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無字’ 화두 전한 선지식

남전 법맥이어 받은 조주 선사
80세에 하북성 관음원 주석하며
禪法 전파하다 120세에 열반해
‘벽암록’ 공안 12개가 조주 연원
대혜종고 등 ‘무자’ 화두 중시해
조주로 인해 선사상은 풍부해져

중국 하북성 조주현 백림선사 전경. 조주가 머물 당시에는 관음원이라고 칭했다.

닭 우는 축시(丑時)
가난한 마을인지라, 절 꼬락서니는 말할 것도 없다. 
부처님께 마지 공양은 그만두고, 아침 죽 끓일 쌀알조차 없으니 
창문 틈새마다 수북이 앉은 먼지나 바라볼 밖에…
반갑지 않은 참새만 짹짹대고, 친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혼자 앉아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말했던가! 출가자는 애증(愛憎)을 끊는 거라고…
생각할수록 눈물이 나 손수건을 적신다. 

해가 높이 뜬 사시(巳時)
머리 깎고,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어쩌다 청을 받아 들여, 시골구석 중이 되고 보니 
굴욕과 굶주림, 처량한 신세에 죽을 지경이다.
키다리 장삼(張三)과 껌둥이 이사(李四),
그들은 눈꼽만큼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아까는,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나서는
‘차 꿔달라’, ‘종이 꿔달라’ 떼만 쓰고 가더라.
-〈조주록〉

위의 선시는 조주 종심(趙州從?, 778~897)의 ‘12시가(十二時歌)’ 중 일부이다. 12시가는 자시부터 해시까지 12단락으로 나누어진 시구이다. 근엄한 선사의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솔직함이 드러나 있어 정감이 간다.

조주는 지난회의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의 제자이다. 조주는 산동성(山東省) 조주(曹州) 출신으로 어려서 조주의 호통원(扈通院)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남전의 제자가 되어 법맥을 받았다. 그는 80세까지 행각을 하다, 80세가 넘어서야 하북성(河北省) 조주현(趙州縣) 관음원에 주석했다. 조주는 이 관음원에 머물며, 세납 120세의 장수를 누린 선사다. 조주가 스승 남전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이른 봄날이었다.
남전선사가 양지바른 곳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사미승 조주가 찾아 왔다.
남전은 조주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예,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서상이라! 그럼 상서러운 모습을 보았는가?”
남전은 조주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조주가 대답했다. “아뇨,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했고, 다만 와여래(臥如來)를 보았습니다.”
남전은 ‘이 놈이 보통 사미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고, 일어나 다시 물었다.         
“자네는 임자가 있는가(스승이 계시는가)?” 
사미 조주가 “네,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다시 남전은 “임자가 어디있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조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전에게 절하면서 말했다. “아직 추운 계절인데 스승님(남전)께서 존체 만복하시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공안, 화두에는 조주의 선문답이 많이 있다. 조주의 선문답은 간화선의 종문서인 〈무문관〉과 〈벽암록〉 등에 전한다. 이를 중심으로 몇 가지만 보기로 하자.

한 수행자가 조주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모두 내려놓아라(放下着).” 
“이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얼 내려놓으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짊어지고 가거라(着得去).”
-〈오가정종찬〉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관념조차 내려놓아야 한다. 곧 무심의 경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그 무심이라는 것조차 마음에 들고 있다면 결국 집착과 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를 찾아와 말했다. 
“저는 방금 이 곳에 왔습니다. 큰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오.”
“죽은 먹었느냐?” 
“예” 
“그럼 밥그릇이나 씻어라(洗鉢盂去)”
-〈무문관〉
 
한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다.
“스님, 인생에서 가장 다급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선사가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오줌 좀 눠야겠다. 이런 사소한 일도 몸소 이 늙은이가 해야 하는구나” -〈조주록〉

하루는 성덕군(成德郡)의 절도사 조왕(趙王)이 조주를 찾아왔다. 마침 조주는 선상위에 앉아 있었는데, 내려오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소승이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 해 노쇠해서 선상에서 내려오기 힘듭니다.”
조왕은 조주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고 떠났다. 다음 날 조왕은 한 장군에게 명을 내려 조주에게 소식을 전했다. 장군이 와서 조주에게 예를 올리자, 조주는 선상에서 내려와 정중하게 그를 맞이했다. 이 점을 괴이하게 여긴 제자가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어제 왕이 왔을 때는 선상에서 내려오지도 않더니 오늘 장군이 오니까 선상에서 내려와 영접하시네요.”
“일등 가는 사람이 오면 선상에 앉아 맞이하고, 중등 가는 사람이 오면, 선상에서 내려와 맞이해야 한다. 하등 가는 사람이 오면 대문 밖까지 나가 맞이해야 한다.”

조주가 조주에서 40여 년 관음원에 있는 동안 조왕은 몇 차례 왕부(王府)로 청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조왕은 조주에게 사찰을 지어 공양 올렸으나 이 또한 받지 않았다. 이런 조주의 덕성을 알고 있던 조왕이 소종(昭宗, 888~904 재위)에게 상소를 올려 조주는 가사와 진제대사(眞際大師) 시호를 받게 되었다.  

조주가 조주성의 관음원에 머물고 있을 때, 승려가 찾아와 물었다.
“‘조주’, ‘조주’하는데 조주란 본래 어떤 겁니까?”
“조주에는 동문도 있고, 서문도 있으며, 남문도 있고, 북문도 있지(趙州東西南北).”
-〈벽암록〉 9칙

또한 제자들이 찾아와 법을 물으면 이 절에 처음 온 승려이든 두 번째 온 승려이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
한번은 원주가 물었다. “왜 스님께서는 처음 왔든 두 번째 왔든 똑같이 ‘차나 마시라’고 합니까?”그러자, 조주가 “원주”하고 불렀다. 원주가 대답을 하자, 선사가 말했다. “차나 한잔 마시게.”
-〈오등회원〉

한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조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키며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무문관〉

백림선사 도량에 모셔진 조주선사 사리탑.

실제로 백림선사 도량에는 잣나무 두 그루가 아름드리 서있다. 사찰 이름 ‘백림(柏樹)’도 위의 공안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조주의 끽다거 공안으로 인해 백림선사는 다선일미의 대표되는 사찰이기도 하다. 백림선사는 하북성(河北省) 조주현(趙州縣)에 위치한다. 원래 이 사찰은 관음원(觀音院)으로 칭하다가 원나라 때부터 현재 이름인 ‘백림선사’로 불리었다.

또한 백림선사에서 4Km 떨어진 곳에 조주교(趙州橋)가 있다. 이 다리는 수나라 때 이응이 건설하여 안제교(安濟橋)라고 불리다 현재 ‘조주교’라고 불린다. 당시 장인들의 축조술이 뛰어나 지금까지도 귀중한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다. 이 조주교와 관련된 조주의 일화가 있다.

한 학인이 와서 물었다. “조주의 돌다리 소문을 들은 지가 오래인데 막상 와서 보니 외나무다리뿐이군요.”
그러자 조주가 말했다. “그대는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질 못했군.”
다시 학인이 “어떤 것이 돌다리(趙州石橋)인가”라고 묻자 조주는 답했다. “나귀도 타고 말도 건너지.” -〈벽암록〉  

조주는 120세로 열반에 들며, 제자들에게 유언하기를 사리를 줍거나 탑을 세우지 말라고 하여 유언이 지켜졌다. 그러다 원나라 때(1330년), ‘조주고불진제광조국사탑(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之塔)’이 건립되었다.   

조주선의 선종사적 위치를 정리해보자.  첫째, 〈벽암록〉에 전하는 공안 가운데 12개가 조주의 공안이다. 또한 〈무문관〉의 1칙인 무자(無字) 화두는 화두 가운데 간화선의 가장 긴요한 핵심 화두이며, 간화선 행자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는 화두이다.

조주의 무자화두를 처음 주목한 사람은 오조 법연(?~1104)이다. 〈법연어록〉의 상당법어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여러분들은 평소 어떻게 참선하고 있는가? 나는 언제나 단지 무자만을 참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만약 이 무자 하나를 투과하여 체득한다면 천하에 그 누구라도 여러분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조주의 이 무자를 어떻게 투과할 것인가? 이 무자를 투과한 사람이 있는가? 있으면 나와 대답해 보라. 나는 여러분들이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없다는 대답도 바라지 않는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외에도 대혜종고·무문혜개·몽산덕이 등 역대의 간화선자들도 이 화두를 중시했다.  

둘째, 조주는 청빈한 삶을 자청했지만, 조주로 인해 발달한 선사상은 매우 풍족하다. 당대에 ‘남설봉, 북조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쪽에는 설봉 의존(822~908), 북쪽에는 조주라는 큰 선지식으로서 당대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또한 옛 부처가 다시 출현했다고 하여 선종사에서 선사를 ‘조주 고불(古佛)’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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