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르네상스 선지식] 7. 조사선의 개조, 마조도일
[선의 르네상스 선지식] 7. 조사선의 개조, 마조도일
  • 정운 스님/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9.04.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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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발전 교두보 역할한 선지식
마조가 가장 활발하게 선풍을 전개한 개원사(현 강서성 남창 우민사)의 모습. 이곳에 조계종 종조 도의국사의 구법을 상징하는 우호탑이 조성돼 있다.
마조가 가장 활발하게 선풍을 전개한 개원사(현 강서성 남창 우민사)의 모습. 이곳에 조계종 종조 도의국사의 구법을 상징하는 우호탑이 조성돼 있다.

당나라 때, 마조 선사는 개법을 한 뒤 수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어느 해 마조는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어릴 적 살던 고향인 사천성 시방현(四川省 什方縣)을 방문했다. 막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일하고 있던 할머니가 선사를 보고 외쳤다.
“어, 마씨네 키쟁이 코흘리개가 지나가네.”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은 이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출가해 나이 들어서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  

예수도 성인이 된 후, 고향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당한 곤욕이 있어 제자들에게 ‘성인이 되어서는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에 필자도 실감한다. 형제가 여럿이지만, 출가 후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만나지 않는다. 부모님 이외 형제들이 불교에 문외한인 데다 함께 나눌 주제가 없다보니, 당연히 거리를 두고 산다. 스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닌데, 필자는 유독 인연이 별로 없다.

그런데 몇 년 전 일이 터졌다. 병원에 입원할 일이 있었는데, 피붙이 형제나 친척 사인이 필요했다. 하다못해 병원에서는 조카 사인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일은 해결했지만, 이런 점이 승려 생활을 어렵게 한다.  

사천성 십방현 나한사서 출가
남악회양 문답서 크게 깨달아
‘마전작경’ 일화로 잘 알려져

중국적 선문화 확립에 기여해
일상생활 속 수행 정진 강조
신라 출신 무상대사 사제설도

필자는 수년 전 마조의 고향을 방문하였다. 중국불교협회에서 일성(一誠, 1926~2017) 방장을 중심으로 마조의 고향을 불교 성지로 만들었다. 고향에 있는 사찰 마조사나 여러 곳에 마조를 상징하는 상징물들을 마련해 놓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할머니가 외쳤던 ‘마씨네 코흘리개’ 단어를 생각하며, 웃음 지었다. 그러면 이 마조는 어떤 인물인가?

마조가 활동하던 당대(唐代, 618~907)는 중국역대사상 문화적·사회적·대외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외국 문화 수용면에서도 관대해 최고로 문화가 번성했지만, 안록산의 난(755~763)이 일어났다. 이 난으로 인해 당나라의 사회구조·문화·종교까지 모두 흔들렸다. 불교도 종래의 수도권 중심의 교종이 쇠퇴하고,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선종이 일어났다. 이런 혁신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조의 선은 풍요로운 시골의 곡창 지대를 배경으로 종래의 귀족이나 문벌에 대신하여 지방 지배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조는 사천성 사람으로 성은 ‘마(馬)’씨이다. 선사 행적의 독특한 점은 그가 죽는 날까지 그의 속성인 ‘마씨’라고 불리었는데, 마씨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마조(馬祖)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속성으로써 한 종파의 조사를 부른 예가 있는데, 화엄종의 조사인 두순(杜順, 557~640)이나 부대사(傅大士, 497~569), 신라의 무상(680~756)대사를 김화상(金和尙)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마조라는 호칭은 선종의 종조로서 잘 어울린다. 마조가 태어난 사천성은 중국사의 걸출한 인물들이 많다. 마조 다음 세대인 규봉 종밀이나 임제, 소동파도 사천성 출신이고 덩샤오핑 등 현대 중국을 이끈 인물들도 이곳 태생이 많다.

마조는 고향 마을에 위치한 나한사에 출가해 자주(資州)의 당화상(唐和尙, 덕순사의 처적)에게 머리를 깎고, 유주의 원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마조가 수행을 위해 형악 전법원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남악회양(677~744)선사를 만났다. 남악은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덕은 무얼하려고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려고요.”

그러자 회양은 암자 앞에 있는 돌 위에 기와를 갈아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좌선만으로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스승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수레가 만일 나가지 않는다면 그대는 수레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를 채찍질해야 하는가?”  

마조가 아무 말도 못하자, 회양이 다시 물었다.   
“자네가 지금 좌선(坐禪)을 익히는 것인지, 좌불(坐佛)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만일 좌선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이 아니며, 혹시 그대가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머무르지 않는 법을 놓고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해서는 안되네. 그대가 혹 좌불을 흉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행위와 다름없고, 보잘 것 없는 앉음새에 집착하면 정작 깊은 이치에 도달할 수가 없는 법이라네.”

마조가 이 말을 듣고 활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승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이 이야기를 선종사에서는 ‘마전작경(磨塼作鏡,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이라고 한다.

마조가 열반한 늑담사(현 강서성 보봉사)에 조성된 마조도일의 사리탑.
마조가 열반한 늑담사(현 강서성 보봉사)에 조성된 마조도일의 사리탑.

이후 얼마 안 있어 마조는 스승의 인가를 받았다. 마조는 스승에게 깨달음을 얻고, 시봉하기를 10년 한 뒤,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의 불적령(佛跡嶺) 성적사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했다(개당설법). 이때가 마조의 나이 34세였다.  

마조는 강서성(江西省) 일대에서 선을 펼쳤는데, 이곳 군수 배공(裵公)의 귀의를 받았다. 배공의 귀의로 말미암아 마조 교단은 크게 번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조는 769년에 마조의 중심 행화지였던 개원사(開元寺) 주지로 부임하였다. 이때 많은 수행자들이 마조 밑으로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강서 지방 일대에 48좌의 마조 도량이 건립되었다. 지금은 그 유적 가운데 정확한 장소가 발견된 곳이 28군데다. 

마조는 788년 정월에 강서성 건창 석문산에 올라 숲속을 거닐다가 평탄한 골짜기를 보더니 시자에게 말했다. “다음 달에 나의 육신이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리라.”

이 말씀을 끝내고 산에서 돌아와 얼마 안돼 병이 들었다. 원주가 문안 올리면서 물었다. 
“스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

이것이 마조의 최후 법문이다. 일면불과 월면불의 수명은 각각 1800세, 1일 1야로 장수와 단명을 상징하는 화두이다. 마조는 2월 1일에 세수 80세, 법납 60세로 건창 석문산 륵담사(현 보봉사)에서 입적하였다.

마조의 문하에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천성광등록>에는 84인, <조당집>에는 88인, <송고승전>에는 대적의 문하에 800여 명이다. 그만큼 마조 문하에서 기라성같은 선지식이 많이 배출됐다는 의미다.

마조의 장례식이 성대했던 것을 기록하고 정토교의 선도(562~645) 및 보적(普寂, 651~739, 대통신수의 제자)에 버금가는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마조가 중국 사회에서나 동아시아 불교계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마조의 행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보자. 

첫째, 조사선의 개조(開祖)로 인정받는다. 일반적으로 선학에서는 선종사를 여래선-조사선-문자선(공안선)-간화선·묵조선-염불선으로 나뉜다. 조사선에 있어 개조를 누구로 보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달마·혜능·마조 등 세 선사로 압축되는데, 마조를 기점으로 조사선이 시작되었다는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수백여 명의 선사들이 마조의 법맥에서 큰 물줄기가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이런 마조는 선종을 발전시키는데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둘째, 인도선을 탈피하여 중국적인 토양이 깃든 선으로 탈바꿈시켰다. 마조는 선방에서 좌선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일상의 종교로 전환시켰다.

셋째, 마조의 선기(禪機) 방편에서 공안이 비롯되었다. 할을 하거나 불자 사용, 방망이를 휘두르는 등의 활작략(活作略)을 선종에서 기연(機緣)이라고 한다. 이것이 선문답이라는 형태로 되어 어록이 발생하였는데, 이 어록은 후대에 공안으로 형성되는 단초가 되었다. 마조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여러 가지 방편을 활용했는데, 바로 이 점을 후대에 마조에서 공안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넷째, 마조가 무상(無相, 680~756) 대사와 사제관계(?)라는 설이다. 무상은 중국 초기 선종사(6세기~8세기)의 한 일파인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선을 펼친 정중종(淨衆宗)의 개조이다. 무상은 우리나라 신라 성덕왕의 아들로서 44세에 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상 대사와 마조가 스승과 제자라는 점을 규봉 종밀이 주장하면서부터 근자에 이르기까지 연구되고 있다. 

다섯째, 마조는 우리나라 대한불교조계종과도 인연이 밀접하다. 신라말 여초 구산선문 가운데 일곱 산문이 마조계 법을 받아 신라 곳곳에 선종 산문이 개산되었다. 즉 일곱 산문의 개산조 승려들은 마조에게 있어 손자나 증손자 정도의 관계가 된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道義) 국사는 마조의 장손격인 서당 지장(735~814)의 법을 받아 신라에 가지산문을 개산하였다. 그래서 2008년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마조의 도량인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 개원사(현 우민사) 도량에 ‘조계종 종조 도의조사 입당 구법기념비’를 세웠다. 이곳에서 도의 국사가 서당 지장을 참알하고, 법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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