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30〉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김동건

김동건 / 서울고등법원장, 서울지방법원장, 참여불교재가연대 대표 등 역임, 현재 불교포럼 대표, 탄허재단 이사, 법무법인 ‘바른’의 대표 변호사
1980년 어지럽던 비상계엄하에서도
나라 운영에 대한 소신 당당히 밝혀
1960년대 대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강의
저서 〈부처님이 계신다면〉베스트셀러
“도를 도라고 부르는 순간 도가 아니다”
박정희 前대통령도 스님 유묵에 감동

 

-변호사님은 불교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 탄허 스님과도 인연이 많지요. 혹시 법불회 회원이었는가요?
저는 서울법대를 1965년도에 들어가서 1학년 시절에 탄허 스님의 금강경 강의를 한두 번인가 들었습니다만, 서울법대 불교학생들의 모임인 법불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어요. 그때 탄허 스님이 서울대에 오시면 허연 모자를 항상 쓰시고 다녀가는 모습을 본 기억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 당시에 금강경의 내용은 잘 몰랐어요. 그렇지만 1학년 때에는 법학 분야 이외에도 관심이 있어 이기영 박사의 〈원효 사상 연구〉라는 책을 읽어 보았어요. 그때 이박사가 그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갖고, 언론 출판계에 좋은 반응으로 보도가 되고 무슨 상을 타고 그랬어요. 이런 경험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기영의 저술을 읽기 시작했지요. 또 인문대에 가서 이용희 교수의 국제외교사 강의도 듣는 등 법학 주변부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 무렵 탄허 스님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요?
그때에 스님은 예언자적인 그런 것으로 사회적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 발전 등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저도 그런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내용에서는 스님 말씀에 반신반의(半信半疑) 한 적도 있어요. 대원암에서 강의를 마치시면, 강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갖고 차담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찍 간 적도 있지만, 그런 차담 시간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님 말씀을 듣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학하리의 스님 유묵이 도난당했을 때 변호사님이 해결하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참!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학하리에 있던 어떤 젊은 스님이 스님의 책, 유묵 등을 훔쳐갔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저를 부르셨는데, 스님을 찾아뵈니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스님은 누가 가졌는지 짐작은 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제가 대전지법에 있을 때인데, 당시 대전검찰청의 1호 검사인 김종빈 검사에게 그 해결을 부탁했어요. 김종빈은 고대 출신으로 불교에 관심이 있는 분이어서 부탁을 한 것입니다. 저와는 평소에 불교를 소재로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친근하게 지냈고, 대전에 사는 아파트도 우리집 부근에 있어서 부탁했지요. 그랬더니 그 분이 유능한 형사 둘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때 그 형사들이 밴의 일종인 차를 타고 일을 하였는데, 어느 사찰에 탁! 가서 도둑을 잡아 와서, 해결을 하였지요.

-저도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 탄허 스님과 인연이 있다는 것을 봉은사의 일요법회보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 후에 검찰총장까지 올라갔고, 최근에는 봉은사 신도회장도 지냈어요. 그 분은 영월 법흥사에 자주 출입하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였는데 아마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을 거예요. 요즈음에도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합니다. 저도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저도 법흥사에 가서 기도를 하였지요. 사실 저는 절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였죠. 저는 제 아버지의 생신날이 되면 가족, 친지들을 대전으로 불러 하루는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 날은 자광사로 가서 하루를 쉬면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또 상원사에 가서 하루를 지내기도 했고, 법흥사에 가서 하루 자고 그곳에서 생신 공양을 내기도 했어요.

-탄허 스님은 민족의식, 정치의식이 강하셨다고 보지 않는가요?
그렇지요. 1980년 초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등 세상이 어지럽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던 그때에도 스님은 가장 당당하게 겁을 안 내시고, 과감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라가 나갈 방향을 소신껏 말씀하시고, 군인들이 스님을 친견하고 여러 가지를 물으면 그때에도 당신 소신을 밝힌 것으로 알고 있어요. 스님의 부친이 보천교라는 종교 단체에 관여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런 연고로 어린 시절부터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갖고 계셨다고 보입니다. 민족지사가 아닌가 합니다. 그 시절에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서 그런지 산에 들어가서 소승적으로 도(道)만 닦았던 스님들이 많았지 않았습니까.

-탄허 스님의 부친은 그런 공로가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탄허 스님이 1960년대 중반에 오대산에서 나와 서울 도회지에서 법대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으신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 당시 스님은 50대 초반이었고, 재력도 별로 없을 때였는데 그런 것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신 것은 탁월했다고 봐요. 그렇게 스님이 나서자 법불회 1기생들이 스님에게 빠져버린 것이지요. 스님께서 승려로서 쉽고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도회지에 돈 많은 만만한 신도들을 만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것을 포기하고 대학생들에게 민족, 미래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신 것은 대단한 용기이시지요. 선각자적인 기질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 당시 스님이 법불회 학생들과 친할 때, 법불회는 10년간은 잘 되었습니다. 저는 정식 회원이 아니었고 졸업한 후에 법불회 출신 선배님들과 함께 탄허 스님을 따라다녔지만 법불회 그 팀들의 공부는 대단했어요. 우리들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유명하신 탄허 스님을 가까이 뵈었지만, 저기 부산에 있는 백봉 김기추 거사가 계신 곳에도 가서 선문강의를 다 들었어요. 백봉거사 밑에서 정진을 1주일씩은 다 거쳤습니다.

-탄허 스님에 대한 것은 그 당시에 많이 보도되었지요?
당시 유력한 신문에 스님에 대한 것이 많이 보도되었지요. 스님은 동아일보가 주는 인촌상을 타셔서 그런지, 동아일보에 스님의 보도가 좋게 나갔어요. 그리고 조선일보의 선우휘 주필과도 친근하셨고, 두 분이 대담하는 것이 조선일보에 크게 나왔습니다. 그 시절 선우휘씨는 조선일보에서 얼마나 막강했습니까? 참, 그리고 선우휘씨의 사모님도 제가 고대 앞에서 상학을 배울 때에 같이 배운 것으로 어렴풋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지금 야권의 원탁회의 좌장인 백락청의 사모님도 같이 상학을 배웠어요. 또 스님의 저서인 〈부처님이 계신다면〉은 나오자 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탄허재단 설립 당시에 변호사님이 수고를 하였다는 말이 있어요.
스님은 살아생전에 학하리를 인재양성의 거점으로 만들려고 하셨고, 그곳에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을 재단법인으로 해야 한다는 큰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스님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서 법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창열, 명호근 선배들이 말씀을 했어요. 그러면 법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서로 상의하고, 궁리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 실무를 추진할 사람으로 김희순 선배가 나섰고, 저도 옆에서 많이 도왔습니다. 법인의 허가를 그 당시 문공부가 담당해서, 그 당시 문공부장관인 이진희 그 분에게 제가 테니스 시봉을 6개월 이상을 했습니다. 그 분과 함께 장충동의 테니스장에서 같이 운동을 하였고, 또 경복궁 내의 테니스장에서 매주 테니스를 치고, 끝나면 목욕하고 밥도 같이 먹고 헤어지고 그랬어요. 그렇게 같이 운동을 하면서 이진희 장관에게 “탄허 스님을 기리는 법인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하였죠. 그랬더니 그 분이 종무실 직원을 불러서 지시를 해주셨어요. 그런데 3~4개월이 지나고, 5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요. 그래 다시 이진희 장관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 분은 화를 내시면서 “이놈의 자식들 아직도 안 했어!” 하시더니, 그후에 조치가 되어서 어렵게 법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재단법인을 만들고, 이사회를 구성하고 그랬지요.

-변호사님은 탄허 스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싶나요?
저는 요즈음 불교계의 스님들이 자기 정체성을 선사, 율사, 강백 이렇게 분류해서 밝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스님들은 각 분야의 기본적인 모든 것을 다 해야 되지 않는가 합니다. 이런 면에서 탄허 스님은 모든 방면의 지식, 학식을 다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교학에 남달리 뛰어난 분이었지요. 스님이 강의하실 때에 분명하게 하시는 말씀, 오자(誤字) 하나 없는 글을 칠판에 가득하게 적으시고 하신 강의를 들어보면 대단하다고 감탄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스님은 그 당시 불교계의 비주류였습니다. 어찌 보면 비주류였기에 그런 고민, 작업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당대에는 주류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 불교는 수행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즈음 스님들은 자기 수행에 힘쓰기보다는, 사회에 나와서 하는 하화실천과 현실 사회에서의 교화에만 신경을 씁니다. 반면에 신도들은 어찌 보면 삼귀의례, 사홍서원 정도의 교리, 신앙만 갖고 사회 참여를 해도 될 터인데 참선과 경학 공부를 스님들이 하듯이 노력해서 자기도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려고 하는 역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에 저는 수행과 실천이 본래의 모습, 구도가 아닌가 합니다.

-변호사님에게서 탄허 스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저에게 있어서 스님은 제 인생의 위대한 스승이지요.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이 각인이 되어서 저는 스님에 대한 모든 것이 좋게만 보입니다. 외부에서 탄허 스님에 대한 것을 놓고 왈가왈부(曰可曰否)가 많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일부분만을 보고서 말들을 하지요. 전체적인 것은 보지 않고서. 하여간 탄허 스님은 여러 면을 갖고 계시고 그래서 여러 평가가 나온다고 보여집니다. 탄허 스님 같은 분이 지금 이 시대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냐는 것입니다. 스님이 쓰시는 한문을 보면 그런 것은 어린 시절에 이미 문리가 터져서 그리된 것 같아요. 불교뿐만 아니라 유불선 전체에 대해서 그렇게 해박한 인물이 앞으로 다시 나올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저로서는 스님을 20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만나서, 40대 초반까지 근 12~3년을 아주 가깝게 모시고 지냈습니다. 대학 때부터 보자면 15~6년입니다. 그 기간에 스님을 모시고, 배우고, 야단도 맞으면서 가르침을 받은 것 그 자체가 제 삶의 족적입니다. 또 열반 이후에는 재단을 만들어서 지금껏 법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보통의 인연은 아닙니다.

-탄허 스님의 유묵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한 점도 없어요. 제가 대전에 근무하다가 서울로 발령이 나서 올라간다고 하니까 스님께서 특별한 글씨를 하나 써주셨습니다. 그것은 노자 도덕경 1장의 구절인데요, 도를 도라고 부르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었습니다. 저는 스님에게서 그것을 받고 나서 노자 도덕경의 책을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꼭 달라기에 주었지요. 그 후에 자광사의 주지로 있었던 원행 스님이 스님의 글씨를 전각하였는데, 그것을 한 점 얻었는데 그것은 내용이 좋아서 지금도 저희 집에 딱 걸어 놓았지요. 그것은 인의자실(忍衣慈室)이라는 내용입니다.

-탄허 스님 글씨는 선필(仙筆)로 유명하지요?
혹시 박정희 대통령이 스님 글씨를 받고서 기분이 좋았다는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월정사의 제일 큰 화주를 한 사람이 KAL의 조중훈 회장입니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쓸쓸한 박대통령이 조중훈 회장이 선물한 스님의 글씨, 진묵대사의 49재 추도문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고 그래요. 대통령의 심정을 달래주는 것이 쉬운 게 아니지요. 조중훈은 그 선물을 드렸는데 박대통령이 가납을 하였고, 그때 박대통령이 조회장에게 “스님에게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면서 스님을 모시고 인도 성지순례를 한번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스님의 인도순례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KAL에서 모든 준비를 하고, 순례하시는 것을 KBS가 따라가서 찍어서 그 이듬해 초파일 특집으로 몇 차례 나누어서 내보낸 것이지요. KAL은 냉난방이 되는 전용차를 준비하는 등 신중하게 스님을 모셨습니다. KBS가 PD를 붙여서 보내고 촬영을 하였던 것도 KBS 단독으로 결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전후사정이 있어서 가능하였던 것이지요.

-탄허 스님 탄신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준비 중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입적 몇 주기 하는 행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위대한 인물은 탄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중국에서도 등소평을 탄신 기념으로 행사를 하고 있어요. 탄신 100년이 되었으니 탄허 스님과 같은 새로운 인물이, 스님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갈 후예로 사회에서 준비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지금껏 재단에서 탄허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가려고 그래도 노력은 하였지만, 저희 같은 속인들은 한계가 있어요. 재단의 명맥을 유지하였다는 자부심은 있었지만요. 성철 스님의 상좌인 원택 스님이 성철 스님은 종정도 하셨지만 재단을 만들지도 못하였다면서, 탄허 스님은 입적하신 직후에 그렇게 빨리 만들었다면서 부러움을 표한 글을 제가 어디에서 본 적이 있어요. 〈끝〉

그동안 ‘방산굴의 무영수’를 애독해 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