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선종과 송나라 사대부

선종은 중국불교 주류
중국문화 전반에 영향

송대의 사대부들은 당의 사대부들이 행하던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 계승하고 확장 발전시킨 이들로서, 선종과 밀접한 교유를 유지하면서, 중국 선종사에서 선문화라는 하나의 장르를 탄생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특히 송대 사대부들이 참선을 배우고 선승들과 교유하는 것은 당말 오대에 들어서 이미 하나의 풍조로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송대에 이르러서 전성기를 누렸다.

선종은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주류 종파로서 불교의 중국화에 역사적 임무를 철저하게 완성하면서 사상ㆍ언어ㆍ시가(詩歌)ㆍ예술(藝術) 등 각 방면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선종은 당 중엽 이후 중국에 보편적으로 유행했는데, 근본 원인은 선오방법(禪悟方法) 및 선법을 전하는 풍토 등이 중국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중국 전통문화 중 하나인 유가(儒家)의 심성(心性)수양은 밖으로 드러내는 수양이 아닌, 내적으로 도덕적 수양과 인품을 닦고, 인격적 소양을 쌓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선종에서 주장했던 이심전심의 수행법과 맞아 떨어졌다. 송나라 사대부 문인들과 선승들의 교류가 유행했던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선법에서 추구하는 깊은 내적 깨달음과 유교의 심성수양의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송대 이후로 유행하기 시작한 삼교일치(三敎一致)사상도 사대부가 선법에 눈을 뜨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림, 강병호

중국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황하년(黃夏年) 선생은 송대 사대부들이 선종의 참선에 관심을 갖게 된 원인을 몇 가지로 분석했다. 몇 가지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첫 번째로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송대는 매우 불안한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송대는 중국봉건사회가 재차 새로운 길로 접어든 시대로서, 이 시기의 송대는 밖으로는 서하(西夏), 요(遼), 금(金) 등 소수민족 정권들의 위협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매년 대량의 국고를 서하(西夏), 요(遼), 금(金) 등 소수민족 정권에게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국고는 날로 줄어들고 국력은 날로 빈약해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백성들도 생활고에 허덕이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안으로 통치자들은 당나라 말엽 오대십국들의 군벌 폐해를 막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실행하였고, 통치계급의 내부에서는 서로 간의 파당정치로 인해서 몹시 혼란스러웠다. 파벌 간의 정치투쟁은 매우 참혹해서 사람들 스스로조차 보호하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송대의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이상이 현실 앞에 무너지면서, 그들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들은 당의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선종에서 그 해법을 찾아냈다. 즉 그들은 선종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만족감 내지 심리적 안도감을 얻었다. 이들은 세속의 번뇌 가운데서 일종의 해탈할 기회를 찾았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들에게 있어서 선종은 잠시나마 현실을 벗어나서 정신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러한 심경을 왕안석(王安石)은 자조적인 시로써 그의 심경을 표현했는데, ‘신여포말역여풍(身如泡沫亦如風), 도할득도공일공(刀割得塗共一空), 연좌세간관차리(宴坐世間觀此理), 유마수병유선통(維摩雖病有禪通)’라 했다. 이러한 송대 사대부들의 간파홍진(看破紅塵ㆍ세상을 달관하다)을 통한 참선에 대한 도전적인 태도는 그 후 중국 사대부들의 전통이 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송대가 전제정치 통치시대로서, 사상적 영역은 유ㆍ불ㆍ도의 사상적 융합으로 형성된 이학(理學ㆍ신유학)을 관방의 통치사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학(理學) 중에서 봉건시대의 충효 논리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사회의 중요한 지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유학은 중국 사대부들의 정신적인 근간이며, 지속적으로 중국 사회의 사상적 주체가 되어 왔다. 장기간 유교가 발전하면서 각 시대 통치자들은 유교의 윤리사상을 통치적 이념으로 삼았다. 공맹사상은 오직 입신양명에 기반했고, 통치를 하는 데 있어서 유교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전반을 아우르기에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다. 특히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사상 및 문헌을 탐구해온 송대 사대부들의 지적 수준은 유교와 도교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높은 의식 수준과 현실적 딜레마를 함께 품고 있었다. 때문에 현실을 초월하고 공맹사상을 뛰어넘는 ‘선법’이야말로 송의 사대부들에게는 새롭고도 신선한 사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실제로 참선은 또 다른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고, 지혜의 눈을 개발해주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다른 각도에서 펼칠 수 있는 좋은 길잡이 혹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선종의 핵심적 개념 중에 하나인 즉심즉불(卽心卽佛)은 자성의 특징을 계발해서 세상에 드러내어 본심을 계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는 것이다. 즉 선종은 이러한 법문을 표현하는데 매우 적극적이고 활발발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사대부들 역시 대체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나름 문화소양이 풍부하다고 자부하였다. 따라서 선종이 표방했던 선풍은 사대부들이 지향하는 방향 및 개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며, 선종의 정신을 통해서 사대부들은 자기들의 재능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선종에서 강조했던 ‘돈오경계(頓悟境界)’는 그들의 문학예술 및 심미(審美)적 세계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송대 선종의 고승들은 보편적으로 사대부 문인들과 밀접한 왕래를 하였고, 서로 상통하는 점을 주목해서 유불도 합일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 많은 유학자들이 선종의 사상이나 불교의 사상적 체계를 모방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체계를 수립하면서, 중국의 전통사상은 새로운 변신을 통한 새로운 사상적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송명 이학(理學)의 탄생이다. 특히 불교의 심성론을 유가에서 흡수해서, 유학의 심성론으로 재정비하면서 이학(理學)으로 발전시켰다. 초기 이학(理學)의 심성론은 선종의 심성론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론적으로 빈약했다. 중국 문학도 또한 선종의 영향으로 인해서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네 번째는 ‘송대 사회의 풍토는 이미 선종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일반 백성은 물론, 위로는 황제와 조야의 사대부들 중에서도 입선(入禪)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황제 가운데 송 태조, 송 태종은 불교를 신봉하였고 대장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사대부 문인들 중 송인종(仁宗)은 일찍이 〈투자의청선사어록(投子義靑禪師語錄)〉을 열독하기도 했으며, 송신종(神宗) 역시 선에 심취했다고 한다. 송효종(孝宗ㆍ1127~1194)은 대혜종고에게 선도(禪道)의 이치를 묻기도 했다. 이외도 사대부 관료들을 살펴보면, 구양수ㆍ소동파ㆍ왕안석ㆍ주돈이(周敦)ㆍ정이(程)ㆍ주희(朱熹) 등은 일대의 대문호이며, 대유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선사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교유했다. 특히 주돈이(周敦)는 일찍이 황용해남(黃龍慧南)을 참알하기도 했으며, 매당조심(晦堂祖心)에게 도를 묻고, 불인요원(佛印了元)을 참배하고, 동림상총(東林常總)선사에게는 사사하기도 했다. 정이(程)는 영원유청(靈源惟)선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자주 서신으로 왕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구양수(歐陽修ㆍ1007~1072)는 한유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유교의 입장에서 〈본론(本論)〉을 지어서 불법을 훼방하고 선승을 공격하고 폐불을 주장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도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계숭선사(契嵩禪師)가 이것을 목도하고 이러한 작풍에 대적하기 위해서 유불도 삼교의 합일사상인 〈부교편(輔篇)〉을 지어 반박해서 정(正)을 가렸다. 구양수가 이 책을 보고 자기의 배불관점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계숭 스님을 칭찬하기를 “뜻밖에 승려 가운데 이러한 용상(龍象)이 있는 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후일 의관정제하고 계숭선사를 참방하고 본인을 일깨워 주기를 청했다. 후일 여산동림원통사(廬山東林圓通寺)의 조인거눌(祖印居訥)선사를 만나서 선학을 담론한 후에 크게 깨닫고 돈독한 불자가 되었으며, 자칭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칭하기도 했다.

또 원본화상(元本和)의 〈총림변영편(叢林辨篇)〉에 보면 송대 상층 관료이자 사대부인 부필(富弼), 양억(楊億), 이준욱(李遵勖), 양걸(楊傑), 장육영(張育英), 장구성(張九成), 이병(李), 여본중(呂本中) 등은 모두 일찍이 선학에 심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벼슬을 하면서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이들이 선승과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등록(燈錄)〉, 〈어록(語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기도 했으며, 특히 사대부인 양억(楊億ㆍ종경록 서를 쓰기도 했다)과 이준욱(李遵勖ㆍ진종의 부마)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을 편찬하는 책임을 맡기도 했다. 양억(楊億)은 진종(眞宗) 때 한림 학사였고, 또 다른 벼슬을 겸임하고 있었다. 이준욱(李遵勖)은 부마로서, 두 사람은 임제종의 승려인 광혜원련(廣慧元璉)과 곡은온직(穀隱蘊職)과 밀접한 관계였다. 특히 인종(仁宗)에게 〈천성광등록서(天聖廣燈錄序)〉를 짓게 권하기도 했다. 소동파는 당대의 대문호로서 시(詩), 서(書), 금(琴), 화()를 뛰어넘는 걸출한 문인이었으며 불학에 깊이 심취하기도 했었고, 선승들과도 깊은 교류를 하였는데, 그 중에 특히 불인선사(佛印禪師)와는 아주 밀접한 사이였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그는 어록 등에도 많은 서(序)와 선시를 짓기도 했다. 그가 지은 선시 중에 계수천중천(稽首天中天), 호광조대천(毫光照大千), 팔풍취불동(八風吹不動), 단좌자금련(端坐紫金蓮)과 계성진시광장설(溪聲盡是廣長舌), 산색무비청정신(山色無非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似人) 등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선시이다. 이러한 현상은 송대 선종이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으며, 송대 사대부들이 선승과 교유하는 풍토는 당시 사회에서 일종의 사회적 풍조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송대 선종은 각계각층에 영향을 주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송대의 선종과 문인사대부들의 밀접한 왕래는 유불도 삼가의 사상을 교합해서 사상적으로 융합을 촉진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은 유가학설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으며, 송명이학(理學)을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많은 유학자들은 불교의 사상적 교리체계 및 선종 사상을 토대로 유학의 사상체계를 수립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이로써 중국 전통철학은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즉 역사적으로 명명되어진 송명이학(理學)이다. 한편 송대의 사대부 문인들의 적극적인 참선에 대한 관심은 문학에서도 꽃을 피워 송나라의 독특한 선문화라는 새로운 풍토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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