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은 성불의 중요한 수단·방편·과정
禪은 성불의 중요한 수단·방편·과정
  • 현불뉴스
  • 승인 2018.03.09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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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종 형성의 역사적 배경(선종이 지나온 발자취)

양진시대 이르러 선법수용
구마라즙·각현 이후 선학 발전
달마선 서서히 부각
승조대사 이후 ‘격의불교’ 퇴각
당나라 중엽 선종 비약적 발전
200여 년 중국불교의 주류
정토종과 선종 실참수행


불교에서 선(禪)은 번뇌를 극복하고 지혜를 계발하고 세속의 모든 잡된 인연을 끊어 피안에 도달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불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루시고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신 것도 역시 선정(禪定)을 통해서다. 따라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선(禪)법도 함께 전해져서 중국에서 특수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당나라 때 규봉종밀 선사는 선정[三昧]은 불교도들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수행법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도서〉에서 말하기를 “선정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신묘가 되고, 성품상에서 무루지혜 (無漏智慧) 및 만행만덕을 발하고 일으키게 하며, 내지 신통광명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定[삼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고 했다. 즉 선은 성불의 중요한 수단 및 방편이자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중국대륙은 크게 세 나라로 분열되게 된다. 즉 삼국시대(220~265) 45년 동안의 기간으로, 위·오·촉(魏·吳·蜀)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때의 불교는 기본적으로 한대(漢代)의 불교를 계승 발전해 오고 있었다. 한나라 말엽에 중국에 유입된 불교는 삼국시대를 거쳐서 동진 때에 이르러 널리 유포되기 시작 하였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 전통문화와의 충돌을 겪으면서 중국불교문화 및 중국문화 발전에 촉진제 역할을 하면서 면면히 계승 발전되었다. 비록 인도불교가 중국에 전해질 때 선법도 함께 유입 되었지만, 중국인들이 처음부터 선법을 흔쾌하게 받아드리지는 않은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도교의 양생술 내지 도술의 한 지류로 받아드렸다. 기록에 의하면 양진(兩晉)시대가 되서야 비로소 선법을 수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초기 선법이 그리 체계적인 것도 아니었고, 또 어느 스승에게 선법을 계승했다는 기록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고, 비로소 선사상에 통달했던 구마라즙과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覺賢)가 중국에 이르러서야 중국선학은 새로운 발전 단계를 맞았다. 

구마라즙이 중국에 오면서부터 각종 선법에 관한 전적들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특히 중국에서 초기 선법의 근거가 되고 있는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선법요해(禪法要解)〉를 번역했다. 구마라즙을 교학적으로 볼 때 반야계통의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선법계통에서는 구체적으로 누구의 선법을 계승했는지 그 원류가 불분명하며, 선법에 대한 전문적인 영역을 구축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몇몇의 고승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때에 선학의 대가인 불타발타라가 중국에 오면서 장안에서 전문적인 선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고승전·불타발타라전〉에 보면 “사방에서 청정을 좋아하는 자들이, 풍문을 듣고 모여들었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구마라즙 문하의 배척으로 인해서 부득이하게 남방의 여산으로 가게 되었다. 불타발타라는 전문적인 선법을 전한 것 이외도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등 선수(禪數·수식관(호흡관 계통경전)에 관한 경전 등을 다수 역출했다. 〈달마다라선경〉의 선경은 전통적으로는 대승선적(大乘禪籍)에 속하는 선법을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은 소승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대사인 달마다라(達摩多羅·法救)와 불대선(佛大先) 선법의 위주로서, 대소승선법을 융화해서 수립한 것이다. 이 선법의 특징은 순차적이고 점진적으로 단계를 거치는 수행법이었기 때문에 당시 승속을 막론한 불교도들의 깊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불타발타라가 전한 선법은 소승의 오종관법(五種觀法) 위주였으며, 그중에서도, 불타발타라는 일찍이 선법을 수행(학)하는 고정적 장소와, 선을 집중적으로 수련하는 풍토를 마련하기도 했으며, 구마라즙과 불타발타라 이후에 비로소 중국 선학이 흥기하기 시작 했으며, 동시에 모모선사를 중심으로 하는 수행단체가 생기기도 했다. 그중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낸 단체가 바로 달마선이었다.
이미 세속적인 중국의 종법제도(부계의 혈통으로 적자가 계보를 잇는 제도)를 채용해서 법맥체계를 정비한 시대이기도 하며, 후세에 달마가 동토초조가 되는 기틀이 되기도 했다. 특히 선종은 사자(師資) 계승법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선종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전통문화와 융화된 하나의 실례라고 하겠다.
 
오래지 않아서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번역한 〈승만경〉·〈능가경〉을 역출하면서 사람들은 선법에 대한 분류가 한층 더 분명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능가경〉에서는 네 가지로 선법을 분류하고 있다. 즉 범부소행선(凡夫小行禪·소승 및 외도선), 관찰의선(觀察義禪·아공 법공을 관하는 것), 반연여선(진여 및 실상을 관하는 것), 여래선(여래선 혹은 자각성지)으로 여래선의 최상승 경계이다. 이후에 규봉종밀은 〈도서〉에서 선을 다섯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즉 외도선·범부선·소승선·대승선·여래최상승선으로 분류했다. 종밀의 이러한 선법에 대한 분석은 아마도 〈능가경〉의 선법 분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동진 말엽부터 유송초(劉宋初)까지 불교의 대소승 각파의 학설이 균등하게 수입되었다. 불전이 점점 많이 번역되었고, 따라서 불전에 대한 해석이 흥기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경사강론(經師講論)이 흥성하기도 했다. 또 위진 시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전통사상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노장사상을 뼈대로 하는 ‘현학(玄學)’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현학이 토론하였던 중심 문제는 본체론에 관한 ‘유’와 ‘무’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즉 한나라에서 ‘우주론’을 논했다면, 이때 현학에서는 ‘본체론’에 대한 토의를 진행했다. 이 때 불교의 반야학이 중국에 유입되면서, 반야학에서 토론했던 ‘공’과 ‘유’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현학의 ‘유무론’ 사상과 유사점이 존재했다. 동진 시기의 약간의 반야학파는 왕왕 ‘격의’의 방법을 가지고 불교를 해석하기도 했는데, 즉 중국의 현학사상 내지 노장사상을 가지고 반야학을 이해하고 해석했다. 그 흔적은 당시의 반야학의 전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오가칠종’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즉 오가칠종 가운데 담제(曇濟)의 ‘본무종(本無宗)’은 사실 왕필(王弼)과 하연(何晏)이 주장했던 ‘귀무(貴無·崇無論)’로 반야학을 표현했고, ‘심무종(心無宗)’은 계강(稽康)과 완적(阮籍)이 주장했던 ‘무심(無心)’사상과 근접해 있으며, ‘즉색종(卽色宗)’은 배위(裵)의 ‘숭유론(崇有論)’사상과 관계가 없지는 않다. 동진 말엽에 이르러서 승조라는 걸출한 승려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 이러한 격의식 방법의 불교해석을 배격하면서 불교는 진정한 반야학의 의미를 역사의 무대에 올려놓았다. 특히 승조는 본무종(本無宗)·심무종(心無宗)·즉색종(卽色宗)등 삼가에 대해서 비평을 가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그는 현학의 각파에 대해서 비평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승조 대사가 전면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서면서부터 현학을 통해 반야학을 해석했던 ‘격의불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 되었다.
남북조 시기에 이르러서 불교문화와 중국 전통문화와의 충돌 현상이 각계각층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특히 정치, 경제, 종교 등 각 방면의 이익에 관한 문제에서 충돌이 심했다. 〈홍명집〉의 기록에 의하면 정치적인 측면에서 당시 중국의 봉건체제와 불교가 충돌을 하는데, 중국불교역사에서 유명한 동진 시기 혜원 법사가 주장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등도 이 문제에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출세(出世)와 입세(入世), 충군(忠君), 효부모(孝父母) 등에 관한 문제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 사상적 철학적 방면에서 역시 ‘신멸(神滅)과 신불멸(神不滅)’의 문제, 인과응보에 대한 문제 등은 결국 ‘인과(因果)’와 ‘자연(自然)’의 문제, 사람과 중생의 문제, 〈주역〉에서 주장하는 ‘人(인) 천(天) 지(地)’등 삼재(三才)의 문제, 화이 간의 차별적인 문제 등은 그 당시의 논쟁 대상이 되는 중요한 문제들이었다. 또 이 시기에 발생했던 북위 태무제(太武帝)와 북주무제(北周武帝)의 훼불사건 등이 있다.1)
 즉 정치적인 의도로서 불교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위정자들은 희망을 이루지도 못한 채 역사의 오점만 남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 선법은 중국불교사의 한 모퉁이에서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림, 강병호
그림, 강병호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곧 중국불교 발전사에서 많은 문화적 충돌과 모순 속에서도 그 생명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지에 불교의 종자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되었고, 한편 지나온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얻어진 교훈 및 경험을 축적하고 계승해 수당이라는 역사적 여정을 거치면서 불교는 또 다른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인도불교는 수당 이후 점점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먼저 태동된 것이 바로 중국화 된 종파의 수립이었다. 수나라의 대륙의 통일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는 당나라에 이르러서 각 분야에서 전성을 이루면서, 불교는 전례가 없는 성황을 맞이한다. 급기야 8대 종파를 형성시키면서 그야말로 불교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문화의 화려한 꽃을 피우기에 이른다. 당시 8대 종파 가운데서 삼론·천태·화엄·법상 등이 비교적 이론에 치중한 경향이 있었다면, 정토종과 선종은 비교적 실참수행에 근간을 두면서 서서히 민중에 펴져가고 있었다. 선종이 위진 시기로부터 당나라 초까지의 비주류를 청산하고, 당나라 중엽에 이르러서 선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면서 대략적으로 200여 년 동안 중국 불교의 주류가 되었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승승장구 하면서 찬란한 선종의 문화를 탄생시켰던 중국의 선종도 당나라 말엽 오대십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락하기 시작하였고, 송대 이후의 선종은 또 다른 모습으로 면모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선법 및 선종의 기틀을 마련한다.

1)탕일개 작, 〈불교와 중국문화〉. 종교문화출판사,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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