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들짝 놀란 벚꽃이 와르르 깨어나 4월의 빛을 거리에 흩뿌린다. 오종종한 개나리꽃이 반짝반짝 노란별이 되어 담장 밑을 밝힌다. 중량감을 어찌할 수 없는 목련꽃은 주먹만한 하얀 등불을 처마 위 높이 걸어둔다. 젊은이들은 무거운 코트를 벗어던지고 밝고 경쾌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봄, 봄, 봄이 넘쳐흐르고 있다. ‘사시장춘(四時長春)’이라는 말이 그냥 생겨났을 리 없다. 봄같이 좋은 때가 어디 있으랴. 겨울을 뚫고 꽃들이 활짝 피어난 자연의 봄, 싱싱한 젊음이 들끓는 인생의 봄, 이보다 좋은 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봄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봄이 오나 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 속에는 이미 봄기운이 스며들었다. 황구지천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오리 떼들의 날갯짓이 경쾌하다. 재잘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늘어선 벚꽃나무들도 함빡 꽃을 터뜨리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오후에는 황구지천의 벚꽃 길을 걷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시골에서 벚꽃 길 근처에 사는 호사를 매일 누리는 것이다. 중풍으로 반신을 잃은 할머니가 절뚝절뚝 홀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노부부가 웬만큼 궂은
갑진년(甲辰年) 구정도 지나고 본격적으로 청룡(靑龍)의 해에 들어섰다. 용은 12지(十二支)의 동물 가운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로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비늘은 잉어,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한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용을 마귀의 상징으로 언급하지만 동양에서는 상서로운 동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용을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 임금이 입는 옷은 곤룡포(茂龍袍), 임금이 앉는 의자는 용상(龍牀)이라 하여 왕권을 상징했다. 사찰에서도 용은 불법을 수호하거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반야용선(
갑진년(甲辰年) 새해다. 2024년 새해는 2023년의 끝에서 솟아 오른 찰나, 오늘은 어제의 끄트머리에서 터져 나온 찰나다. 찰나란 무엇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어느 대학을 갈 것인지, 어느 직장을 다닐 것인지, 어떤 남자와 결혼할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이 찰나다. 이 찰나의 결정이 평생을 좌우한다. 병든 연인을 위해 자신의 귀한 장기를 떼어주고, 극한 상황에서는 자식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찰나란 무서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찰나의 행동으로 인하여 한 생명이 살아날 수도, 거품처럼 사그라질 수도 있다. 한순간 잘못 생
2023년이 저물어 간다. 사람들은 한 해가 덧없이 흘러갔다고 회한에 빠지면서 새해에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내년에도 농부는 밭에서 농사를 짓고, 상인은 가게에 나가 장사를 하고, 선생님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하루하루 시간에 쫓겨 그냥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당나라 때 목주 도명(睦州 道明 780~877) 선사는 젊은 운문(雲門)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자 찾아올 때마다 “이르고 일러라”라고 소리치며, 대답을 못하는 운문을 한 손으로 밀어버리고 토굴로 들어갔다. 운문 스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목주 선사의 토굴
설악산 소공원에 들어서자 왼쪽으로 세존봉(世尊峰)을 올려다보았다. 줄지어 늘어선 봉우리들 사이로 우뚝 솟은 세존봉이 빛나고 있었다. 눈부신 오라가 중력에 짓눌린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설악산 많은 봉우리 가운데서 유독 세존봉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해마다 가을이면 설악산을 찾아 세존봉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이가 발목을 잡아 그 험한 바윗길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단풍이 지고 관광객이 뜸한 쓸쓸한 계절에, 그나마 먼발치에서 세존봉을 우러러볼 뿐이다. 세존봉 건너 달마봉(達磨峰)에게 합장한 후
바람이 분다. 가을빛을 실은 나뭇잎들이 폭설처럼 쏟아져 내린다. 헐거워진 나뭇가지 사이로 빛마저 부서져 흩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른 바람의 기척에도 나무는 서둘러 단풍잎을 떨쳐낸다. 단풍잎이 떨어진 바닥에는 손바닥 우주가 태어나고 있다. 〈벽암록〉 27장,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물었다.“나뭇가지가 마르고 잎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樹凋葉落時如何)?”“가을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體露金風).”운문 스님은 무엇이 완전히 드러났다고 대답했을까? 혹시, 누군가 욕심, 성냄, 어리석음 같은 오욕의 잎들이 다 떨어져 본체
어찌하여 뜨거운 햇살은 화살처럼 나의 온몸으로 날아와 박히는가. 화살이 꽂힌 자리마다 불붙은 아픔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삶과 죽음에 관한 해답을 찾지 못한 고뇌가 얼마나 깊었으면 찔린 자국마다 진물이 흐르고, 정신이 영글지 못한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내려앉은 딱지마다 고름이 배어 나오는가. 그러다가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면 집을 떠나고 싶어진다. 높은 산을 올라 유유히 떠도는 흰 구름에게 햇살로 쏘인 상흔을 펼쳐 보이고 싶다. 아니면 깊은 산속 암자에 숨어들어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고 싶다. 출가(出家)하고 싶다는 뜻이다. 티베트
무더운 삼복이 여름 가운데 놓여있는 절기다. 초복 중복을 지난 더위가 밤까지 계속되더니 말복이 지나도 꺾이질 않는다. 하기야 이런 더위가 없으면 곡식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봄에 새싹이 태어나 꽃을 피우고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견뎌야 한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장마가 길고 물 폭탄이 쏟아져 햇볕이 더 뜨겁게 내리쬐는지도 모른다. 모든 풀이 꽃을 피우고 모든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이다. 세상에 꽃피우지 못할 식물과 열매 맺지 못할 나무가 어디 있으랴. 모두 삼복의 더위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사
연꽃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7월이다. 만물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 연꽃이 함초롬히 피어나면 새들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벌들은 간밤에 젖었던 날개를 말리느라 붕붕거린다. 대기는 한층 싱그러워지고, 세상은 바야흐로 순수해진다. 진흙탕 속에서 맑고 깨끗하게 피어나는 꽃, 흙탕물이 꽃잎에 묻지 않는 꽃,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런 연꽃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다. 특히 송대 도학(道學)의 문을 연 주돈이(周敦?)의 연꽃 사랑은 각별했다. 그는 〈애련설(愛蓮設)〉에서 “나 홀로 연꽃을 사랑하나니, 진흙탕에서 피어났으나 오염되지 않고, 맑은 물결에
6월에는 햇빛이 갓 열린 포도송이마다 매섭게 침을 쏘아댄다. 그리스 산토리니 섬에서 만난 포도나무들은 그 난폭한 빛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해안 절벽에 뿌리내린 것도 아슬아슬한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맹렬하게 쏟아붓는 햇빛을 어찌 견딜 것인가. 그만 앉은뱅이가 된 포도나무. 하지만 해가 진 후 카페에서 마시는 포도주 맛이란.시인들은 포도주를 식물의 피라고 노래한다. 포도주는 포도나무의 붉은 피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우리 몸속을 흐르는 피를 동물성 포도주라고 했다. 포도주가 다른 식물로 만든 술보다 인간의 체질에
온갖 꽃과 나무들이 함성을 터뜨리는 5월이다. 야구장 담장 너머로도 환호 소리가 터져 나온다. 누구나 아름다운 계절에는 집 밖으로 나와 그동안 움츠러들었던 몸을 펴고 기지개를 활짝 켜는 것인지. 야구장 스탠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탄성과 환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 야구는 10명으로 이뤄진 두 팀이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승패를 겨루는 구기 경기이다. 공격하는 쪽은 상대편 투수가 던진 공을 방망이로 치고 경기장 내의 특정 지점을 돌아 홈으로 돌아오면 점수를 얻는다. 투수가 시속 140km에 달하는 속도로 던지는 공은 공포를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