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20〉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명성 스님

명성 스님 / 운문사 주지 및 전국비구니회 회장 역임 운문승가대학 학장
“대강백 관응 스님의 딸이
관응 스님에게 배우지 왜 나에게…”
영은사서 한달간 ‘장자’ 배워
탄허·관응 스님 밤새워 학문 토론
6·25 때 탄허 스님과 함께 피난
운문 강원 내외전 공부 스님 영향

-스님도 탄허 스님에게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오대산과의 인연부터 들려주시지요.
저는 탄허 스님과 인연이 있지만, 오대산의 방한암 스님과도 인연이 있어요. 이것부터 먼저 말씀드리지요.
저의 부친이 강백이신 관응 스님이신데 일제 말기에 노스님(관응)께서 월정사 강원의 내전 강사이셨어요. 그때 외전 강사는 동국대 교수를 지낸 원의범 교수이셨구요.
저희 집이 월정사 그 밑에 있는 마을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탄허 스님, 관응 스님, 원의범 교수는 동시대에 살면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요.
그런데 제가 강릉여고에 다녀서 공부할 때에는 강릉포교당에 가 있지만, 방학 때에는 집에 와서 있었어요. 그런데 여학생 3학년쯤에 상원사 거기를 올라가서 한암 스님을 뵈었어요.
상원사를 올라가서 하루를 자는데, 스님들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고 그래서 스님들은 잠이 없나 그랬어요. 절 풍속을 잘 모르니까 제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지요.
한암 스님께서는 그 이튿날 층계까지 내려오셔서는 절보고 “관세음보살을 많이 불러라”고 그러셨어요. 한암 스님은 그리 인자하셔요. 아주 자비가 얼굴에 뚝뚝 흘러요. 한암 스님의 사진을 보면 자비한 것이 꽉 찼어요. 그렇게 자비한 분이 없어요. 자비가 상징이지요.

-스님께서 입산하기 이전 시절의 탄허 스님에 대한 추억은 무엇일까요?
저는 방학이 되면 월정사 아래 동네에 있는 집으로 오기도 하지만, 여름방학 때에는 강릉의 구정면에 있는 칠성암이라는 절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그 절은 지금은 법왕사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칠성암이라고 불렀어요.
제가 거기에 가서 책을 많이 봤어요. 특히 관응 스님께서 읽으라고 주신 스물한 권짜리 <생명의 실상>을 거기서 아주 탐독했어요. 그 절의 개울가에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때에 보니까 탄허 스님, 관응 스님, 양청우 스님 이 세 분이 아주 친했어요. 그리고 탄허 스님과 관응 스님은 학문적인 토론을 서로 간에 많이 했어요. 밤을 새워가면서 대화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별명을 ‘밤새기’라고 그랬지요. 당신들끼리 서로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보았어요.
관응 스님은 유식에 통달하신 분이고, 탄허 스님은 유불선을 회통한 분이 아닙니까? 두 분은 불교학의 태두(泰斗)이시잖아요. 그러니 두 분은 밤을 새워가면서 학문 토론을 하신 것이지요.

-파계사의 도원 스님에게 6·25 때 탄허 스님과 같이 피난을 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것이 1·4후퇴 때입니다. 그때 저는 여고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받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이거든요. 저하고 탄허 스님이 같이 피난을 갔어요.
탄허 스님, 나, 정각심 보살(명성 스님 모친), 탄허 스님의 상좌인 희태 스님하고 같이 갔는데 그때 백설기를 만들어서 목침으로 나눠 갖고, 그 백설기를 먹으면서 동해안으로 2, 3일을 같이 피난갔어요. 우리는 고향인 상주 쪽으로 가서 중간에 헤어졌지요. 그때 관응 스님은 일이 있어 먼저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도원 스님도 우리와 같이 피난을 하였구요.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러니깐 탄허 스님은 나와 피난 동지예요.

-6·25 때의 추억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그때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리죽을 끓여 먹었어요. 칠성암에 있을 적에는 산에 올라가서 함포 사격하는 것을 구경도 하였고, 인민군이 와서는 나를 나오라고 그러는데도 “방 청소를 하고 나가겠다”고 대담하게 그랬어요.

-명성 스님은 1951년 해인사 국일암에서 출가하셨고, 1961년에는 청룡사에 계시면서 동국대 불교과에서 공부하셨는데 그 무렵에 탄허 스님에게 배웠나요?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제가 동대에 다니면서 주로 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였어요. 그때가 언제인지, 방학이 되었지만 놀면 안 되니까 탄허 스님에게 장자를 배우러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영은사로 배우러 간 것이지요.
그래서 탄허 스님에게 갔더니만, 스님께서는 “관응 스님에게 배우지, 왜 나에게 와서 배우려고 하느냐?”는 말을 연거푸 세 번이나 하시더라구요.
관응 스님에게 배울 일이지 왜 탄허 스님에게 왔냐는 것이지요. 그때 제가 뭐라고 말을 하였는데, 그만 세월이 50년이 넘다 보니 기억이 안 납니다. 탄허 스님은 장자, 거기에 통달하니깐 그런 것에는 독보(獨步)이시잖아요. 거기에 가서 배운 것은 한 번이었고, 한 달 동안 배웠어요.

-영은사 시절을 회고하여 주세요.
그때가 겨울이어서 무척 추웠어요. 영은사는 큰 도량이 아니었고, 주지는 희태 스님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희윤이라는 스님도 있었는데, 그 스님은 일찍 죽었지요.
박완일이라고 신도회 사무총장을 한 사람과 친했고, 박완일 씨의 장인이 신상순인데 그 사람은 월정사 산감을 하였지요.
공양은 그래도 먹을 만하였고, 거기에서는 발우공양을 꼭 하고 그랬지요. 저는 대중들과 함께 영은사에서 하는 수업을 같이 듣고, 따로 거기에서 떨어진 일소굴이라고 탄허 스님 계신 곳에 가서 일대일로 장자를 공부했어요. 저 혼자 배웠기에 칠판 강의는 안 했어요.
그때 탄허 스님이 하시는 칠판 강의를 들어보면 스님은 유불선의 모든 경전을 다 외워서 하셨어요. 정말 대단했어요. 탄허 스님은 저에게 해박하게 잘 일러 주셨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배운 것이 저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어요.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불경만 보다가 유교, 장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 학문의 폭이 넓어졌지요.

-그 시절, 그곳에 대중들은 누가 있었나요?
비구 스님으로는 혜거 스님이 기억납니다. 그 스님은 그때에 아주 젊었어요. 그리고 비구니 스님은 자호 스님, 자흔 스님이 생각납니다.
자흔 스님은 그 뒤에 환속했어요. 나는 객(客)으로 있었고 유심히 보지 않았기에 다른 대중은 잘 몰라요. 내 나이가 올해 여든 셋입니다. 세월이 너무 흘러서 잘 생각나질 않아요.

-그 후에는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뵈었나요?
제가 청룡사에서 10년을 있었어요. 거기에서 동대와 동대 대학원을 다니고, 강사도 조금 했어요. 그때에 원보산 스님도 자주 오셨고, 탄허 스님이 청룡사의 방장실에 계신 것을 봤습니다.
상주하시지는 않고, 가끔 들르셨는데 청룡사 주지인 김윤호 스님과 가까웠어요. 그리고 스님이 대원암에 계시면서 경전 번역 작업을 하실 때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스님은 늘 번역하시고, 집필하시는 것에 여념이 없었어요.
대원암에는 탄허 스님이 들어가시기 전에는 수덕사 출신인 덕수 스님과 혜춘 스님이 있었어요. 덕수 스님은 견성암의 선원장도 했는데 엊그제 돌아가셔서 오늘이 발인입니다. 내가 대원암을 들렀더니, 탄허 스님은 절보고 여학교 다닐 적에는 얼굴이 뽀얗더니 지금은 얼굴이 좋지 않다는 그런 농담도 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화엄경 출간 기념으로 월정사에서 화엄산림 법회를 하셨는데, 거기에는 가셨는가요?
저는 운문사 소임이 바빠서, 거기에는 가지 못했어요. 그리고 탄허 스님을 이곳 운문사에 모시지도 못했어요. 운문사에 한 번도 안 오셨어요. 그 스님은 늘 번역, 집필하시는 것에 바빴어요. 지금 생각하면 한 번이라도 모셔서 특강을 하였으면 좋았는데, 왜 못했는지 아쉽지요.

-탄허 스님을 어떤 스님으로 보시나요?
저는 탄허 스님을 선교(禪敎)를 겸수한 스님으로 보고 싶어요. 선교는 둘이 아니거든요. 선교를 따로 보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탄허 스님은 선교일치(禪敎一致)를 터득한 큰스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탄허 스님은 승가교육에 필요한 경전 대분분을 번역하셨지요?
탄허 스님은 하여간에 정력이 대단해요. 스님의 열정, 에너지는 대단합니다.
학문에 대한 저력은 보통이 넘습니다. 학문에 당당하셨어요. 스님이 하시는 강의를 들으면 보통 통달이 아닙니다. 그리고 탄허 스님이 모든 경전을 번역하셨다는 것은 역사상에 한 획을 그으신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유불선을 회통하셨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명성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탄허 스님은 학문적으로 자신만만하셨습니다. 스님은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어요. 자기 자신의 자주력을 길러서, 학문적으로 자주정신이 강하셨죠.
그래서 나도 그런 점에서 자주적인 정신을 배울 수 있었지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자주정신이 강했어요.

-탄허 스님은 유불선을 회통하셨는데, 이런 점을 보고 명성 스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는지요?
저는 그런 생각은 있었지만, 그리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저는 스님의 영향을 받아서 운문사 학인들에게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도 가르치고 있어요. 이곳 운문사 강원의 전교생들에게 사서(四書)를 배우게 하였어요.
그 방면의 학자를 모시고 했어요. 영남대 교수인 유교학자 이완재 선생을 모셔서 그리 했어요. 지금은 한불전대학원에서도 수업을 합니다.
탄허 스님의 영향으로 스님들이 불교, 내전만 배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외전을 겸해야 만전을 기할 수 있는 학문이 될 수 있어요.

-탄허 스님과 관응 스님의 특성을 비교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두 큰스님을 비교할 수 있겠어요. 관응 스님은 뭐 하라고 하시면 ‘싫어요’입니다. 역경장 하라셔도 그렇고, 총무원장 하라셔도 그렇고 무조건 ‘싫어요’ 그래요. 스님은 안 하는 주의지요.
그에 비해서 탄허 스님은 정치적인 말씀도 하시고, 학문에 아주 당당하고 그랬어요. 어디에 굽히질 않아요. 자신만만하셨어요. 스님은 당신은 신학문을 안 했지만 신학문하는 사람을 아주 좋아했어요. 스님이 하시는 강의를 들어보면 목소리에 힘이 있어요.
하여간에 두 분은 잘 통했는가 봐요. 그래서 서로 밤새기라고 그러지요.

-탄허 스님의 생각이 가끔 나시나요?
그야 생각이 나지요. 같이 피난을 가던 생각이 납니다. 지난주에 교수님께서 저를 찾아오신다는 연락이 왔을 때에 내가 탄허 스님에 대해서 별로 많은 자료를 줄 것도 없고, 이야기를 할 것이 없는데 왜 오시나 하였지요.
탄허 스님은 100살 넘게 사신다고 그러셨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하실 일이 많았는데 참으로 안타깝지요.
탄허 스님이 입적하였을 적에 내가 버스를 대절해서 여기 운문사 학인들을 데리고 월정사를 가던 일이 엊그제 일처럼 생각납니다.

-오늘 귀한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멀리서 오셨는데, 미안합니다. 내가 탄허 스님에 대해서 답변한 말이 너무 적네요.
저는 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을 아주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큰스님들의 가르침, 일화 이런 것을 많이 모아서 집대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불교, 스님들의 맥이 다 끊어집니다. 교수님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우리 관응 스님에 대한 작업도 신경 써주세요. 탄허 스님, 운허 스님, 관응 스님은 그 시절 3대 강백으로 이름을 날리던 큰스님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큰스님들이 자꾸 돌아가셔서 큰일 났어요. 우리가 우리 스님들의 흔적과 가르침을 찾고 정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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