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학 결합된 禪風 보이다

설봉의존 법 이은 운문문언 開山
짧고 함축적 어구로 제자 가르쳐
禪·詩 조화… ‘일지관’ 종풍 지녀
단멸하나 근대 허운 선사가 복원

운문종 종조 운문문언 선사의 진신상. 중국 광동성 유원현 대각사 조사전에 봉안돼 있다.

운문 선사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보름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오늘부터 보름 이후의 일을 표현할 수 있는 시구를 하나씩 지어 오너라.”

제자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시구를 지으려고 했으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운문은 제자들에게 짧은 구절 하나를 써 보였다.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

무엇이 좋은 날이라는 뜻인가? 선에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일이지만, 삶과 관련해보자. 바로 매일 매일이 최상·최고의 날이며, 매일 매일이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하루이다. 그 ‘날(日)’이라고 하지만, 시시각각 그 순간의 자각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니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 순간도 단 한번이다.

‘내일 봐야지’하면 벌써 늦는다. ‘날마다 좋은 날(그 순간이 좋기 위해서)’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순간순간마다 소중한 삶을 인식해야 매일 매일이 좋은 날(日)이요, 매일 매일이 좋아야 달마다 달마다 좋은 달(月)이요, 달마다 달마다 좋은 달(月)이 되어야 해마다 해마다 좋은 해(年)가 될 것이다.

운문종 개산 당시 시대 배경   
8세기 말부터 지방 절도사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중앙 정부의 권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지방 분권이 강해지면서 세력가들은 선을 선호하였다. 10세기 무렵인 당말(960년)·오대를 전후해 혼란한 시기에 힘이 된 철학이 선종의 5가 가운데 법안종과 운문종이다.(2종은 이 무렵에 개산됨) 혼돈의 시대에 선은 정치인들과 문인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고 사료된다.

운문종이 개산되기 전 당시 유명한 선사가 있는데, 남쪽(현 광동성)의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과 북쪽(현 하북성)의 조주 종심이다. ‘남설봉 북조주’라고 할 만큼 이들의 선이 천하를 풍미했다. 조주는 앞선 회차에서 언급했고, 설봉 문하에서 법안종과 운문종이 개산되었다.
     
운문종 원류 설봉의존
선에서 제자들을 방망이로 때렸던 유명한 선사가 덕산 선감(德山宣鑑, 782~865)이다. 이 덕산에게서 배출된 제자가 설봉 의존이다. 설봉은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 사람이다. 17세에 출가하고 얼마 되지 않아 무종의 회창폐불(845년)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설봉은 열심히 정진하며 세 차례나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선사를 참문하고 아홉 차례나 동산양개를 찾아가 법을 찾는 구도자였다. 동산의 소개로 덕산 선감을 참례해  법을 받았다.

설봉은 열반할 때까지 설봉산에 주하면서 법을 펼쳤다. 설봉산은 겨울에 눈이 제일 먼저 내리므로 ‘설봉(雪峰)’이라 하였다. 이 무렵 희종(862~888 재위)이 설봉에게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자색 가사, 그리고 ‘설봉사’ 편액을 하사하였다. 설봉은 이곳에서 열반에 들어 설봉사에 ‘의존조사탑(義存祖師塔)’이 안치되어 있다. 이 조사탑은 사리를 모신 것이 아니라, 다비하지 않고 설봉의 전신을 탑 속에 모셨다. 

설봉의존의 전신이 모셔진 의존조사탑. 중국 복건성 복주 설봉사에 있다.

운문종의 종조, 운문문언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출가하기를 희망하였다. 운문은 어려서부터 보통의 아이들보다는 유난히 똑똑했다고 한다. 7~8세에 출가해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운문은 처음에 황벽 문하의 목주 도명(睦州道明, 780~877)을 찾아 가르침을 구했다.

운문이 절에 도착해 대문을 두드리자, 목주가 문을 열고 보더니 일언반구도 없이 ‘쾅’ 닫아버렸다. 운문이 이틀 동안 문을 두드렸으나 거절당하고 사흘째에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때 목주가 문을 열고, ‘너는 쓸모없는 바보다’라고 말한 뒤 문을 다시 닫으려 할 때, 운문의 발이 문틈에 끼었다. 그 순간에 운문이 깨달았다.

운문이 얼마 간을 목주 문하에 머물렀을 때, 목주는 운문에게 ‘설봉을 찾아가 공부하라’고 권했다. 목주의 말대로 운문은 설봉 문하로 들어가 설봉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법을 받았다. 운문의 나이 60세에 광동성(廣東省) 유원현(乳源縣) 운문산에 광태선원(光泰禪院)을 창건하고 가르침을 펴면서 운문종이 천하에 드러났다. 현재도 운문의 사찰 대각사(대각사는 비구 도량, 운문사는 비구니 도량)에 수백여 대중이 운집해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5가 가운데 ‘조동(종) 사민(士民), 임제(종) 장군(將軍), 운문(종) 천자(天子)’라고 한다. ‘운문천자’라 칭하는 것은, 황제의 소칙처럼 한 번에 결정되어 다시 묻거나 응답하지 않는 간결하고 분명한 어조로 제자들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운문록〉에서 몇 개의 공안을 보자. 

ⓐ “부처란 무엇입니까?”/ “똥 막대기이니라(乾屎厥).”

ⓑ “모든 부처가 나온 곳이 어디입니까?”/ “동산이 물위로 간다(東山水上行).”

ⓒ “선(禪)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시(是,‘예’라는 대답)”

ⓓ “도란 무엇입니까?”/ “득(得, 좋습니다)”

ⓔ “일대시교(一代時敎)란 어떤 것입니까?”/ “대일설(對一說)”

ⓕ “눈앞에 기(機)도 없고, 눈앞에 일(事)이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도일설(到一說)”
              
ⓔ‘일대시교’, 즉 부처님이 재세시 설한 가르침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대일설’, 즉 부처님이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했다는 뜻이다. 다음, ⓕ“설법을 들을 사람도 없고, 시간과 장소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에 대해 운문은 “설하지 않으면 되지(到一說)!”라고 답한 것이다. 곧 병이 없는 사람은 어떠하냐[눈앞에 기도 없고 일도 없다]는 질문에 더 이상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약도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는 대혜 종고가 그의 〈어록〉에서 중시하는 대표 공안 여섯 가지에 포함된다. 또한 ⓐ는 〈무문관〉 21칙이다.

이렇게 운문은 제자들을 제접할 때 짧은 어구로 대답하고, 그들을 지도했다. 그래서 운문종은 시적이고 철학적이며, 함축성이 담겨있어 ‘선과 문학의 결합’이라고도 한다. 또한 1구나 2구, 3구 등 짧은 문구로 대답한다고 해서 운문종의 종풍을 ‘일자관(一字關)’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운문의 선풍은 당대 이후에 발전해온 선사상과 선시의 조화로운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운문의 문하에서 덕산연밀(德山緣密), 동산 수초(洞山守初, 910~990) 등 명승이 배출되었다. 동산과 관련된 공안(洞山三頓捧, 〈무문관〉 15칙)이 있다.  

동산이 스승인 운문을 찾아갔다. 운문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사도에서 왔습니다.”

“그래, 여름철은 어디에서 지냈는고?” “호남의 보자사에서 지냈습니다.”

“어느 때에 그곳을 떠났는가?” “8월 25일에 출발해 왔습니다.”

동산의 답에 운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막대기로 3돈(60대)을 때려야 하지만, 오늘은 참는다.” 

다음날 동산이 운문을 찾아가 다시 물었다.  “어제 스님께서 저를 막대기로 60대를 때리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도무지 제 잘못을 모르겠습니다.” “이 밥통아! 강서·호남, 어디를 돌아다녔냐는 말이다!”

운문이 크게 일갈을 하자, 이때 동산이 대오했다고 한다.

여기서 돈이란 20대를 뜻하므로 3돈은 60대를 말한다. 선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지역명)가 원래의 사도가 아니고, 보자사 역시 보자가 아니며, 8월 25일이라는 숫자 역시 본래 있는 날짜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운문종은 몇 대를 지나 단멸하였다. 그러나 근현대의 선사 허운(1840~1959)이 법맥을 살려 운문종의 종풍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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