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최주현
그림=최주현

바람이 분다. 가을빛을 실은 나뭇잎들이 폭설처럼 쏟아져 내린다. 헐거워진 나뭇가지 사이로 빛마저 부서져 흩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른 바람의 기척에도 나무는 서둘러 단풍잎을 떨쳐낸다. 단풍잎이 떨어진 바닥에는 손바닥 우주가 태어나고 있다. 

〈벽암록〉 27장,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물었다.
“나뭇가지가 마르고 잎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樹凋葉落時如何)?”
“가을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體露金風).”


운문 스님은 무엇이 완전히 드러났다고 대답했을까? 혹시, 누군가 욕심, 성냄, 어리석음 같은 오욕의 잎들이 다 떨어져 본체(本體)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말할지 모른다. 본체를 탐진치(貪瞋癡)와 같은 나뭇잎 뒤에 숨어 있는 어떤 실체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말씀은 본체란 가을바람에 나무가 마르고, 잎이 부서지고 떨어지는,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라 한다. 본체란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하여 드러나는 그 상태를 일컫는다. 

가을바람에 나무가 마르고 잎이 질 때 드러나는 본체는 무상(無常)이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잎이 돋아날 때 드러나는 본체 역시 무상이다. 무상이란 고정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여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금풍에 지는 잎도 무상이요, 봄바람에 피는 꽃도 무상이다. 

우리는 예쁜 꽃이 피어나는 봄철에는 무상함을 느끼지 않고, 무성한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는 계절에 문득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생성에서 소멸로 접어들 때 무상함에 눈을 돌리게 된다. 아름답고 패기 넘치는 젊은 시절이 영원하면 좋으련만 늙어 기력이 쇠잔해져 죽음이 가까워지면 삶이 허무하다고 한탄한다. 허무감이 인생무상을 안겨준다.  

내가 마주하는 세계는 무상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서 불변의 실체를 찾아 나선다. 세상이 덧없어, 변치 않는 영원성의 세계를 피안에서 찾는 것이 서양철학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바로 눈앞에 드러나는 만물은 시시때때로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우리 몸의 세포도 매일매일 생멸하며 바꿔가고 있지 않은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나는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을 맞으며 가을 숲을 걷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노랗게 물든 온 천지가 진여(眞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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