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결사 원력, 불교중흥 동력으로 이어가자

부처님 향한 간절한 발걸음으로 
상월결사 인도순례단 43일 장정
생명존중의 공동체 정신 되짚어

룸비니 여정서 공개 ‘108원력문’
나아가야 할 ‘전법의 길’ 상기해
누구나 공감하는 서원들을 모아
불교중흥 이끄는 게 우리의 과제

부처님 탄생성지 룸비니로 나아가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 회주 자승 스님과 단원들. 
부처님 탄생성지 룸비니로 나아가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단 회주 자승 스님과 단원들. 

2023년 2월 11일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하신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시작된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의 발걸음이 벌써 3월 20일 전법의 도시 슈라바스티 기원정사에 이르러 회향의 대단원을 앞두고 있다. 

80년을 재세(在世)하신 부처님의 생애, 45년에 걸쳐 부처님이 걸으셨던 전법교화의 길을 따라 부처님의 발자국 한걸음 한걸음을 놓치지 않고 되새기려 애쓰며 좇아온 1167km의 순례 여정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부처님이 걸으셨던 길, 그 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에 ‘생명존중’의 일념으로 쌓은 공덕의 여정이 이제는 새삼스럽지 않다. 익숙해진 그 발걸음에 한마음으로 서원을 일으켜 다짐한다.

“이제 시작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전법의 첫걸음입니다.”

사실 원력의 시계는 더 일찍 시작됐다. 2019년 11월 11일, 산중한처(山中閑處)가 아닌 위례신도시 한가운데서 상월선원 동안거 천막결사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중생 곁으로 다가가기 위한 불자들의 새로운 정진이 시작되었다. 혹한의 겨울 동안 비닐천막 안에서 행해진 아홉 스님의 결사가 그 새로운 정진의 첫 불씨였다. 

2020년 10월 7일, 대구 동화사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 지친 뭇 생명들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자비순례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2021년 10월 1일, 한국불교가 잊어버리고 잊던 전법의 DNA를 되살리기 위한 삼보사찰 천리순례가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시작돼 지리산 화엄사와 법보종찰 해인사를 거쳐 불보종찰 통도사에 이르렀다. 그 동안의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부처님의 자취, 부처님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되새긴 1167km의 순례로 결실의 한마디를 이루었다. 부처님이 새기신 생명존중의 길을 가슴에 담을 수밖에 없는 그 길이다. 

그래서 시작이다. 지금이야말로 전법의 첫걸음이다. 

부처님의 발걸음은 깨달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은 중생의 고통을 올곧게 직시하고, 중생이 고통받는 원인을 올곧게 직시하고, 중생이 마땅히 안락해야 하는 존재임을 올곧게 직시하고, 그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올곧게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당위성의 자각이었다. 뭇 생명은 한 생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가 마땅히 존중받고 소중히 여겨져야만 한다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전법의 시작이었다. 

부처님을 향한 간절한 발걸음이 오늘의 인도순례였기에, 부처님의 마음이 향한 그곳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한 생명 한 생명에게로 향한 절절함이란 것이 새롭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순례를 마친 오늘의 마지막 발걸음이, 내일 고통받는 중생을 외면하지 않는 간절함의 첫걸음으로 거듭날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처음 일으켰던 본래의 서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서원이 성취되는 구체적인 발걸음을 준비할 때이다. 

한국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산적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은 전법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흔히 전법의 위기라고 하면, 출가자가 감소하고 불자가 감소하는 등의 위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위기일 뿐이다. 정말 중요한 위기는 불교가 출현하고 흥성했던 본질적인 이유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부처님의 전법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당신의 한걸음 한걸음에 일체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1800년 동안 한국불교가 면면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도 마찬가지이다.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생명존중이라는 불교의 본질을 역사의 전면에 되살려 내었기 때문이다. 

1800년 동안 한국불교는 생명존중이라는 본연의 정신을 내적으로 쌓고 외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 결과물이 불교문화이다. 문화재로 꽉 채워진 사찰이 아니라, 그 사찰에 아로새긴 부처님과 스님들의 정신이 바로 불교문화의 본질이고, 그것은 생명존중을 본연으로 하는 공동체 정신이다. 

한국불교가 지난 1800년간 축적하고 이어온 생명존중의 공동체 정신, 그것은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로 기록되고 기억되어 창고에 쌓여 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를 말하지만, 세상의 본연은 변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셨고, 한국불교의 역사 속에서 큰 스님들이 그러했듯이, 온전한 생명존중의 그 정신을 꺼내어서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이제 시작되어야 할 전법의 길은 생명존중의 전통을 역사와 문화 속에서 되짚어 내고, 사람들 사이에 펼치고, 그 사람들이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하는 길에 다름 아니다. 그 첫 번째 행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부처님의 성지를 두 발로, 온몸으로 순례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되돌아보는 큰 계기를 일깨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계기를 통해 순례단이 가졌던 서원, 보여준 서원, 순례단이 함께했던 공감대, 그것을 공유하고 확산하는 콘텐츠를 확보할 때일 것이다. 다행히도 상월결사의 천막결사와 자비순례 그리고 삼보사찰 천리순례는 일깨워서 살려내야 할 한국불교 역사 속의 콘텐츠를 이미 제안하고 있다. 콘텐츠라는 입장에서만 본다면, 이번 인도순례는 그러한 불교콘텐츠들의 정점을 확인하고 각인시킨 사건이다. 

한국불교는 살아있는 전통문화의 보물창고이고 생명존중의 길을 걸었던 인물과 역사의 보물창고이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제대로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꺼내어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경험하는 보물창고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 뭇 생명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수행자는 우리 불교 역사에 없었다. 뭇 생명의 고통을 일깨워 안락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외면했던 불자도 우리 불교 역사에는 없었다. 그러한 수행자, 그러한 불자들이 1800년 동안 만들어온 생명존중의 보물창고가 바로 우리 불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의 콘텐츠들이다. 이제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를 현대화하고 쉽게 활용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대응방안이 필요할 때이다.

자비순례부터 삼보사찰 천리순례를 거쳐 인도순례에 이르는 상월결사의 순례길은 그러한 콘텐츠를 순례하고, 새롭게 되살리는 모색의 길이었다. 한국불교 중흥을 향한 미래 모색의 순례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 발걸음이 오늘 힘들어하고 있는 생명들을 위해 무엇을 제공하고 어떻게 함께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옮겨가야 할 때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의 모색을 쉽게 하고 정형화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역사문화콘텐츠들이다. 

이미 종단과 동국대학교를 비롯하여 개별사찰에 이르기까지 상월결사 정신에 부응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마련하여 불교중흥의 미래를 위한 행보에 동참하는 곳들이 적지 않다. 불씨가 불길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신행과 수행이 문화가 되고, 문화가 축적되어 불교 중흥의 역사로 이어질 것이다.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순례 34일차인 3월 14일 부처님의 탄신지인 룸비니에 도착해서 상월결사의 원력과 전법의지를 담은 ‘상월결사 108원력문’에 맞춰 108배를 했다고 한다. 108참회가 아니라 108원력이다. 참회가 아니라, 이제는 원력을 담아 전법과 중흥의 길에 오롯이 서겠다는 다짐을 담았다고 한다. ‘상월결사 108원력문’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부처님, 온 세상의 마음에 계시는 부처님, 저희를 존엄한 생명으로 받아주셨으니, 오늘도 신심과 원력을 세워 생명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절을 올립니다.”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마땅히 안락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신 곳에서, 생명과 세상의 평화를 원력으로 새롭게 세운 것이다. 삼귀의로 시작해서 전법의 다짐으로 마치는 108원력문에서 유독 눈에 뜨이는 한 구절이 있다. 바로 107번째 원력문이다.

“불법 만난 인연, 모든 생명을 축원하며 보답하겠습니다.”

당연한 한마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연해야 할 그 당연함이 성취되지 않았기에, 당연해야 할 그 당연함에 동참하지 못했기에, 우리 한국불교가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한국불교가 1800년 동안 축적해온 역사와 문화의 콘텐츠들은 그 당연해야 할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정형화된 결과물들이다. 

‘상월결사 108원력문’은 그 정형화된 역사와 문화의 결과물을 가장 쉽게, 누구나 알 수 있는 형태로 축약한 새로운 콘텐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이끄는 이가 있고, 따라가며 동참하는 이들이 있고, 고개를 들고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 중흥의 원력은 먼 것으로만 보이지만, 1167km를 단숨에 한걸음으로 걸은 것이 아니듯이, 중흥에 도달하는 길 역시 수백만의 걸음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그것이 한 사람의 수백만 걸음이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수백만 명의 한 걸음이 모인 것일 수도 있다. 당연히 한 사람이 수백만 걸음을 걷는 것보다, 수백만이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더 쉽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꼭 필요하다. 수백만이 동참하여 한 걸음을 함께 내딛을 수 있는 구체화되고, 누구나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형태의 서원이. 그리고 그런 서원의 결과가 하나 둘 모여 불교중흥의 서원을 결과로 성취해낼 것이다. 따라서 더 구체적이고 더 쉽게 동참할 수 있도록 서원을 세우고 원력들을 모으는 작업, 그것이 인도순례 이후 우리 불교에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석길암 동국대 WISE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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