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도 끝도 ‘전법’…붓다의 길을 되새기다

1167km, 43일. 상월결사 인도순례단(회주 자승)은 부처님이 태어나 정각을 이루고, 전법하고, 완전한 열반에 이룬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한 때 70명이 치료받을 정도로 엄중한 상황도 있었지만, 순례단은 오로지 신심과 원력으로 나아갔다.  

 2월9~22일 깨달음에 이르는 길

시작은 ‘전법’이었다. 2월 9일 서울 종로 조계사에서 고불식을 마친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은 인도로 날아가 초전법륜성지 사르나트로 향했다. 부처님 성지 중 전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사르나트를 시작점으로 잡은 것은 상월결사 인도순례의 목적이 ‘전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순례단은 2월 11일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순례 입재식을 봉행했다. 이날 입재식에서는 ‘상월결사 인도순례 전도선언’이 발표됐다. 회주 자승 스님이 직접 낭독한 전도선언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수행자들이여, 인간의 이익과 번영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 둘이 가지 말고 홀로 가라. 처음도 아름답고 중간도 아름답고 마지막도 아름다우며 말과 내용을 갖춘 가르침을 설하라.”

21세기 전도선언 이후 순례단은 1167km의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여정은 전도 이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부다가야로 향했다. 사르나트에서 부다가야까지는 297km. 순례단은 새벽 3시면 기상해 평균 26~27km를 매일 행선했으며, 저녁예불을 하고 개인 수행을 진행했다. 매 순간이 수행이 아닌 적이 없었다. 

순례 시작 13일차인 2월 21일 순례단은 부처님 정각성지인 부다가야에 도착했다. 부다가야에는 순례단의 원만회향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불자 100여 명이 찾아 순례단을 환영했다. 2월 22일 부다가야 마하보디대탑에서는 세계평화기원법회가 봉행됐다. 법회에 앞서 순례단은 삭발과 목욕재개로 몸과 마음을 정돈했다. 무명초를 제한 스님들의 모습에서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이날 순례단은 불교중흥의 서원을 담은 발원문을 발표했다. 대중은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순례공덕이 있다면 한국불교의 새로운 변화의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전법교화에 들뜨도록 용기와 기회를 주시고, 모두에게 평화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다가야에서 불보살님의 가피를 발원합니다”라고 부처님께 발원을 올렸다. 

 2월 23~26일 설법과 구법의 길

부다가야를 출발한 순례단은 위대한 법왕(法王)의 도시 라지기르로 향했다. 부다가야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 카사파 형제를 비롯한 1000명의 비구와 함께 마다가국으로 향했던 그 길을 순례단도 걸었다. 

순례단은 2월 25일 불법이 융성하게 일어난 마가다국 수도 라지기르에 도착해 영축산에 올랐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신 그곳에서 순례단은 〈법화경〉을 봉독했다. 

“단지 방편으로 갖가지 길을 보여주었을 뿐이니, 불자가 자기에 맞는 도를 행한다면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 대중을 위해 이 법화의 가르침을 두루 설해야 하느니라.”

이날 영축산 향실에서 행선을 회향한 순례단은 죽림정사를 보시하는 등 불교를 후원한 빔비사라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갖히고도 영축산을 바라보던 터를 둘러보고 죽림정사로 향했다.

죽림정사에서 사리풋다와 마하목갈라나, 마하카샤파 등 뛰어난 제자들이 귀의했고 계율이 제정됐다. 그 불제자들의 가르침도 새기며 회주 자승 스님을 비롯한 순례단은 고개를 숙인채 조용히 묵언 속에서 정진을 이어갔다.

2월 26일에는 수많은 구법승이 오롯이 부처님 법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향했던 날란다 대학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회주 자승 스님을 필두로 한 순례단은 현재 불교전문대학으로 위상을 가진 나바 날란다대학에서 아침공양을 받기도 했다. 

 2월 27~3월 9일 열반에 이르는 길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신 뒤 부처님은 열반을 위한 여정을 이어갔다. 순례단의 발걸음도 완전한 열반을 위해 길을 나서신 부처님의 궤적을 좇았다. 

열반로드 첫 번째 도착지는 바이샬리였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마지막 안거를 보내시고, 대중에게 ‘3개월 후 열반에 들리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는 계정혜 삼학을 닦을 것을 당부하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설하셨다.

3월 1일 순례단은 바이샬리에 도착했다. 바이샬리 회향지에 부처님전에 올린 발원문은 순례단의 서원을 담아냈다. 

“불법의 중흥은 세상을 이익되게 함에 있고, 우리 모두의 이타 실천행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여지이다. 온 세상이 투쟁과 갈등, 다툼가 불화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발원합니다.”

또한 순례단은 역병을 정화하신 부처님에 감화한 이들이 보시한 대림정사터를 참배했다. 여성출가의 상징이며, 아난존자 스투파와 아소카왕 석주 등도 함께 있는 이곳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의 소회를 듣는 자리도 마련됐다.

순례 28일차인 3월 8일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순례단은 다음날인 3월 9일 부처님 열반당에서 법회를 봉행했다. 부처님 발자취를 따라 인도순례길에 오른지 29일차, 누적거리 총 689km, 인도 현지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순례단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환희로움으로 가득 찼다.

이날 법회는 부처님께 그 마음을 담은 가사를 올리는 열반당 참배로 시작됐다. 자승 스님은 직접 ‘한국불교 중흥발원’을 쓴 금란가사를 부처님 열반상에 공양 올렸다.

정근 후 열반당 앞으로 자리를 옮긴 순례단은 부처님께서 남기신 유훈을 함께 낭독하며 부처님께 불교중흥의 대장정을 다시 시작함을 고했다.

순례단은 발원문을 통해 “부처님의 인간적인, 부모님 같은 유훈을 가슴깊이 새긴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온 순례단과 불자들은 먼 곳에 있더라도 부처님과 함께 심장 뛰기를 발원한다”며 “이 순례공덕으로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돌보는 전환점이 되길 발원한다. 수행하고, 봉사하며, 생활불교, 자립불교, 세상에 이익을 주는 한국불교가 되길 발원한다”고 다짐했다.

 3월 10~14일부처님이 나투신 이유

부처님 열반성지를 떠나 순례단이 나아간 곳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룸비니다. 수많은 경전에서는 부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부처로 태어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도솔천에 머물다 마야 부인의 몸을 통해 지상에 왔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텐데 왜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위에서 태어났을까.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순례단은 네팔의 룸비니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순례 34일차인 3월 14일, 순례단은 네팔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에서 불교중흥 기원법회를 봉행했다. 이 자리에서 순례단은 다시 한번 생명존중과 평등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3월 15~23일 다시 전법의 길로

룸비니 법회 이후 자승 스님 룸비니 대성석가사에서 이 같이 법문을 내렸다. “국민 속으로, 대중 속으로, 사회 속으로, 중생 속으로 사부대중이 떠나지 않으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다. 사부대중이여 떠나라.”

순례를 처음 시작했던 초전법륜지에서 21세기 전도선언의 구체적 방향성이 이 법문에 담겼다. 불교중흥의 원력을 담아 전법의 길로 나서라는 스님의 가르침이자 당부다. 순례단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바로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다. 수닷타 장자와 제타 태자의 보시로 건립된 기원정사. 이곳에서 부처님은 25년 가까이 안거하며 900번 이상 법을 설하셨다. 가히 전법의 도시라고 할 만하다. 

쉬라바스티 기원정사 향실 옆 광장에서 순례단은 인도순례를 마무리하는 회향식을 3월 20일 봉행했다. 공식적 회향은 3월 23일 오후 1시 서울 조계사에서 봉행되는 회향이지만, 순례단은 전법의 도시 쉬라바스티 기원정사에서 전법의 의지를 되새기며 순례를 마무리했다. 

간화선의 수행 경지를 표현하는 ‘심우도’의 마지막은 ‘입전수수(入廛垂手)’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 제도에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전법’을 통한 ‘중생 제도’는 곧 부처님이 세상에 나투신 뜻이자 정언 명령이다. 순례의 끝에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길 것은 전법의 원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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