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사냥꾼… 마조 아래 一佛제자

제자들이 많던 마조 선사
무소유 삶 실천한 담장 등
출신·신분·직업 각양각색

마조의 제자 석공 혜장 선사가 주석했던 강서성 의황 석공사의 대웅보전. 대웅보전 주련에는 ‘석공사는 홍주(洪州) 마조선 도량이며 선기(禪機)를 전해서 청정한 마음으로 이끌고, 극락으로 이끌어준다’고 적혀 있다.

‘무소유’ 담장 선사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BC 5세기 중반 활동)는 목이 말라 물을 먹기 위해 동냥 그릇을 들고 강으로 갔다. 그가 강둑에 다다랐을 무렵, 개 한 마리가 그의 옆을 스쳐 달려가더니 강물에 첨벙 뛰어들어 실컷 물을 마시고 즐겁게 목욕까지 하였다.

디오게네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개는 나보다 더 자유롭구나. 개는 동냥그릇조차 갖고 다니지 않는군. 개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나(我)는 이 그릇을 도둑맞을까봐 몸에 안고 다녔다. 한밤중에도 그릇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걱정되어 잠을 깬 적도 있었으니, 개만도 못하지 않은가?’

그러더니 그는 강물에 그릇을 던져 버렸다. ‘소유물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무소유 정신이다. 이 무소유 사상은 승려의 계율이기도 하다. 이런 무소유 사상에 철저한 선사, 담장이 있다.

담장(曇藏)은 마조 선사의 만년 제자이다. 조사선의 개조(開祖)인 마조(馬祖, 709∼788)에게 제자가 많다보니, 제자들이 다양 각색이다. 이번 글에서 사냥꾼 출신 혜장·유학자 출신 영묵·담장을 소개하기로 한다.  

담장의 일화는 <전등록>에 전하는데, 선사는 스승 마조가 열반하고 남악(南岳) 서원사(西苑寺)에 머물렀다. 담장은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늦은 밤에 경행을 하면 개가 와서 옷을 물었다.

오랜 시간 경행했다는 뜻으로 알고, 담장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 날 개가 문 옆에 엎드려 계속 짖었다. 이튿날 아침, 새벽에 공양간 앞에 큰 구렁이 하나가 나타나 입을 벌리고 독을 내뿜고 있었다. 사미승이 겁에 질려 있자 선사가 말했다.

“죽음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저 놈이 독을 뿜고 달려들면, 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독은 진실한 성품이 없어서 끓어오르면 강해지고, 자비는 인연을 가리지 않으니 원수와 친척이 같은 것이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미물인 구렁이도 스님의 말에 감화를 받았는지 슬그머니 사라졌다. 또 어느 날 저녁, 암자에 도둑이 들었다. 개는 담장의 옷을 물더니 놓아주지 않았다. 선사는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라고 추측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도둑이었다. 담장이 도둑에게 말했다. 

“누추한 암자까지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혹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도둑은 선사의 말에 감동을 받고 절을 한 뒤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나라 혜월(1861~1937) 선사에게도 비슷한 고사가 있다. 혜월이 머물고 있던 정혜사에 도둑이 들었다.

쌀을 훔쳐 지게에 지고 가려던 도둑이 가마니가 무거워 쩔쩔매고 있는데, 선사가 가만히 지게 짐을 들어 올려 주면서 도둑에게 말했다. “쉿,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내려가게, 양식이 떨어지면 또 찾아오시게”

또한 일본에 청빈한 삶을 살다간 료칸(良寬, 1758~1831) 선사가 있다. 료칸이 머물던 곳에 늦은 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물건을 훔치러온 도둑이 훔쳐갈 물건이 없어 실망하자, 료칸이 말했다. “이 옷이라도 벗어줄 테니 가지고 가라.”

강서성 정안 보봉사 마조 선사 사리탑 뒷면. ‘마음 이외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이외에 따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유학자 출신 영묵 선사 
지난 방거사 이야기에서 ‘선불장(選佛場)’ 단어를 언급했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마조의 제자가 있는데, 오설 영묵(五洩靈?, 747~818)이다. 영묵은 명문 가문의 유학자 출신이다. 영묵이 출가하게 된 인연이 매우 독특하다.

<조당집>에 의하면 영묵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녘에 마조가 머물고 있는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를 방문한다.

영묵은 당시 마조가 인지도가 높은 선사로 알려져 있어 궁금하던 차에 단순한 마음으로 개원사를 찾은 것이다. 마조와 마주앉게 된 영묵은 선사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마조가 먼저 물었다.

“어디 가는 중인데, 여기에 들렀는가?”
“과거시험 치르러 장안에 갑니다.”
“수재(영묵])는 가까운 곳을 놔두고 너무 멀리 가는군!”
“그러면 이 근처에도 시험장이 있습니까?”
“눈앞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영묵은 이런 인연으로 과거 시험을 접고, 개원사에 출가하였다. 며칠이 지나 영묵이 마조에게 삭발하겠다고 하자, 마조가 말했다. “삭발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만, 자네의 일대사 인연과는 별개의 문제네.”

그런데 영묵이 삭발까지 하고, 여러 날을 수행해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후배 정 상좌와 마조가 문답하는 와중에 정상좌가 문득 깨달음을 이룬다. 영묵은 마조를 찾아가 따지듯이 말했다.(<조당집> 15권 ‘오설화상장’)

“스님, 저는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출가했습니다. 저보다 늦게 출가한 정 상좌는 깨달음을 이루었는데, 저는 왜 깨달음이 더딘가요?”

영묵은 주절주절 한참동안 스승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마조가 영묵에게 말했다.
“네가 출가하는 것은 내가 허락했지만, 그대의 정각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럴만한 스승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곳에서 700리 떨어진 남악산에 석두 선사가 있는데, 한번 가보아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가하고 삭발했다고 ‘부처에게 선택(選佛)’되지 않으며,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수행 정진에 따라 부처에게 선택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출가하지 않고 재가자 신분이어도 얼마든지 수행해 부처에게 선택될 수 있다. 이 점이 대승불교 사상이다.

영묵은 남악산(南嶽山)의 석두 선사 사이를 오고가며 공부해 깨달음을 이루었다. 석두는 석두 희천(700~790, 조동종의 종조)을 말하는데, 당시 석두는 마조와 쌍벽을 이루며 제자들을 지도했던 대선사이다. 
 
사냥꾼이었던 혜장 선사 
마조의 제자 중 사냥꾼 출신 제자가 있다. 석공 혜장(石鞏慧藏, 생몰미상)으로 출가 전, 혜장이 산에서 사냥을 하다 우연히 마조를 만났다. 마조가 혜장에게 물었다.

“화살 한 대로 몇 마리를 쏘느냐”
“화살 한대로 한 마리를 쏩니다.”
“스님도 사냥을 해보셨습니까?, 화살 하나로 몇 마리를 쏠 수 있습니까?”
“나는 화살 하나로 한 번에 떼거리를 잡는다.”

이 말에 혜장이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제가 사냥 일을 하지만, 생명은 소중한 겁니다. 어찌 스님께서는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하십니까?” 
“왜 그런 것은 알면서 자네는 잡지 못하는가?”

혜장이 마조의 말을 들은 뒤 화살을 꺾어 버리고 출가했다. 여기서 마조가 말한 ‘자신을 잡지 못한다 것’은 마조가 혜장에게 자신의 번뇌를 타파할 것을 가르친다. 이후 혜장은 마조 문하에서 수행하였다. 

어느 날 마조가 물었다.  
“무엇을 하느냐?”
“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돌보고 있느냐?”
“한번이라도 미망(迷妄)에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단번에 코끝을 잡고 끌어당깁니다.”
“너는 소 기르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구나.”

여기서 ‘소 기르는 법’이란 번뇌로 가득 찬 자신을 다스려서 청정한 본원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는 번뇌를 상징하고, 길들이는 ‘목동’은 수행자로 비유해서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그림을 ‘십우도(十牛圖)’ 혹은 ‘목우도(牧牛圖)’라고 한다. 이 십우도가 유행한 것은 송나라 때인데, 마조가 제자들을 지도하는 기연(機緣)에 벌써 소 이야기가 등장한다. 후대에 소를 배경으로 선+그림이 나오면서 선화(禪畵)가 등장하게 된다.

하루는 혜장이 사형인 서당지장에게 물었다.
“허공을 잡을 수 있습니까?”
“잡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잡는가?”

서당이 손으로 허공을 더듬자, 석공이 “그래서 허공이 잘 잡히겠냐”며 핀잔을 주자 서당이 너는 어떻게 하겠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석공은 느닷없이 서당의 코를 힘껏 잡고 끌었다. 서당이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아얏! 이 코를 놓으십시오. 코가 빠지겠습니다.”

이 때 석공이 말했다. “허공은 이렇게 잡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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