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정토 꿈꾼 무애자재 재가 선지식

황제는 얼굴 가린 채, 그녀를 구하지 못하여
머리 돌려 피눈물을 비 오듯 흘리네.

황제의 마음은 자나 깨나 귀비를 그리는 정으로 가득 찼네.
행궁에서 달을 보니 절절이 마음이 아려오고
밤비 속에 들려오는 말방울 소리 황제의 애간장을 끊게 하네.

연꽃은 귀비의 얼굴 같고 버들은 그녀의 눈썹 같았으니
이들을 바라봄에 어찌 눈물 흘리지 않으리.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비에 오동잎 떨어질 때면, 그리움 더욱 사무치네.

위의 시는 백낙천(白樂天, 772~846)이 쓴 ‘장한가(長恨歌)’의 일부분이다. ‘장한가’는 806년에 지은 120행의 긴 서사시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다룬 시다. 안록산의 난(755년)으로 현종이 사천성으로 피난 가는 도중, 나라를 망친 원인이 양귀비 때문이라는 신하들의 빗발친 상소로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죽음을 내린다. 백낙천은 두 사람의 지극한 사랑과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시로 묘사했는데, 감히 백낙천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뛰어난 작품이다.   

당나라 4대 시인 중 한 명
쉬운 언어로 날카로운 풍자

모친·딸 잃고 불교에 귀의해
벼슬 물러난 뒤 향산사 기거
여민 선사와 ‘九老社’ 결성해
승속 넘어 수행·신행에 매진

중국 사천성 두부초당에 조성된 백낙천의 동상.

시의 귀재, 백낙천은 어떤 인물인가? 백낙천은 그의 자(字)이고, 본래 이름은 백거이(白居易)이다. 중국 문학사와 불교사에서는 ‘백낙천’으로 불린다. 낙천은 이백·두보·한유와 함께 당나라 4대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송(唐宋) 600년 역사에서 8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일 정도로 그의 시세계는 독보적이다.

낙천의 시세계는 통속적인 언어 구사와 풍자에 뛰어나며, 평이하고 유려한 시풍으로도 알려져 있다. 낙천은 시를 쓰면, 글을 모르는 할머니에게 읽어주어 이해되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한편 불교적으로는 자유를 희구하는 정신을 드러내면서 불교의 정토세계와 노장사상이 담겨 있다.

낙천은 산서성(山西省) 태원 출신으로 당나라 덕종 때(798년) 진사에 합격해 관직에 몸담았다. 그는 40세 무렵, 모친과 어린 딸을 잃은 후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낙천이 불교에 귀의한 후 선에 관심을 가지면서 많은 선사들과 교류가 있었다. 선종법맥도에도 마조의 제자인 흥선 유관(興善惟寬, 755~817)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곧 낙천은 마조도일의 문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낙천과 선사들과의 몇가지 일화를 통해 그의 불교관과 선경(禪境)을 보자. 

낙천이 활동하던 시기인 8~11세기는 선이 활발하던 시기로, 문인들과 유학자들이 선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선의 흐름이 전체적으로 자유를 강조하는 측면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시와 문학 속에 자유를 테제로 하는 선이 대중화되었다. 당대는 중국문화의 전성기로서 특히 당시(唐詩)는 중국문학사상 최고 수준이다.

중세 동양의 봉건적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의 존재,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중국선 특유의 압도적인 인간신뢰 정신에 관심을 둔 시인으로 왕유(王維)·두보(杜甫)·백낙천·이하(李賀) 등이다. 여기에 낙천도 포함된다. 낙천은 당시 시인들 가운데 불교관과 선관이 매우 뚜렷이 나타나 있다. 

젊은 시절, 백낙천은 강직한 성품으로 좌천되는 일이 많았는데 자연스럽게 지방의 여러 선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한번은 항주 자사(刺史)로 있을 때, 그 지방의 고승 조과 도림(鳥洲道林, 741~824, 우두종의 경산 법흠 제자)의 사찰을 방문하였다. 도림은 새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나무 위에서 좌선을 한다고 하여 ‘조과(鳥洲)’라고 하였다.

낙천이 선사에게 말했다. “스님, 제가 평생에 좌우명 삼을 만한 법문을 듣고자 왔습니다.”
“모든 악한 행동을 짓지 말고 많은 선한 일만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그거야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닙니까?”
“삼척동자도 알기는 쉬워도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것일세.”

이 사구게는 〈법구경〉뿐만 수많은 여러 대승경전에 언급되어 있다. 이 게송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해 여섯 분의 과거 부처님께서 공통으로 훈계하는 가르침이라고 하여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전등록〉 〈오등회원〉 〈지월록〉 등에 실려 있다.  

백낙천이 강주사마 시절에 그 지역에 살던, 마조의 제자 귀종 지상(歸宗智常, 생몰미상)을 찾아갔다. 마침 선사는 흙을 이겨 벽을 바르고 있었다.
작업 도중 선사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대는 선비인 것 같은데, 군자인가, 소인인가?”
백낙천은 겸연쩍은 듯 “저는 군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라고 답했다.
선사가 흙손으로 흙 판을 두드리자, 백낙천은 얼른 흙을 떠서 선사의 흙 판에 올려주었다. 선사는 흙을 받고 말했다. “그대가 그 유명한 백낙천인가?”
“그렇습니다”라고 말한 백낙천에게 선사는 한 마디 했다. “겨우 흙이나 떠 주는 사람이군.”

다음은 백낙천에게 법을 전한 스승인 흥선 유관(755~817)과의 대화이다.

낙천이 유관에게 물었다. “마음이 이미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마음을 닦습니까?”
“마음은 본래 손상이 없거늘 어떻게 닦을 필요가 있겠는가? 더럽고 깨끗한 것을 논하지 말고, 일체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더러운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깨끗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옳지 않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눈동자에 아무 것도 넣을 수가 없다. 금가루가 비록 진귀한 보물이지만 눈동자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
“수행도 없고 생각도 없으면, 범부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범부는 밝음이 없고, 성문과 연각은 집착을 한다. 이 두 가지 병을 여의는 것, 이것이 참다운 수행이다. 참다운 수행이란 부지런해도 아니 되지만, 잊어버리고 있어도 않된다. 부지런하면 집착에 가깝고, 잊어버리고 있으면 무명에 떨어진다. 이것이 마음의 요긴한 점이다.”

조사선에서는 선과 악에 있어 그 어떤 것에도 마음 두지 말라고 한다. 곧 선과 악이 일어나기 이전 본성에 입각해야 함이요, 본래성불되어 있으므로 굳이 수행을 가자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남 향산사 옆에 위치한 백낙천의 묘.

백낙천은 만년에 벼슬자리를 내놓고 하남성(河南省) 낙양에 위치한 향산사(香山寺)에 머물렀다. 향산사는 용문석굴과 이하(伊河)를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즉 중국의 3대 석굴중 하나인 용문석굴은 이하를 중심으로 서산(西山)과 동산(東山) 석굴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용문석굴은 서산이 중심이고, 이하의 다리를 건너 동산 석굴이 이어져 있는 가운데 향산사가 위치한다.  

낙천은 말년에 향산사에 머물렀다고 하여 ‘향산 거사’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모아 향산사를 중수한 뒤, 마조의 제자인 불광 여만(佛光如滿, 생몰미상)이 향산사 주지가 되는데 일조한다. 이들은 이곳에서 재가자를 포함해 여만 선사 등 9명이 도반이 되어 구노사(九老社)를 결성해 음영임천(吟詠林泉)하며 친교를 나누었다.

낙천은 말년, 그가 정착한 세계는 무량수불·아미타불 서방 정토세계였다. 그는 구노사 외에도 148명의 가까운 사람들과 ‘상생회(上生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과 같은 자세로 좌선하고 내세에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낙천의 염불게를 보자.

“내 나이 일흔 하나, 다시는 풍월을 일삼지 않으리./ 경전을 보자니 눈이 불편하고 무엇으로 심안(心眼)을 제도한 제도할 것인가?/ 한 구절 아미타가 있도다.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나 ‘아미타’/ 화살같이 바빠도 늘 아미타를 떠나지 않네.”

말년에 낙천은 도반들과 결사를 하며, 수행과 신행을 겸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도반으로부터 받는 영향을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좋은 선지식과 도반에 둘러싸여 있다면, 수행의 전부를 완성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다. 요즘은 불교신자들이 활발하게 경전 공부를 하고, 참선하는 이들이 많다. 백낙천처럼 승속을 뛰어넘어 도반 인연을 만들어 공부에 매진하거나 보시행 등 결사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여만 선사가 먼저 열반에 들자, 구노사 도반들은 향산사에 여만의 묘탑을 세웠다. 백낙천은 향산사에서 18년을 머문 뒤, 이곳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임종 무렵, 자식들에게 ‘여만선사 묘탑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식들은 낙천의 유언에 따라 846년 그를 여만 선사 옆에 묻었다. 낙천의 묘는 향산사 도량의 지척거리에 위치한다.

현재 여만 선사의 묘탑은 없고 낙천의 묘만 있는데, ‘백원(白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낙천의 묘지에 찾아가 그의 문학성을 기리거나 시세계를 흠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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