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중봉명본의 간화선 및 사종일지

원, 티베트불교 숭상 선종 쇄락
화두참구 간화선으로 선종 부흥

중봉명본(中峰明本ㆍ1263-1323) 혹은 천목중봉(天目中峰)선사는 원나라 때 승려이다. 속성은 손 씨이고, 호는 중봉(中峰)이며, 법호는 지각(智覺)이고 전단(지금의 항주)사람이다. 9세에 모친을 여의고 15세에 출가의 뜻을 세웠고, 후에 〈법화〉, 〈원각〉, 〈금강〉 등을 열심히 학습하기도 했으며, 아울러 선정을 좋아해서 자주 혼자서 산속으로 들어가서 좌선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는 출가 전에 이미 불교수행을 할 기초를 구비하고 있었다. 그는 24세에 고봉원묘(高峰元妙)에게 삭발을 하였고, 출가 3년 후에 구족계를 받았다. 고봉원묘는 원대 초의 임제종에서 분출된 조선계(祖先系) 선사이다. 그는 간화선을 장려하였으며, 고봉원묘와 마찬가지로 ‘무심삼매(無心三昧)’를 간화선의 최종의 목표로 삼았다. 중봉명본은 고봉원묘로부터 10년 동안 선법을 수학했으며, 한편 그의 종지를 얻었다고도 한다. 그는 선정일치(禪淨一致) 및 선교회통(禪敎會通)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선문5종과 불교 각파를 융합한 ‘사종일지(四宗一旨)’를 선양하기도 했다.

한편 고려의 28대 충선왕(忠宣王ㆍ1275-1325)은 충렬왕과 몽골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서, 원나라 황제의 힘을 업고 아버지인 충렬왕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인 왕이기도 하다. 그런 그는 중봉명본과 수신왕래로 깊은 교유를 했을 뿐만 아니라, 중봉명본의 재가 제자로 선법을 이었고 법명과 호까지 받을 정도로 그의 선법에 심취하기도 했다. 당시 원대가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원대의 황제는 수 차례나 중봉명본선사에게 예경을 표했다. 원대의 인종이 태자 시절에 중봉명본을 존중해서 법혜선사라고 불렀다. 태자가 즉위한 후에 또 중봉명본에게 불자원조광혜선사(佛慈圓照廣慧禪師)라는 이름을 증정하기도 했다. 또 금란가사를 내리기도 했고, 중봉명본이 원적한 후에는 원나라 문종(文宗)은 지각선사(智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대 순제(順帝)초년에는 다시 그를 보응국사(普應國師)로 책봉하기도 했다. 당시의 원대의 왕공귀족 문인 사대부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예배하고 참방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고봉원묘(高峰原妙)가 입적한 후 다비식을 마친 후에 천목산을 떠났다. 그 후 그는 다시 때를 기다리며 남방의 각지를 유역하였다. 그는 복덕을 겸비한 고결한 도덕적인 소양과 후덕한 불교수행을 수행하는 선사로서 비록 선종사원의 주지를 맡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르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법을 구하였기 때문에 그곳은 자연히 수행도량이 되었다.

당시 원대는 몽고인들이 세운 정부로서 몽고인들은 티베트불교를 숭상하고 중국불교는 배척하고 억압하는 형태를 취했다. 특히 교를 숭상하고 선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행하였기 때문에 선종은 날로 쇄락하여갔다. 따라서 총림도 수행을 중시하지 않는 풍토가 되어갔다. 이렇듯 당시의 선종은 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처지였다. 중봉명본은 이러한 선종의 폐단을 만회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수행자들에게 ‘마땅히 생사대사로서 자기의 중임을 삼아라(當以生死大事爲己重任)’라고 독려를 하였다.

중봉명본이 살던 시대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래로 이미 8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리고 혜능부터 중봉명본에 이르기까지 또한 6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따라서 선종도 각 시대의 굴곡진 역사의 단면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달마선 조사선 여래선 분등선 문자선 묵조선 간화선 등의 굵직굵직한 시대를 대변하는 선법이 이어져 왔고, 이외에도 크고 작은 선법의 명칭과 사상적 변화를 지나왔다. 원대에 이르러서 비록 각종 선종의 유파가 유전되었지만, 선법의 폐단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깊어져 갔다. 비록 원대의 많은 선사가 자칭 ‘불심종(佛心宗)’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선법을 전수하지도 못하고, 그저 부처를 팔아먹는 선사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는 이러한 점을 목도하고 이러한 선종의 폐단을 정화하려는 의도를 품었다. 당시 그가 목도했던 각종의 선법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곧 여래선, 조사선, 평실선(平實禪), 두찬선(杜撰禪), 문자선(文字禪), 해리(려)선(海禪), 외도선, 성문선(聲聞禪), 오미선(五味禪), 봉할(갈)선(棒喝禪), 파맹선(拍盲禪), 갈등선(葛藤禪), 향상선(向上禪) 등이다. 그는 이러한 선법의 폐단에 대해서 엄중한 비판을 가했는데, “선이 고금이래로 제방의 삼사오백 대중이 널리널리 의논을 해서, 많은 쓸데없는 명자와 잡된 글자를 세웠다. 이로 인해서 지견풍(知見風)을 일으켜서, 잡다한 독해를 선동할 뿐만 아니라, 또 정도(情濤)를 전복해서, 식량(識浪ㆍ식의 파도)이 폭등하고, 서로서로 매몰해서, 악업을 이루고 무간(無間)에 유전해 들어가서 마침내 휴식할 날이 없다. 이러한 점을 부처님께서 연민하다고 하신다.”고 하였다.

그림, 강병호

 

그는 당시의 선종에 나타난 여러 가지 폐단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선법들은 모두 선종이 본래부터 추구했던 기본정신인 ‘직지인심, 견성성불’과는 많이 위배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유형들에 대한 비평의 대상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선법수행을 하는 선학자들의 병폐이고, 다른 하나는 자칭 선지식이라고 하는 자들의 병폐라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폐단은 어떤 면에서는 당시 남방선종의 내부적인 병폐를 고발함과 동시에 그 실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봉명본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선법의 형태는 ‘지견(知見)’으로 선(禪)을 삼고, ‘정(情)’, ‘식(識)’으로 용(用)을 삼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선법은 수용해서도 실천해서도 안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악업을 짓게 할 뿐만 아니라,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한다고 보았다.

중봉명본은 고봉원묘의 선풍을 계승하였으며, 선법은 ‘간화선’을 온힘을 다해서 장려를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만약에 사람이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화두를 들고 괴귀(怪鬼ㆍ일체쓸데 번뇌망상)한 일들을 쉬어라. (그러면) 홀연히 양손이 다 탁공(托空ㆍ입 안 가득 공담(空談))일 뿐이다. 불조가 바로 가르쳐서 고통 정리해서(불조가 바로 가르쳐서 고통을 정리해서), 마땅히 그 뜻이 청정하기를 허공과 같이 한다.”고 했다. 즉 그는 화두를 하나 들기 시작했다면 오로지 일심으로 들 것이며, 일단 화두를 깊이 깨달으면 불조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또 그는 일체 참선의 목적은 모두 명심(明心ㆍ마음의 실체를 밝히는 것)해서, 심체(心體)를 증오(證悟)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즉 “심의 체에 이르러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으며, 내지 취사도 없지만, 다만 짓는 것이 있으면 모두 허망전도가 된다. 이미 이와 같이 견문각지 할 수 없다면, 곧 학인이 묻기를, 어떻게 초월해서 이것을 증입합니까? 하자, 다만 일체의 견문각지를 원리하고, 내지 능리소리(能離所離)가 함께 공적하면, 곧 영지심체가, 완연히 견문각지의 사이에 들어난다.”고 했다.

심체는 이와 같이 견문각지를 의지해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견문각지를 버리고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이 된다. 중봉명본은 이 두 가지의 모순을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가 말한 “견문각지 등은 여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여읠 수 있다.”고 한 것은 바로 그의 스승인 고봉원묘가 주장한 ‘무심삼매’와 같은 경지라고 한다. 따라서 중봉명본은 오로지 마음(정신)상태를 ‘무의식화두(無意識話頭)’에 집중을 할 때, 비로소 ‘영체심지(靈體心知)’가 드러난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간화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일체의 선법을 정리하고 선양하면서 새로운 간화선의 부흥을 열어갔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한족(중국인), 몽고인, 심지어는 ‘서역(西域), 북정(北庭ㆍ북경 원대의 수도), 동이(東夷), 남조(南詔) 등지에서 잇따라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바로 그의 선법의 영향이 멀리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중봉명본은 ‘간화선’을 장려함과 동시에 ‘사종일지(四宗一旨)’를 선도하기도 했다. 사종(四宗)은 곧 밀종, 선종, 율종 및 천태화엄 유식 삼종의 교문을 가리킨다. 일지(一旨)는 곧 이 사종이 모두 ‘일불지지(一佛之旨)’로서 모두 ‘불심(佛心)’을 확대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밀종은 봄이요, 천태, 현수, 자은종 등은 여름이며, 남산율종은 가을이며, 소림단전(少林單傳)의 종은 겨울이다.… 밀종은 부처님의 대비구제의 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교종은 부처님의 대지(大智)를 개시(開示)해서 도리를 밝히는 마음이며, 율종은 부처님의 대행(大行)을 장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선종은 부처님의 대각원만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대체로 사종은 함께 하나의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일음의 연설법으로서, 교로서는 오직 일불승을 설하기 때문에 둘도 셋도 없다. 어찌 사종을 용납하는데 다른 뜻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가 ‘사종일지(四宗一旨)’를 장려하고 선도하였던 배경에는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역사적 배경이 존재한다. 그가 생존했던 원대 초기에 유행했던 불교를 개괄하면 사종(四宗)을 들 수가 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원대는 티베트불교(라마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라마교의 교세가 가장 크고, 교문삼종(敎門三宗)은 조정에서 약간은 키워주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북방에서는 교문이 성행을 하고 있었고, 율종은 각 종파마다 당연히 봉지(奉持)하는 상황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선종의 실정이 가장 참담했다. 특히 원대에 이르러서 몇 차례의 ‘교선지변(敎禪之辯)’에서 선종에 대패를 하면서(물론 때에 따라서 약간의 우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강남으로 물러나서 은거를 시작으로, 정치적으로도 많은 압박과 제약을 받았다. 그가 이러한 상황을 친히 목도하고 경험을 하면서 선종이 처한 어려움을 깊이깊이 인식을 하였다. 즉 밀종은 봄이라고 하고, 선종을 ‘동(冬)’이라고 표현 한 것도 선종이 처한 힘들고 곤란한 상태를 암묵적으로 계절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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