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굴의 無影樹 〈21〉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전보삼

전보삼 / 박물관협회 회장, 신구대 교수, 만해기념관 관장
“만해는 저울추·선사·혁명가야”
만해 연구의 결정적 동기부여
“공부는 한가지라도 10년은 해야”
탄허 스님 초청 사상강좌 개최
한양대 전체 들썩…일간지 보도
박한영 스님 잇는 대강백


-교수님은 강릉 지역에 살았고, 그 지역의 학교에 다니면서 큰 활동을 하였지요?
우리 집이 강릉포교당 근처예요. 그래서 학교는 강릉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인 1962년에 강릉불교학생회에 들어가서 강릉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8년까지 6년 동안 강릉포교당을 거점으로 활동을 하였지요. 중등부 부장을 중2 때에 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부회장을 하고, 고등학교 2, 3학년 때에는 회장을 하였어요. 내가 강릉불교학생회의 47대, 48대 회장인 셈이지요. 그 당시에 회장 선거할 때에는 강릉고, 강릉여고, 강릉상고, 강릉농고의 불교학생회원들 1천여 명이 와서 법당이 꽉 차고 그랬어요.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강릉포교당에서 탄허 스님을 여러 번 만났고, 그곳에서 큰스님들을 많이 만났어요. 운허 스님, 관응 스님, 석주 스님을 다 그곳에서 만났고, 도문 스님도 그 포교당 주지를 하실 때에 만났지요. 그러니깐 강릉포교당은 나의 안방이고 그랬어요. 거기에서 학생회 잡지인 〈보리수〉도 만들고, 수많은 행사를 가졌어요. 그 시절에는 학생법회를 하면 수백 명이 모이고 그랬어요.

-강릉 지역의 불자들은 탄허 스님을 어떻게 말하였을까요?
강릉의 신도나 보살들은 탄허 스님을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의 백과사전으로 불렀어요. 한암 스님은 부처님, 생불이라고 불렀지만 탄허 스님은 근기가 높은 스님, 백과사전으로 많이 불렀어요. 내가 스님들에게 자꾸 뭘 질문을 하면 탄허 스님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탄허 스님은 백과사전이라 다 아신다고 그랬지요.

-탄허 스님을 만나서, 인연을 갖게 된 것을 들려주세요.
내가 중2 때부터 탄허 스님을 뵙고, 뵙기만 하면 불교에 대해서 묻고 만해 한용운 스님에 대해서 물으면서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나는 그 시절에 궁금한 것이 많아서, 스님들을 만나면 자꾸 질문을 하였어요. 스님들을 괴롭힐 정도로 물으면 그 스님들은 탄허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하면서 피했어요. 내가 탄허 스님에게 물은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 가느냐, 인과가 무엇인가, 색즉시공이 뭡니까 등등이었지요. 이런 것을 물으면 스님이 툭 던져주는 것에 자극을 받고 불교를 배워 갔지요. 그때에 탄허 스님은 학생들에게 “공부해”라는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사람이 부지런해야지 뭐라도 된다”고도 하셨고요. 내가 탄허 스님에게 들은 것 중에서 제일 인상이 깊은 것은 공부를 하더라도 새벽에 하라는 것이었어요. 새벽정신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아침의 한 시간은 저녁의 열 시간과 같다, 아침시간 과 저녁시간은 그 양과 질에서 다르다, 그래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강하게 가슴에 남았어요. 부처님도 새벽 별을 보고 깨치셨지요. 그래서 나는 아! 공부는 새벽에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어요.

-교수님은 한용운 스님을 평생 연구하시고, 그 관련 자료를 모아오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것에도 탄허 스님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요?
그렇지요. 내가 중학교 2학년부터 만해 한용운 스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지요. 내가 탄허 스님에게 만해에 대해서 물으면 스님은 나에게, “저울추가 뭔지 알아? 조그만 쇳덩이가 만 근을 들어 올려, 만해 스님은 저울추야, 저울추”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스님은 기분이 좋으신지 웃으며 좋아하셨지요. 저울추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훗날 저울추는 노자의 말 “돌덩이 보다 무거운 것은 다듬으며 잇돌, 다듬잇돌보다 무거운 것은 저울추”라는 사실을 인용하신 것을 알았지요.

-그런데 탄허 스님이 어떻게 해서 만해 스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을까요?
만해 스님이 오대산의 한암 스님에게 몇 번 왔다고 그래요. 그러면 한암 스님의 옆에 탄허 스님이 있었기에, 자연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한암 스님과 만해 스님도 가까운 사이였어요. 두 스님이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 받은 사이라고 그래요. 조지훈 선생이 그 중간에서 심부름을 하였다고 하지요, 지훈 선생이 일제 말기에 월정사의 외전강사를 하였잖아요. 내가 조지훈 선생을 찾아가서 묻기도 했어요. 이런 것을 우리가 밝히지를 않아서 그렇지, 그런 내용들이 다 있었어요. 그러니까 탄허 스님은 이런 바탕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지요. 탄허 스님이 만해 스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확신에 찬 이야기예요. 그래서 내가 만해스님에게 빨려 들어가게 되었지요. 힘 있게 말씀하시니까 내가 만해를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스님은 나에게 공부는 10년은 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어요. 그리고 내 법명도 지어 주었어요. 내 이름이 전보삼, 보삼이 아녜요. 그러니깐 스님이 “니 법명은 이름을 뒤집어서 삼보(三寶)라 해라”고 하셨어요. 내가 “삼보 스님이 있는데, 어떻게 같은 이름을 쓰면 됩니까?” 하면, 너는 재가의 삼보이니까 둘이 같이 삼보이니, 친구로 지내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삼보스님과 친하게 지내요.

-교수님이 만해 연구를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탄허 스님이 제공하였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스님이 확신에 찬 말씀을 하시니까 내가 만해에 빨려 들어갔다고 보지요. 그때에 스님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 고민하다가 내가 스님에게 “만해스님은 선사가 아닙니까” 하고 여쭈어 봤어요. 그러자 스님은 “만해는 선사이지, 선사이니까 혁명을 꿈꿨지” 그러셨어요. 그리고 “만해 스님은 냉돌에 앉아 있었다. 조선 전체가 감옥이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냉돌에 앉아 참선을 했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선사이면서 동시에 혁명을 꿈꿨다는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내가 만해를 선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지요.

-강릉포교당에서 한용운 스님에 대한 행사도 있었는가요?
있었지요. 만해 스님의 기일에는 우리 학생들이 주관하여 추모재를 지냈어요. 기일에는 늘 했지요. 불교학생들이 모일 이벤트 차원에서 하였어요. 그러면 포교당 주지스님이라든가, 인근 주변에 계신 스님들을 모셔서 하였어요. 그때에 도원 스님, 양청우 스님이 하신 것 같아요. 간혹 스님들이 못 오시면 내가 주관하여 지냈어요. 우리는 열성적으로 했어요. 또 만해특강도 하였어요. 나는 그때,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만해 연구를 해서 서울에서 발간된 〈법시〉라는 잡지에 글을 기고했어요.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국어수업 시간에 책을 탁 펴니까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가 나와서 나는 깜짝 놀랐어요. 수업이 시작되니 친구들이 이 시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안다고, 나를 들먹였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날보고 그러면 나와서 어디 한 번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해서, 내가 한 시간 동안 만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어요. 그래서 나는 만해 연구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지요.

-탄허 스님은 교수님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군요?
내가 그렇게 자꾸 묻고 그러니깐 스님이 나를 기특하게 보신 것 같아요. 날보고 늘 공부를 하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를 하더라도 10년은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시고 또 만해스님은 당신보다는 서울에 가면 칠보사에 석주스님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스님이 만해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석주 스님을 찾아가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1968년에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에 메모한 정보가 세 가지예요. 첫째가 칠보사, 둘째가 망우리, 셋째가 심우장이었어요. 이것이 다 만해 스님의 연고지이지요. 그래서 내가 칠보사로 가서 석주 스님을 찾아뵈었지요.

-그때는 만해 한용운 전집이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지요?
그렇지요. 만해에 대한 관심은 그때에 대불련에서도 아직 시작하지 않을 때예요. 그런데 1972년인가에 대불련 차원에서 탄허 스님을 모셔서 풍전상가에 있는 삼보법회 강당에서 특강을 한 일이 있어요. 그때에 탄허 스님과 김열규 교수를 같이 모신 것 같아요. 내가 그런 제안을 하니까 전창열, 명호근 같은 선배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해서 탄허스님을 아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강릉불교학생회, 오대산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해를 하고, 내 제안에 100% 찬성을 해주어서 강연이 마련됐어요. 그리고 1974년에는 만해 스님 입적 30년을 기념하는 강연회를 하였는데, 그때에도 탄허 스님이 연사로 나섰어요. 스님은 만해 스님의 불교사의 깊이는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며, 무아를 달성한 그의 선적(禪蹟)은 돌덩이보다 무거운 저울추라고 하신 큰 법문을 하셨지요. 어찌 보면 스님은 나의 증명법사처럼 그렇게 특강을 하신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한양대에 입학을 해 보니 불교학생회가 없더군요. 그래서 내가 불교써클을 만들어 등록을 하려고 하니까 학교에서 등록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한양대는 기독교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학교 당국에 가서 강한 항의를 하였더니 들어주더라고요. 나는 처음에 학생회 이름을 선지식이라고 하려고 했더니, 학교에서 불교학생회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렇게 등록은 했지만 우리들은 선지식이라고 불렀어요. 지금도 한양대 동문들은 선지식으로 부르면서 만나지요. 불교학생회를 만들어서 내가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탄허 스님을 모시고 큰 행사를 가졌어요. 사상강좌라고 부르고, 학교 입구에서부터 강당까지 행사 안내를 써 붙이고 그랬더니 학교 전체가 들썩이고, 사람들이 갑자기 놀라고 그랬어요. 그때 모신 분들이 서정주, 이기영, 서경보, 탄허 스님이었어요. 이기영 교수와 탄허 스님이 우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어요. 스님은 강당을 땅땅 울렸지요. 그 법회를 보도한 스포츠 신문이 있었어요. 그만큼 그 강좌의 인기가 폭발적이었지요. 그 뒤로는 학교에서 불교학생회를 지원했지요. 그 후로 한양대 학생들이 대불련 간부에 많이 진출했어요. 나는 대불련의 전국대의원 의장을 하였고.

-교수님과 탄허 스님의 인연이 보통이 아닙니다. 진작 이런 것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군대에 갔어요. 서울비행장(성남)에서 복무하였는데 장교이기에 오후에 시간이 많이 났지요. 그러면 개운사 대원암에 계신 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그랬어요. 그때, 화엄경이 발간되었는데 한 질에 10만 원인가 그랬지요. 그래 나는 월부로 사서, 군대 월급으로 그것을 샀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너는 돈도 없는데 조금만 내고 가져가라”고 그러셨어요. 그이후로 나는 탄허 스님의 책은 나오면 다 샀어요. 그리고 그 무렵에 내가 가면, 스님은 “아직도 만해공부 하고 있나” 하고 물어봐요. 그러면 난 “그렇습니다”고 말씀을 드리지요. 스님은 그러면 “잘 했다, 계속해라”고 격려를 해 주셨어요. 그때에 내가 스님에게 화엄경 입법계품의 53선 지식, 선재동자에 대해 묻고, 만해 스님의 사상이 화엄사상이 아닌가에 대해서 여쭈어보고 그랬어요. 내가 〈불교대전〉을 읽어 보니 화엄경에 대한 것이 제일 많이 나오더군요. 나는 스님에게서 늘 화엄경을 많이 들어서 화엄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 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스님에게 쫓아갔지요. 가서는 “스님 불교대전을 읽어 보니 화엄경이 제일 많이 인용되었는데, 이것은 만해 스님이 화엄경을 제일 좋아하였다는 것이고, 이것으로 만해사상을 화엄사상으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였지요. 그러니까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어요. 그 뒤에 내가 홍정식 교수에게도 만해사상을 화엄사상으로 볼 수 있지 않냐고 하였더니, 그 교수님도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한국불교가 화엄사상이니까 그렇게 볼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또 이기영 교수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해서, 내가 그 후에 박사논문을 〈화엄의 관점으로 본 만해사상〉으로 하게 된 것도 스님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때에 내가 스님에게 만해의 님에 대해서도 자주 물었어요. 그러면 스님은 여러 말씀을 해주었지만 나는 못 알아듣는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스님 만해 스님의 사상은 화엄사상이니, 만해의 님은 비로자나 법신불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였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어요. 하여간에 그때부터 나는 화엄경에 대한 책은 다 사서 모으고, 읽고 그랬어요.

-교수님이 보실 때에 탄허 스님의 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일제 때에는 최고의 강백으로 박한영 스님을 쳤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 그 맥이 단절됐어요. 나는 이런 측면에서 박한영 스님의 대를 이은 강백이 탄허 스님이라고 봐요. 탄허 스님도 은근히 당신께서 그런 자부심이 있지 않았나 하고 보지요. 탄허 스님이 원래 박한영 스님에게로 배우려고 가려다가 오대산에 승려수련소가 생기자, 그 수련소의 중강으로 있게 되어서 서울(개운사)로 공부하러 가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 것으로 나는 봅니다. 그때 개운사에는 청담 스님, 조종현 같은 인물들이 다 모여서 공부를 하였어요. 만약 그때에 탄허 스님이 개운사에 갔었다면 더 큰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청담 스님과 조종현이 만해스님과도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나라사랑〉에 글을 기고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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