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송행수, 조동종 대표하는 선사
만송행수, 조동종 대표하는 선사
  • 현불뉴스
  • 승인 2018.09.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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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금원시기 조동종의 만송행수선사

천동여정과 조동종 양대 종장
혜만 참방 한 달만에 철오
송원 이후 선정쌍수 성행

 

만송행수(萬松行秀·1166-1246)선사의 속성은 채(蔡)씨이며, 현재 하남성 회경(懷慶)사람이다. 남송때의 청원 문하의 22대로서 조동종의 승려이다. 자는 보은(報恩)이며, 호는 만송노인(萬松老人)이다. 15세 때에 형주(邢州)정토사 찬윤선사(贊允禪師)에게 삭발 후에 출가하고 오래지 않아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원정 종원 원년(元定宗元年ㆍ일설에는 단평ㆍ1236) 연경(燕京ㆍ지금의 북경)에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81세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입적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서 사리탑을 세웠다. 전국에 두 곳의 탑을 세웠는데, 하나는 북경(西城區西四南丁字街西)에 있는데 세칭 만송노인탑(萬松老人塔)이라고 칭하며, 다른 하나는 형대(邢台市西南古塔群中)에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문화혁명 중에 훼손되어서 지금은 없다.

그는 조동종 제14대 종주로서, 당시 강남의 천동여정(天童如淨ㆍ1163~1228)과 함께 조동종의 양대 종장(宗匠)으로 이름을 날렸다. 금나라 장종 명창 4년(章宗明昌ㆍ1193)년에 황제로부터 비단대가사를 하사 받기도 했다. 그는 남하해서 자주 대명사(磁州大明寺) 설암혜만(雪岩慧滿ㆍ?~1206)선사를 참방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철오(徹悟)하였다고 한다. 법을 얻은 후에 그의 명성이 각지에 알려지게 되었고, 각지에서 그에게 설법을 청함과 동시에 그곳에 주석해주기를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청을 모두 거절하고 형주(邢州)로 돌아가서 정토사(淨土寺)에 만송헌(萬松軒)을 건립해서 그곳에서 대중을 제접하면서 자신의 수행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서 그는 만송(萬松)이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 그가 수년 동안 정토사에 주석할 때는 그를 참방하러 오는 이가 끊이지 않았고, 한편 조야의 모든 이들이 그를 경모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북방의 승속들로부터 추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금나라와 몽고 양국의 조야로부터 보편적인 추종과 존경을 받았다. 금나라(明昌四年ㆍ1193) 장종(金章宗ㆍ1168~1208)이 매우 그를 공경하기를 그가 궁전에 설법을 할 때 “장종황제는 몸을 굽혀서 예를 올렸다(于內殿說法,章宗躬身迎).”고 전해진다. 몽고가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도 만송선사는 지속적으로 몽고의 조정으로부터 예우를 받았으며, 후에 몽고 조정의 국사가 되기도 했는데, 당시 원대에 전체 중국불교계에 국사라고 칭하는 사람은 오직 9사람뿐이다. 이 가운데 만송행수선사가 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당시의 북방불교의 영수가 되었다.

만송선사가 종용암(從容庵)에 거할 때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초청에 응해서 굉지정각(宏智正覺)의 평창(評唱)의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저본 삼아 〈종용록(從容錄)〉 6권을 지어서, 조동종의 선풍을 전했다. 그 외도 〈請益錄〉, 〈祖燈錄〉, 〈釋氏新聞〉, 〈鳴道集〉, 〈四會語錄〉 등의 저작이 있다. 특히 많은 저술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종용암록(從容庵錄)〉과 〈청익론(請益論)〉이다. 〈從容庵錄〉은 만송행수가 천동정각의 〈송고백칙(頌古百則)〉을 평창(評唱)한 선학의 명작이다. 〈從容庵錄〉은 매칙(每則)의 공안이 모두 5항으로 구성되었다. 즉 제1부분은 시중(示衆)으로, 공안을 위해서 서론을 지었다(示衆). 제2부분은 정각의 〈頌古百則〉에서 발췌한 공안이다(列擧公案). 제3부분은 공안에 대한 평창(評唱)이다(列擧頌古). 제4부분은 정각의 〈頌古百則〉에서 발췌한 송고(頌古)이다(공안, 頌古中夾注). 제5부분은 송고에 대한 평창이다. 때문에 〈從容庵錄〉의 요지는 〈頌古百則〉의 깊고 오묘한 것을 찬석하였다. 그러나 이 〈從容庵錄〉은 완전히 〈벽암록〉의 형식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림, 강병호
그림, 강병호

 

한편 그는 비록 선학 위주의 수행을 하였지만, 화엄에 정통했고, 정토를 추종했기 때문에 금대(金代) 정토종의 5대 영수(領袖)가운데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특히 〈창평천동정각화상송고종용암록(評唱天童正覺和頌古從容庵錄)〉은 당시 선종의 명작이 되기도 했다. 그의 재가 제자인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서(序)에서 “조동의 혈맥을 이었으며, 운문의 善巧를 갖추었으며, 임제의 機鋒을 구비했다(得曹洞血脈, 具雲門善巧, 備臨濟機鋒).”고 평가했다. 이 외에도 그는 선종의 제종파의 사상은 물론이거니와 유가의 사상도 계승발전시켰기 때문에 세인들이 그를 “유석을 겸비하였고, 종설(宗說)에 정통하였고, 변재가 무애하다(儒釋兼備, 宗說精通,辯才無).”고 평했다. 송대 원초(元初)에 선종의 오엽(五葉) 가운데서 臨濟, 曹洞宗이 크게 흥성하였다. 때문에 당시에 세인들은 “임천하, 조일각(臨天下, 曹一角)이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이러하다. 즉 “임제종풍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광대하게 뒤덮고 있다. 조동종의 위엄은 동남에 떨쳐서 영향이 매우 깊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조동종이 성행한 이유는 바로 만송행수선사가 온힘을 다해서 조동종의 선풍을 드날린 덕택이다. 송원이후로 선정쌍수(禪淨雙修)가 매우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그도 역시 선정쌍수를 중시하기도 했다.

만송행수선사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에서도 매우 복잡한 양상을 한 상태였다. 즉 금(金), 원(元), 송(宋)의 정권이 함께 존재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록에 의하면 그는 금나라 조정과 밀접한 왕래를 하였고, 원나라 조정과도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송나라 사람들은 그를 완곡하게 비평을 하였고, 따라서 그에 사적에 관한 기록은 매우 희소하다. 그러나 도리어 선종발전사에서는 그가 남긴 위치와 명성은 지워지지 않았다. 또 그의 인간적인 면을 잘 드러내는 고사가 있다. 원대 1236년 원대조정은 승려들에게 고시(考試)제도를 시행하였다. 불합격자는 귀족이라도 모두 환속을 시켰다. 원대 조정에서는 이러한 중책을 행수선사에게 맡겼다. 행수선사와 임제종의 해운인간(海云印簡ㆍ1202-1257)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 하면서 잘 방편을 사용해서 설사 일자무식이라도 도행이 양호하면 한 사람의 승려도 낙방을 시키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행수선사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법을 얻은 제자들만 120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도 걸출한 제자 5명이 있는데, 설정부유(雪庭富裕ㆍ1203-1270), 화엄지온(華嚴至溫ㆍ1217-1267), 임총종륜(林泉從倫ㆍ1223~1281), 천송명덕(千松明德)과 담연거사(湛然居士ㆍ 야률초재)등이 있는데 이들을 가리켜서 ‘오걸(五傑)’이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원나라 초에 모두 불교와 정치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던 것으로 유추된다. 간단하게 이들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임총종륜(林泉從倫)그는 일찍이 만수사(萬壽寺)와 보은사(報恩寺)에 주지를 역임했다. 지원(至元ㆍ1272)9년에 원나라 세조의 초빙으로 궁전에 들어가 설법을 하였는데, 그는 ‘從容問辨, 抵暮而退, 帝大悅’라고 했다. 그는 〈화엄〉, 〈능가〉, 〈열반〉 등 경전을 인용해서 선은 ‘불성’, ‘여래장’이며, 즉 ‘달마이래로 서론 전한 것은 여래청정선’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것으로 선은 곧 불교의 정종이 된다고 하면서, 선교일치를 주장하였다. 그가 원나라 초엽 연경의 민충사(憫忠寺ㆍ북경 법문사)의 주지를 역임할 때 도교와 불교가 논쟁을 할 때 불교의 대표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저작으로 유명한 〈공곡집(空谷集)〉, 〈허당집(虛堂集)〉 등이 있다.

화엄지온(華嚴至溫)도 만송행수선사를 15년간 좌우에서 시봉을 하였고, 특히 당시 유명한 정치가 유병충(劉秉忠)과 유년시절부터 교류가 있었다. 그의 인연으로 인해서 그는 당시 관서오로(關西五路)를 통섭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이 지역의 불교방면을 보호하고 진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후래 승려들이 평하기를 ‘今人獨味萬松評唱語, 而不聞公(至溫을 말함)有回天之力’이라고 했다.

설정부유(雪庭富裕)는 역시 10여 년을 행수선사에서 학습을 하고, 금나라와 원나라가 교전을 할 때, 훼손된 숭산소림사를 행수선사와 해운인간(海云印簡)의 지지를 얻어서 복원하고 부흥하였다. 후에 헌종(憲宗)을 알현하고, ‘총령석교(總領釋敎)’라는 명을 받고 각지의 훼손된 사찰 236처를 중건하였다. 이러한 그의 공으로 소림사는 조동종 행수선사계통의 중요한 전법지가 되었다. 그도 역시 불도논쟁에 참가한 중요한 인물로, ‘광종정변(光宗正辨)’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담연거사(耶律楚材)는 역시 만송의 제자로서 많은 보살도를 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비록 원대(몽고)조정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중원의 정치 경제문화질서와 백성들의 생명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기도 했다. 후에 그는 원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탁월한 정치가로서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러한 걸출한 제자를 배출해낸 만송행수의 선종에 대한 공헌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그의 뛰어난 수행력과 그의 중량감과 사회적 영향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임제종의 선법과 임제 계통의 선사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기타 오가칠종 가운데서 임제종 외에는 다른 종파의 선법 및 인물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만송행수는 원대를 대표하는 조동종의 걸출한 선사로서 선종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또 그는 선종의 일대종장으로 당시의 종교계 정치계 사회적으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금나라 원나라의 조정대신은 물론이거니와 사대부 문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또 그를 혹자는 그를 평하기를 “조동종 아래에 만송 한 가지가 있어서, 제방을 덮고, 다시 천하를 그늘지게 하며, 세상을 모두 들어서 조도(祖道)를 중흥하고, 법해에서 용이 논다(洞山之下, 萬松一枝, 布列諸方, 蔭複天下, 世鹹謂中興祖道, 法海之遊龍也).”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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