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25〉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고준환

고준환 / 본각 선교원장 동아일보 기자, 교수불자연합회 초대 회장 등 역임, 경기대 명예교수
스님은 선사이며 법사, 대종사
청담 스님, “이차돈의 순교 이래
제일의 불사는 탄허의 화엄경 번역”
“통일 후 나라 이끌 인재 양성해야”
거사불교시대 올 것 예언
‘본각선교원’은 거사 불교 준비


-교수님은 정년 퇴임하신 후 본각선교원을 여시면서 새로운 불교 활동을 하시는데 교수님의 불교 활동 저변에는 탄허 스님과의 인연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탄허 스님을 만난 것은 서울법대에 다닐 때(1961~1964)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 시절에 뵌 정황은 잘 기억나질 않아요. 그렇지만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입장에서 회고를 해보지요. 서울법대에는 법불회라고 동기생 10여 명이 만든 불교 서클이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청담 스님의 법문을 들은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그 이후로 큰스님들을 친견하고, 나아가서는 대불련을 창립하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탄허 스님을 뵌 것으로 기억하지만 언제 처음 만나 뵈었는가, 그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탄허 스님의 유발상좌 비슷하게 되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죠.

-대불련 출범 초기 상황에 대해서 기록이 부족하고, 증언이 다양한데 교수님의 경험을 들려주세요.
법불회가 등장하고 신호철이 초대 회장으로 있었어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은 불교가 청년화, 대중화, 지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불교계를 움직일 스님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그때에 활약이 많은 홍도 스님, 일명 방울 스님을 찾아가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니깐 홍도 스님이 좋다고 해서 대불련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어요. 처음 만날 때 조계사에서 만난 사람들이 김홍도 스님, 신호철 법불회 회장, 서울대 법대의 고준환, 동대에 최동수, 육사불교회에 하장춘, 외대의 여학생 한 명, 이화여대의 학생 두 명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직이 시작되려고 하니 신호철과 최동수가 서로 회장을 하려고 해서 내가 나서서 신호철이 회장을, 최동수가 사무총장을 하게끔 하고, 부회장은 부산 출신인 이대의 강혜정을 하게하고는 나는 백의종군하는 입장으로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 후로는 명호근과 전창열이 나서서 많은 일을 하였어요. 이들은 출범이 거의 완성될 때에, 조직을 만들려고 시작한 수개월이 지난 후에 들어왔지만 그 어려운 과정에 가장 공헌을 많이 한 명호근의 공을 깎아서는 안 되지요. 난 그 후에 동문회 대의원 의장을 하였지만.

-그러시군요.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탄허 스님과의 인연은 지속되지 않았는가요?
저는 청룡사, 대원암, 학하리 등지에서 탄허 스님을 뵙고, 배우고,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특히 서울 청룡사에 스님이 주석하실 때에는 화엄경·장자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때에는 법불회 동기인 박준수, 전창열, 명호근, 김문웅, 김춘오 등과 함께 저녁마다 법회에 참석하여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탄허 스님의 법문이 있는 곳이면 대원암이건, 삼보법회건, 고려대학교 등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과 영원에 대한 갈증을 풀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시절에 스님이 불교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신 것, 노장과 유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는군요. 특히 장자 소요유라든가, 성인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고 하신 말씀, 화엄경의 사사무애 중중무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납니다.

-탄허 스님은 1975년에 화엄경을 번역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는데요. 이 작업에 교수님이 관여하신 것은 없는가요?
저는 그 작업에 직접 참여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스님을 특별히 도와 드린 것이 없어서, 해드릴 것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그 〈신화엄경합론〉의 출간에 즈음하여 이병도 박사, 박길진 원광대총장, 천관우 선생을 찾아가 신간평, 추천사를 받아서 스님에게 갖다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에는 청담 스님이 이차돈 순교 이래로 제일의 불사가 탄허 스님의 화엄경 번역 불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신간평을 받아서 드렸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증언입니다.
저는 신간평을 받아서 스님에게 드린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잡지 등에 실린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스님에게서 〈신화엄경합론〉 한 질을 받았어요. 그때 스님은 저에게 ‘군자유삼락이왕천하불여존언(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이라는 글을 함께 내려주셨어요. 저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거지요. 그래서 저는 그 책자와 이 유묵을 집안의 가보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에는 심외무불(心外無佛)이라고 스님이 쓰신 액자도 보관하고 있어요. 스님은 사람들에게 책을 잘 주지 않았어요. 저를 주신 것이 제가 학자의 가능성이 있고, 저의 미래를 내다보시고서 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평소에 스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제가 평생 학생부군의 체질이고, 학문적인 것을 인정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탄허 스님의 수준에서는 멍텅구리 수준이지만.

-화엄경이 출간된 직후 무렵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교수님이 고은, 여익구 등과 함께 대원암으로 탄허스님을 찾아가서 배우다가 경찰에 연행된 일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독재 권력의 언론 탄압에 항의해서 해직되고, 이른바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를 조직해서 활동했어요.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저는 민족주의, 민주적인 것이 나라의 바탕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지요. 그러기 전에 저는 법조계 출입 기자를 하면서 박정희와 맞서서 감옥에 갔다 온 일도 있습니다. 그 당시는 기자들이 취재를 해서 글을 쓰지 않고 던져주는 것만을 갖고 기사를 썼어요. 그러나 저는 기사도 역사의 기록이라는 입장에서 그러지 않고 취재를 해서 썼거든요. 그때 정부에서 국회의원 79명을 사전 선거운동이라는 빌미로 잡아넣으려고 하는 것을 제가 알고 신직수 법무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직전에 보도해서 입건 구속되었어요. 그래서 90일 동안 있다가 미결수로 나왔어요. 제가 그 무죄를 입증하는 데 8년이나 걸렸어요. 이런 이력이 있어서 해직이 되고, 언론투쟁을 할 때에 보니 기독교, 천주교 등은 사회봉사도 하고 독재정권과 맞서고 있는 활동이 많았어요. 그러나 불교는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그때에 그런 입장에 있었던 법정 스님을 제가 동아방송에 모셔서 내보내고, 일부러 인터뷰해서 제가 자주 뵈었죠. 동아투위에 130여 명이 있었지만 불자는 별로 없었는데, 저는 스님들과 친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불교적 입장이 뚜렷하여서 모든 사람이 저는 불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불교도 보살도의 입장에서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지 못하게 당연이 도와서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북돋워 주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탄허 스님은 융통성도 많으시고, 얘기가 통하는 어른이어서 고은, 황석영, 용산고 후배인 여익구, 대학생인 전재성 그런 사람들을 제가 규합해서 탄허 스님을 찾아가 두 번인가를 배웠죠.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그때에 탄허 스님이 하신 말씀은 어떠하였는가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성북서에서 체크가 되어서 저는 4박 5일간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거기서 잤죠. 그러나 탄허 스님은 경찰서는 가시지 않고 예의상으로 대원암에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은 동아투위의 기록에도 나와요. 그때 탄허 스님이 하신 말씀은 기억이 나지 않고, 원효 스님과 만해 스님에 대한 것을 들었지요. 원효 스님은 당대에서 가장 명석한 스님이었고, 깨달은 분으로서 백성과 중생의 편안함을 위해서 화쟁과 통일을 실천한 분으로 내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있었죠. 그리고 만해 스님은 지조가 있고, 독립운동가였고, 시도 쓰는 아주 멋있는 스님이 아니었습니까?

-탄허 스님은 인재양성을 무척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듣지 않았나요?
스님은 인재양성에 대한 말씀을 자주 했어요. 스님은 우리나라가 언제인가는 통일이 된다고 보셨어요. 그리고 지하에서 뜨거운 것이 융기하여 동쪽과 남쪽은 내려가고, 서쪽은 융기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통일이 되어 세계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런 장래를 대비해야 하고, 나라를 이끌고 나가면서 세계를 지도할 인재가 많이 필요한데, 그런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말씀했어요. 그런 것이 우리들의 뇌리에 늘 있었지요.

-지금 교수님이 하시는 본각선교원도 그런 것과 연관되나요?
그렇지요. 저는 탄허 스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니 당연히 스님의 인재양성이라는 것과 무관할 수 없지요. 제가 이곳에서 하는 본각선교원은 시각(始覺)이 본각(本覺)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선과 교를 겸하는 것이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제가 하는 것의 시작은 작지만 앞으로 저는 대학원 대학이라든가, 불자마을 같은 것도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저는 1994년도에 이런 것을 하려고 철원에 3만 8천 평을 마련해 놓았어요. 저는 우리의 일생을 살아나감에는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딱히 정해진 것이 없어요. 다만 자기에게 적합한 것을 택해 정진하다 보면 단박 깨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체험을 가진 사람들을 모셔서 일요일 법회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과목도 설강을 해 놓았습니다. 21세기는 복잡다단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각 인류문명을 창출하는 것을 지론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깨달은 사람들이 문명을 창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어요.

-탄허 스님은 거사불교에 대한 입장도 밝히셨나요?
탄허 스님은 거사불교의 시대가 열린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시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 중심의 종단은 그것대로 잘 되면 좋고, 제가 추진하는 것은 거사불교를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후에는 한국 거사회도 만들고, 세계불자연합 등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각 인류 문명을 창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중흥시켜야 하는데, 불교라는 진리는 좋은데 불교는 사회적인 힘이 없어요. 이런 입장에서 나는 탄허 스님의 뜻을 따라서, 스님의 뜻을 부흥시키려고 내 인생의 후반부를 전력 질주하려고 합니다. 나는 스님만의 불교, 스님 중심의 불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 조계종단은 2부대중의 불교입니다. 사부대중의 불교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비구니의 역할은 1%밖에 안 돼요. 내가 그래서 혜암 종정과 월주 총무원장에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들도 내 말이 맞지만 지금은 못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패거리가 무서워서 부처님 법을 실천 못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맞는 말을 하지, 교수로서 말이 안 되는 것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가오는 거사불교 시대를 위해서 준비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교수님께는 탄허 스님의 영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의 생각 저변에는 탄허 스님의 사상이 깔려 있어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저의 일생을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가는 것에 비유해서 스님, 거사 등 많은 사람이 저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랜 영향을 준 분은 탄허 스님입니다. 그 다음은 법화경을 가르쳐 준 설송 스님이고, 혜암 종정, 화두를 주신 경봉 스님 등입니다.

-1980년에 나온 탄허 스님의 책인 〈부처님이 계신다면〉의 출간에 교수님이 관여하셨다는 기록이 있어요.
글쎄요. 제가 출간의 인연을 만들어 준 것은 어렴풋하게 기억되지만 구체적인 일은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제가 출간하게끔 권유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스님의 생각과 사상이 많이 퍼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스님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고승대덕에게는 배우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큰스님에게 일일이 물을 수도 없지요. 탄허 스님에게 잘못 물으면 멍텅구리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책을 통해서는 고승들의 인간적인 면을 이해하게 되고, 친근감이 가니까 대중들에게는 좋지요.

-탄허 스님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지요. 교수님은 탄허 스님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런 것은 이름을 붙이는 것인데, 저는 부처님이나 탄허 스님을 한 인간으로 봅니다. 탄허 스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은 불교적으로는 스님이지요. 다만 스님은 스케일이나 방향이 유불선을 종합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과 부처님은 종교의 테두리에 있는 분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내고 설명하신 분입니다. 부처에게는 주의나 이즘이 없어요. 우리들이 부처가 찾아내고 주장한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이 말을 알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탄허 스님은 일체 경계에 머물지 않고, 자유자재로 진리를 찾고, 전달하는 것을 지향한 도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탄허 스님을 선사라고 해도 맞고, 법사라고 해도 맞고, 선교를 아우른 대종사라 해도 맞습니다. 이름은 대명사에 불과합니다. 탄허 스님은 실상에 접근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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