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圓相’ 진리로 세상을 일깨우다

당나라 선종 5가 중 하나 위앙종
위산·앙산 중심… 가장 먼저 흥기
위앙종 종풍은 일원상·여여불 사상
앙산, 제자들 근기마다 방편 법문
맥 끊겼다가 근대 와서 다시 부활

중국 호남성 영향 밀인사에 있는 위앙종의 개조 위산 영우 선사 사리탑

중국선의 르네상스는 당나라 시대에 형성된 선종의 분파인 5가이다. 물론 5가 이전부터 선이 발달하기 시작했지만, 5가가 형성됨으로서 중국선이 완성됨이요, 조사선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5가 가운데 가장 먼저 흥기한 종파가 위앙종(쓳仰宗)이다. 법맥은 혜능-회양-마조-백장-황벽-위산-앙산이다. 스승 위산과 제자 앙산의 선사상을 말하는데, 위산의 ‘위(쓳)’자와 앙산의 ‘앙(仰)’자를 따서 ‘위앙종’이라고 한다.

위산 영우 선사는  
위산 영우(山靈祐, 771~853)는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장계(長谿) 출신으로, 속성은 조 씨다. 위산은 15세에 고향 건선사(建善寺)에 출가해 대소승 계율과 경전을 배웠다. 구족계를 수지한 뒤, 경전 공부에 전념했다. 나이 23세 무렵,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극하기는 하지만, 내가 의지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며, 선을 하기 위해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 문하에 들어갔다.

위산은 스승 문하에서 수행하다가 장사(長沙)로 가던 도중 대위산 동경사(同慶寺)에 머물러 법을 펼쳤다. 이런지 얼마 안되어 당 무종의 ‘회창파불(會昌廢佛, 845)’이 일어났다. 위산은 잠시 난을 피해 재가자로 살다가 난이 끝날 무렵, 재상 배휴(裵休, 797~870)의 도움으로 다시 선풍을 펼쳤다. 위산이 동경사에서 법을 펼친 이후, 그의 문하에 1500여명의 제자들이 머물렀다.

이곳에서 40여 년간 법을 펼친 위산은 853년 세납 83세로 열반에 들었다. 선사가 열반하는 날 종일토록 산의 물이 마르고 짐승과 새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시호는 대원(大圓), 탑명은 정혜(淨慧)이다. 저서에는 ‘담주위산어록(潭州쓳山語錄)’·‘위산대원선사경책문(쓳山大圓禪師警策文)’이 있다.  

‘경책문’에는 위산이 후학들에게 경책하는 구구절절한 말이 담겨 있는데, ‘경책문’은 〈사십이장경〉·〈유교경〉과 함께 ‘불조삼경(佛祖三經)’ 가운데 하나이다. ‘경책문’은 학인들이 처음 공부하는 〈치문〉에 수록되어 있는데, 수행자들이 늘 곁에 두고 경책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위산은 당시 나태해 있는 수행자들을 위해 경책하기 위해 지은 글인데, 한 구절만 살펴보자. 

“비록 4대로 이 몸이 지탱되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지니, 덧없는 생노병사가 예고 없이 다가와 아침에 살았다가도 저녁에 죽어서 찰나에 다른 세상이다. 마치 봄 서리나 새벽이슬 같아서 잠깐 사이에 사라지며 벼랑 위의 나무나 우물 속의 넝쿨과도 같은데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오.”

앙산 혜적 및 위앙종 선사들
앙산 혜적(仰山慧寂, 807~883)은 광동성(廣東省) 소관(韶關) 사람으로, 성은 엽(葉) 씨이다. 그는 15세에 출가하려 했지만, 부모의 승낙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두 줄기의 흰빛이 조계로부터 솟아 앙산의 집에 비추자, 부모가 출가를 허락했다고 한다.

앙산은 17세 때 소주 남화사(南華寺) 통선사(通禪師)에게 출가한 뒤 사미 신분으로 여러 곳을 다녔다. 18세 무렵 탐원 응진(耽源應眞, 남양 혜충의 제자)의 문하에 들어가 탐원으로부터 일원상(一圓相)의 도리로 깨달음을 얻은 뒤, 여러 지역을 이력하며 수행했다. 이후 앙산은 위산의 문하에 입실해 15년간 가르침을 받았다. 즉 앙산은 탐원에게서 일원상으로 1차 깨달음을 얻고, 위산 문하에서 크게 깨달은 뒤에 위산의 법을 받았다.

이후 앙산은 복건성 소관·광주 등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다 842년 강서성(江西省) 의춘(宜春)에 서은사(栖隱寺)를 창건하고 개당설법하였다. 당시 이 사찰에서는 향엄 지한(香嚴智閑, ?~898)·석상 초원(石霜楚圓, 986~1039)·불인 요원(佛印了元, 1032~1098) 등이 머물렀고 승려가 많을 때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말년 10년을 광동성 소관의 동평산(東平山)에 머물다 그곳에서 77세로 입적했다. 후에 강서성 의춘 서은사로 사리탑을 옮겨왔다. 시호는 지통(智通), 탑명은 대통(大通)이다.  

앙산은 선종사에서 위산의 수제자로 알려졌지만, 6조 혜능의 법을 이은 ‘7조’라고 추앙받았으며 ‘소석가(小釋迦)’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앙산은 6조 혜능을 흠모했고, 그의 사상으로 공부했으며, 제자들에게도 조계의 심지(心地)로 지도했기 때문이다. 한편 앙산의 법력이 선종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위앙종은 스승 위산이 개산했지만, 세상에 드러나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앙산부터이다. 

위앙종에는 앙산 이외에도 훌륭한 제자가 많은데, 영운 지근(靈雲志勤, ?~866)·서원 대안(西院大安, 793~883)·향엄 지한 등이다. 향엄은 마당을 쓸다가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딱!’하고 부딪치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었고, 영운은 복숭아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깨달아 선종사에서 두 선사의 기연이 회자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원 대안은 원래 백장의 제자였는데, 백장이 입적한 뒤, 사형인 위산에게 옮겨가 위산의 법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위산에 머무르기 30년, 위산 스님의 밥을 먹고 위산 선사의 대변을 보았지만 위산의 선만은 배우지 않았다’라고 할만큼 자신의 선풍이 뚜렷한 인물이다.     

강서성 의춘 서은사에 있는 앙산 혜적 선사 사리탑

위앙종의 종풍
위앙종의 종풍은 일원상과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자각하는 여여불(如如佛) 사상이다. 위산이 23세에 백장을 찾아가니, 백장은 위산의 입실을 허락했다. 어느 날 백장이 위산에게 말했다. 

“화로에 불씨가 있는지 헤쳐 보아라.”
위산이 화로 안을 뒤적이면서 “불씨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백장이 다시 화로를 뒤적이며 조그만 불씨를 찾아내어 영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이 불씨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 때 순간 위산이 깨달은 뒤, 백장선사에게 절을 하고 자기의 견해를 펴니 백장이 말했다. 
“그것은 잠시 나타난 갈림길일 뿐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시절인연(時節因緣)을 잘 관찰하라’고 하였다. - 〈경덕전등록〉 

백장이 제자인 위산에게 불성이 구족되어 있음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화로에서 불씨를 직접 찾게 하는 방편을 쓰고 있다. 여기서 불씨는 부처가 될 성품인 불성을 말한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은 〈열반경〉에 나오는데, 모든 중생은 자신이 부처가 될 성품(佛性)을 깨닫는 결정적인 때(시기)가 오게 되어 인연과 합하는 것을 말한다.

‘여여불’이라는 말은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의식이 없어지고, 있는 그대로의 진상이 원래 그대로 드러난 둘이 아닌 경계를 말한다. 한편 부처나 깨달음 그 자체도 문제 삼지 않고, 시절인연을 자각하고 일상생활에 철저한 평상(平常)의 무사(無事)한 사람을 가리킨다. 곧 위앙종의 사상은 시절인연을 자각하는 주체인 불성이 여여불임을 강조한다. 

다음 일원상에 대해 살펴보자. 일원상(一圓相)은 위앙종의 여여불 사상 이상으로 중요한 종지이다. 앙산은 수년간 수행 끝에 일원상으로 법을 나투는 묘리를 터득하였다. 〈인천안목〉에 의하면, 탐원은 남양 혜충의 제자인데, 앙산은 탐원으로부터 일원상의 진리를 받았다.

원상(○)이란 본래 완전무결하고 위대한 작용을 하는 우주의 모습을 둥근 원으로 표현한 것이다. 삼조 승찬의 〈신심명〉에서는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圓同太虛 無欠無餘)”라고 표현하고 있다. 위앙종은 수행자를 가르칠 때 원상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원상에 관련된 문답이 자주 나온다. 앙산이 일원상을 사용하여 제자들을 제접한 여러 예가 있다.

어떤 승려가 와서 앙산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앙산은 손으로 원상을 그려 보이고 그 원상 안에다 ‘불(佛)’ 자를 써서 보였다.
또 한번은 앙산이 눈을 감고 앉아 있는데, 어떤 승려가 걸어와서 앙산 곁에 앉았다. 그러자 앙산은 문을 열고 땅 위에다 원상을 그리고 그 원상 안에다 ‘수(水)’ 자를 쓰고 그 승려에게 돌아보며 보였다.-〈조당집〉 

앙산은 입적하는 순간에도 몸으로 원상을 그려 진여의 이치를 나타내었다. 위앙종에서는 체용(體用)을 밝히어 원상(○)을 그려서 사람에게 보이며 법의 체용을 나타내어 그것을 깨닫고 닦아 들어오게 하는 묘한 방편을 삼았다. 즉 일원상이 깨달음이나 불성의 상징으로서 조사선에 채용되어 스승이 제자를 깨우치는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원상은 진실하고 절대 진리, 불심(佛心)·불성·진여 등을 상징한다. 당나라 말기, 각 5가에 대한 평가가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는데, 위앙종에 대해서는 일원상을 종풍으로 언급하고 있다.

앙산은 “석두(石頭, 700~791)화상이 순수하게 금만을 파는 진금포(眞金鋪)라면 나 앙산은 잡화포(雜貨鋪)이다”라면서 자신의 방편법문을 ‘잡화포’에 비유하였다. 어떤 물건이든 다 파는 ‘잡화포’라는 말은 제자들의 근기에 맞추어 제도해줌을 자임하면서, 석두를 비판하는 면이 담겨있다.

위앙종은 앙산 이후 몇 대만이 전하다 법맥이 끊겼으나 근대의 허운(虛雲, 1840~1959) 스님이 위앙종의 선지를 살려 위앙종의 법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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