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매임 없이 오롯이 정진만…

“목 베겠다”는 황제 엄명에도
수행에 전념했던 唐代 선사들
‘선 르네상스 시대’ 개화 시켜
“가난해야 더 정진” 되새겨야

중국 호남성 류양 석상사 도량 뒤편에 위치한 무문관. 중국에서는 폐관(閉關)이라고 한다.

근자에 종교 인구가 줄고 있고, 출가자 또한 감소하고 있는 현실이다. 1600여년 한국불교사에 찬란한 고려불교도 있지만, 조선 500년 통한의 불교사는 매우 심각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에 그 무엇이 불교를 존속되게 한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반만년 동안, 지구상에 불교가 존속함은 지극한 수행자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국 르네상스 시대 참수행자의 면모를 남긴 몇 명의 선사를 만나 보자. 

남악산에 나잔(懶殘)이라는 선사가 살았다. 이 선사는 누더기를 걸치고 노쇠해서 비틀비틀 걷는 노인이라는 뜻이다. 나잔은 북종선 3세에 해당한다. 즉 대통 신수(大通神秀, 606~706) 문하에 당시 화엄학자이자 선사인 보적(普寂, 651~739)이 있는데, 나잔은 바로 보적의 제자다.(5조 홍인-신수-보적-나잔)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년)이 나잔의 덕을 칭송해 그를 관직에 기용할 생각으로 칙사를 보내어 나잔을 장안으로 모셔오라고 하였다.

칙사는 나잔이 머물고 있는 산골을 겨우 찾아갔건만 선사는 칙사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칙사가 황제의 말을 전하자, 나잔은 칙사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운 감자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선사는 평소에 씻지도 않아 침과 콧물이 목덜미 근처까지 드리워진 모습이었다. 이때가 마침 추운 겨울인데다 초라한 행색의 노승이 감자를 먹고 있으니, 칙사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나잔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래, 내가 부탁을 하나 하지요. 자네가 아까부터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어 햇볕이 들지 않으니 그 서 있는 자리 좀 비켜 주시오”

이렇게 나잔처럼 명예에 얽매이지 않은 선사들이 많았다. 여섯 조사 가운데 4번째인 도신(四祖道信, 580~651)은 당나라 태종이 세 차례나 입궐할 것을 권했으나 한사코 거절했다. 화가 난 태종이 네 번째 입궐할 것을 권하며 ‘이번에 입궐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도 도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쌍봉산을 벗어나지 않은 선사였다.

분주 무업(汾州無業, 760~821)은 마조의 제자이다. 당시 대학자로서 강사 출신으로 유명하다. 무업은 스승에게 법을 얻은 뒤 깊은 산속에서 홀로 두타행을 하였다. 만년에 제자들을 지도하며 법을 펼칠 때, 당시 헌종(재위 805~819년)이 무업에게 몇 번이고 궁중에 들어와 설법해줄 것을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다음 재위한 목종이 또 다시 황궁에 들기를 요청하자, 신하를 통해 이런 말을 전했다. “가 보아야 될 일을 못 가보지만, 길은 반드시 다르지 않네.” 다음날 무업은 입적했는데, 목종이 무업에게 대달국사(大達國師) 시호를 내렸다.


당나라 중기~말기에는 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말 그대로 선의 르네상스이다. 수행자들이 많다보니, 수백여 대중이 함께 거주했다. 그러면서 지방관의 보시를 받으며, 지역 발전을 이루기도 하였다.

반면 그 반대의 선자들이 있는데, 대중과 함께 거주하는 것보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은둔하며 시를 읊는 시승들도 많았다. 선시가 발달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인데, 이 또한 르네상스 시대 선풍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당말 오대에 접어드는 10세기 무렵, 남악 현태(南嶽玄泰)스님이 그런 경우이다. 이 현태 선사는 입적하기 직전, 이런 게송(遺偈)을 남겼다.

이제 나는 65세,
지수화풍 4대는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지려고 한다.
도는 그윽하고 현묘하나니 
거기에는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으며 
머리 깎는 귀찮은 일도 없고, 목욕하는 수고로움도 없다.
이제는 한 덩어리 사나운 불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니,
나는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네.
-〈전당시(全唐詩)〉

위의 게송을 남긴 현태 선사는 평소 고고한 생활에 제자 한사람도 없이 홀로 수행하다가 열반했다. 열반에 들기 전날, 한 수행자를 불러 그가 머무는 토굴 앞에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게 한 뒤 다음 날 앞의 게송을 남긴 후, 불 속에 뛰어들어 열반에 든 것이다. 

현태 선사는 후배 승려들이 장례식을 치르는 수고로움을 덜게 하기 위해 평소처럼 죽음도 고요히 맞아들였다. 옛날에 스님들은 율무염주를 많이 지니고 다녔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에 율무열매가 맺힌 나무를 보면, 그 곳에는 한 수행자가 홀로 죽음을 맞이한 곳이라고 한다.

즉, 스님의 법신은 썩어 사라졌지만 평소에 목에 걸었던 율무염주가 싹이 트고 자라 열매를 맺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우리나라 경허(1846~1912)선사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 삼수갑산에서 서당선생을 하다가 입적했다. 또한 경허 선사의 제자인 수월도 그러하다.

수월은 제자가 없었고, 법문을 남기지 않아 선사의 어록이 전하지 않는다. 수월은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조실을 지내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 중국 간도 지방에 살았다. 스님은 만년에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 화엄사 작은 암자에 주석했다.

만년에 수월은 목욕해 마치고, 스스로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올라 입적했다. 입적한 날부터 7일 동안 스님의 법신에서 방광이 있었고 다비한 뒤에도 많은 사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행자가 평생을 수행한 뒤에 홀로 가는 거야 당연하지만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연민, 그 고독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선사가 많았다. 

또 송대 초, 법창 의우(法昌倚遇, 1005~1081) 선사를 소개한다. 의우는 임장(臨臘) 고정(高亭) 사람으로 운문종계 선사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큰 뜻을 품고 사방을 행각하며 수행함으로서 총림에 이름을 날렸다. 부산법원(浮山法遠, 991~1067) 선사는 의우 선사를 두고, ‘발초첨풍의 진정한 수행자로서 후학들의 귀감’이라고 칭찬하였다.

의우는 만년에 분령(分寧) 북쪽 천봉만학(千峰萬壑) 가운데 담이 무너진 옛 집에 은거했다. 간혹 수행납자들이 선사에게 공부를 배우고자 깊은 산골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의우 선사는 제자를 친절히 지도하거나 자상하게 이끌지 않았다.

결국 제자들이 선사의 무뚝뚝함과 무성의에 원망만 잔뜩하고 선사 곁을 떠났다. 당연히 선사는 제자 없이 사찰에 홀로 머물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선사는 새벽에 향을 피우고 홀로 예불하며, 저녁에 등불을 밝히고 법당에 올라 아무도 없는데 설법하는 일을 늙어 죽을 때까지 하였다. 곧 총림에서 하는 청규를 홀로 여실하게 지켜 나갔다.

이런 선사의 모습을 알고 있던 용도각(龍圖閣) 학사(學士) 서희(徐禧, 1035~1082)는 대중이 없는데도 대중과 함께 사는 것처럼 여법하게 사셨던 선사의 위의에 감탄을 받았다. 의우는 이런 유게를 남겼다.

금년 내 나이 일흔일곱
길 떠날 날을 받아야겠기에
어젯밤 거북점을 쳐 보니
내일 아침이 좋다고 하더라.
-〈인천보감〉

생사(生死)조차 자유자재로웠던 선사의 모습이다. 근자에 어느 사찰이 ‘총림’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에서 해제되었다. 그 사찰은 총림으로서의 격상에 맞지 않다는 여론에 밀려 총림에서 해제된 것인데, 다시 그 명예를 되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다음은 당나라 말기의 광혜 원련(廣慧元璉, 951~1036)선사의 설법을 소개한다.

원련은 임제종계 선사로서 당시 선자들의 귀감이 되었던 인물이다. 이 법문을 통해 승려로서의 면모를 새기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선사는 대중에게 법을 설할 때면, ‘늘 재물과 이익을 멀리하고 먹고 입는 것을 간소하게 하라’고 했고, 또 한번은 “만약 도를 배우려거든 먼저 배고프고 가난해야 더 열심히 정진한다. 그렇지 못하면, 도를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원련 선사가 입적하기 전 대중에게 이런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내가 평소 그대들에게 재물과 이익을 멀리하고 먹고 입는 것을 소박하게 하면 반드시 도업(道業)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모든 죄업은 재물 때문에 발생하고, 좋지 못한 불명예는 입과 몸에서 일어난다.

나는 일생 동안 재물을 모으지 않았고, 대중에 살며 스님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이는 내 분수 밖의 일이어서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어버이를 작별하고 출가했다. 그러니 마음을 알고 근원을 통달해 무위법(無爲法)을 깨닫고자 한다면 세간의 재물을 버리고 걸식으로 만족하며, 하루 한 끼 먹고 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자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거늘 어찌 그것을 어기는가! 혹 수행자가 잘 먹고 잘 입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부처님의 형상과 옷을 빌려 입고 불법문중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미 불자가 되었다면 불자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

‘나는 복이 많고, 인연도 많으니, 마음대로 업을 지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어떤 이들은 재물이나 명예를 얻는데 피를 본 파리처럼 결코 포기할 줄 모른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나는 선을 알고 도를 깨쳤다’고 하면서 방(棒)을 쓰고 할(喝)도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대들은 반드시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인천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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