따라가려는 생각을 포기하였지요. 거기에 온 중들도 그리 느끼지 않았을까 해요. 하여간에 대중들은 감격 일변도였어요. 내가 보기에 그런 정도의 회상을 다른 절에서는 만들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런 강의를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스님이 있어야 하고, 그런 불사를 해낼 수 있는 후원과 조직력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오대산은 그것을 해냈어요. 그때 현각 스님이 그랬지요, 저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탄허 스님의 세대가 가면, 이 시대의 큰중은 다 없어진다고 그랬어요. 현각 스님의 그 말이 맞아요. 나는 현각 스님이 큰 역사를 이루어낸 것으로 봐요. 역사에 남을 일을 한 것이에요. 나로서는 현각 스님이 그런 역할을 한 것이 고맙고, 나도 보람을 느꼈어요.

-화엄경 특강이 선생님의 인생에도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그 불사가 민중불교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요. 이렇게 보는 것은 내가 스님을 민중불교의 최대 후원자로 보려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나는 민중불교를 하면서 스님을 중심 역할로 모셨어요. 민중불교의 씨앗이 오대산 월정사에서 나온 것이에요. 그때 오대산에 모인 스님들이 소장층이 많았는데, 그런 똑똑한 스님들이 한자리에 저절로 모이게 되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스님들을 만난 거지요. 해인사의 현응 스님, 연관 스님, 비구니 성일 스님, 통도사 정우스님도 만났지요. 정우스님은 그때에 동관음암 암주를 하면서 강의를 들었는데, 나는 그 스님과 친하게 지내고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밤중에 동관음암에 자주 올라가서 이야기를 하고 지냈어요. 이런 스님들을 그 후에 내가 대불련 지도법사단을 할 때에 참여하도록 만들었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얼마 후에 환속을 하고, 종단개혁과 민중불교운동에 나섰지요?
그렇지요. 내가 세속에 인연이 생겨서 나가게 됐어요. 그래서 스님에게 말씀을 드리니 스님은 “알았다, 이놈은 사주팔자대로 간다”고 하시고는 더 이상의 말은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스님 옆에서 스님의 사랑을 대단히 받았어요. 나는 1980년의 5·17이 나던 그날 구속을 당했어요. 5월 17일 열흘 후에 조계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지만, 나는 보안사에 구속되어서 결혼식장에는 오지도 못했어요. 그러자 스님은 진노하시고는 스님이 아는 사람들을 불러서 노발대발하셨어요. 전창열이라고 그때 군법무관을 하면서 실세였던 사람, 그리고 보안대의 양근하를 불러서 호통을 쳤어요. 그래서 내가 예정보다 빨리 나와서 그해 가을에 대각사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대각사 법당에서 하였는데, 스님을 주례로 모시고 했어요. 대각사에서 한 것은 내 사건 이후로는 조계사에서 결혼식하는 것을 한동안은 정부에서 폐쇄시켜서 할 수 없었기에, 탄허 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대각사의 도문 스님에게 부탁을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지요. 스님이 자신의 상좌였던 사람을 주례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랬어요. 그 정도로 스님은 나를 사랑하셨어요. 스님은 내가 결혼한 이후에도 우리집에 몇 번을 찾아오셔서 나와 내 아내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어요. 그때에 내 큰딸이 스님의 무릎에 안기면 스님은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여익구라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탄허 스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스님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나는 봐요. 내 인생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후기는 민중불교운동으로 시작됐고, 그래서 이름이 조금 나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런 후기 인생에서 민중불교운동을 하게 된 자산이라고 할까 자양분이 되신 것이 탄허 스님이었어요. 나는 그런 운동을 한 것을 불사에 기여하였다고 보지요. 이것을 내 입장에서 보면, 탄허 스님이 나의 미래를 예언한 대로 살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환속해서 대불련 사무총장을 하고, 그때에 대불련 지도법사단을 만들었을 때에 스님을 법사단의 증명법사로 모셨어요. 이런 것은 대불련 자료에도 나와요. 그리고 내가 대불련의 간부들을 몰고 스님에게 가면 스님은 매번 격려를 해주시고 그랬어요. 또 대불련 법사단의 법회를 조계사에서 하면 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1982년인가에 내가 주도한 종책 연구소, 한상범 교수가 만든 불교사회문화연구소의 법회에서도 스님이 나오셔서 법문을 해주셨어요. 이럴 때에 스님은 한 번도 내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전두환 정권 때에는 전국의 큰스님들이 말도 일체 안 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어요. 그러나 스님은 당신 상좌가 하는 일에 기꺼이 지원해 주었어요. 스님은 내가 가는 방향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그런 정신적·물질적 지원(법문)을 해주신 것이지요. 알게 모르게 후원해 주었어요. 그래서 스님은 대불련, 민불련의 보이지 않는 지주가 된 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스님은 민중불교의 정신적인 지주예요. 원효·만해는 죽어 있는 정신적 지주였지만 스님은 현재 살아 있는 정신적인 지주였어요. 이런 측면에서 스님은 민중불교의 큰 자산이었지요. 물론 이런 것이 객관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정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을 인정하고 주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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