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선종 이외의 선사들

각현·달마 양대 선법 형성
북방서 다양한 방편의 선법 발달
밀주(密呪) 결합된 비정통 선법 등장
북방 선법 동쪽으로 이동 발달
승조·현고·담무참·담요 이끌어

 

동한 말엽에 안세고가 전한 ‘안반선’과 ‘12문’등 소승선법, 지루가참이 전해준 ‘반야선’과 ‘수능엄삼매’등 대승삼매선법(염불선)은 중국불교사 및 선종사에서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당시의 정황으로 비교해 볼 때 안세고의 초기선법인 ‘안반선’은 상대적으로 시대를 주도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러한 선법들은 중국선법에 용해되어서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초기 선법이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선(조사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중국불교역사에는 존재한다. 특히 초기선법에 있어서 각 방면에 영향을 주었던 당시의 몇몇 선사들의 활약상과 행적에 대해서 살펴보면, 승조(僧稠)·현고(玄高)·담무참(曇無讖)·담요(曇曜)등이 그들이다. 당시 이들은 순수한 선법수행만 한 것이 아니고, 각자 수행법에 밀주(密呪)를 결합해서 수행한 특징이 있으며 신이(神異·신통력)한 능력을 가진 선사들이었다.
초기선법이 중국에 들어와서 유통되는 과정을 고찰해 보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전들이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다량으로 선법에 관련된 경전들이 번역되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선법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유행하였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남북조시기에 유행했던 선법을 세 가지 종류로 압축해서 말하기도 한다. 첫 번째는 안반선 위주인 소승선법으로 수식관 혹은 호흡법 종류이다. 일반적으로 중국학자들은 이러한 선법을 선수학(禪數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수식관 내지 호흡관 등의 초기선법은 숫자를 세는 방법으로 선법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관불(觀佛)혹은 관상(觀想)위주로 번뇌의 성향에 맞도록 대소승 선법을 겸용해서 지도 했던 수행법이다. 즉 오정심관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세 번째로 대승불교의 여래장 불성인 여래선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선법들이 중국 토양에 씨를 뿌리면서 중국선의 밑그림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이래로 안세고의 소승경전 번역을 필두로 지루가참의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불교경전이 전해지면서 동시에 실천수행도 따라서 유입 되었는데, 그 가운데 북위에 이르러서 중국 낙양의 소림사를 중심으로 두 가지의 선법이 전해졌다. 하나는 불타발타라선사(佛陀跋陀禪師·각현) 계통의 선법으로 그의 제자인 승조(僧稠)가 전승되었고, 다른 하나는 달마선사(達磨禪師) 계통의 선법이다. 당시 승조 및 현고 등은 관선(官禪)의 대표적 주자로서 그들의 선법은 우세한 위치에 있었으며, 동시에 매우 유행하고 있었다. 불타발타라선사가 전한 선법과 달마대사가 전한 선법에 작은 차이점이 드러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쌍방 간 대등한 위치가 되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또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이후 크게 두 개의 지역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서 주로 북방에서 비교적 풍부하고 다양한 방편의 선법이 초석을 이루면서 발전해 가고 있었다. 특히 북위 때의 잦은 전란으로 인해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위수. 석로지〉에 의하면 태무제가 태연(太延·439) 5년 양주(凉州)를 멸망시키고, 양주의 승려 삼천인을 평성(平城)으로 이주를 시켰다고 한다. 양주는 본래 불교가 매우 발달하였고 동시에 선법도 매우 발달하였다. 당시 초기선법의 중요한 선사들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이주해 오면서, 북위 때 선법은 더욱 발전을 하게 되었다. 동쪽으로 이주해온 선사들을 살펴보면 승조(僧稠)·현고(玄高)·담무참(曇無讖)·담요(曇曜) 등이 있다. 여기서 담요는 현재 산시성의 대동오굴(大同五窟)을 조성한 인물이기도 하며, 대체로 북위의 황제들은 선법 수행을 독려하기도 했다. 당시 남방에서는 중국전통사상인 현학(玄學)이 유행하고 있었다. 북방의 선학이 흥기하고 발전하면서, 북위시기의 선법은 이미 체계적인 전승법이 출현하였으며, 한편 그것과 상응하는 규모를 갖추기도 했다. 〈위서·석로지(魏書·釋老志)〉의 기록에 의하면 태무제(太武帝)때 사문 혜시(惠始)가 있었는데 “백거북에서 좌선을 하는데, 낮에는 성에 들어가서 강의를 하고, 저녁에는 돌아와서 정좌(靜坐)한다.(坐禪于白渠北, 晝則入城聽講,夕則還靜坐)”고 하고 있다. 즉 선수행을 하고 있는 당시의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승려들은 서역불교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대체로 승려들은 신이(神異·신통력)한 색채를 띠기도 했다. 즉 밀주(密呪)와 결합한 선법을 겸해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이한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담무참(曇無讖)은 “처음에는 소승을 배우면서, 겸해서 오명제론(五明諸論)을 열람했다.”고 하며, “후에 백두선사(白頭禪師)를 만나서, 담무참과 함께 논의를 했다”고 〈고승전·담무참전〉이 기록하고 있다. 백두선사의 선법도 역시 서역불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밀교의 밀주(密呪)를 서로 결합한 수행을 하였다. 비록 이러한 선법들이 선의 본뜻에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북방지역에서는 매우 환영을 받았으며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정통의 선법이 당시는 상당부분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이면에는 아마도 당시의 사회 환경 내지 당시 사람들의 마음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추측컨대 당시의 사회 환경이 잦은 전란으로 인해서 앞날은 불투명하고 안정된 미래를 보장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신비적인 신통력을 신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특히 전쟁의 동란이 끊이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비추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고(玄高)는 12세에 출가한 후 오로지 선법을 닦았고, 그는 관중에 불타발타라(佛陀(馱)跋陀羅)가 석양사(石羊寺)에서 홍법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가서 참배하고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타발타라는 현고가 선법을 깊이 익혀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여겨 스승의 예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정확하게 불타발타라에게서 선법을 전수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그 후 현고는 맥적산(麥積山·지금의 감숙성)에 은거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고 그의 선법을 배웠다고 〈고승전·현고전〉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현고의 선법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현고를 수장으로 하는 북방선학의 승단이 수립되었다. 일명 북방의 관선(官禪)이라고 한다. 그 후 현고는 양주(凉州)를 유역하다가 북양(北凉)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중시를 받기도 했으며, 북위의 탁발도(拓跋燾)가 평성(平城)을 점령하였을 때 현고를 평성으로 영접해서 태자의 스승을 삼기도 했다. 후에 태무제(太武帝)의 훼불 때 해를 당하기도 했다. 현고의 선법은 안반수의선(安般守意禪)에 속한다. 안세고가 소개한 선법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이승(神異僧)으로 많은 이적을 보이기도 했다. 역시 당시의 많은 선사들이 선법을 겸해서 밀주(密呪)을 염하고 신통력을 발휘하였듯이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승조(僧稠·480-560) 선사는 속성이 손 씨이며, 현재의 하북성의 형대시 거록현(邢台市巨鹿縣)의 사람이다. 그는 출가 전 이미 모든 경서 및 역사를 통달하였고, 이러한 그의 명성은 조정에까지 알려지면서 태학박사(太學博士·벼슬의 일종)가 되었다. 그는 어느 날 불경을 열람하다가 마음의 의문이 일순에 사라지면서 거록(鹿) 경명사(景明寺)의 식(寔)스님에게 출가를 하였다. 즉 그는 처음에 도방선사(道房禪師)에서 지관(止觀)을 수행했다고 전해지며, 법맥을 살펴보면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불타제자·혜광(慧光)과 도방선사(道房禪師))→승조선사(僧稠禪師)로 이어지고 있다. 승조가 이은 선법은 비교적 복잡하다. 물론 기본 바탕은 불타발타라를 근원으로 하고 있지만, 그는 먼저 도방선사(道房禪師)에게서 지관을 전수받고, 최후에 불타발타라에게서 인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승조의 선법은 불타발타라의 선법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림.강병호

 

승조의 기본선법은 ‘사념처(四念處) 및 십육특승법(十六特勝法)’이다. 사념처 수행법은 소승선법으로 오정심관(五停心觀)을 수행한 후에 수행하는 관법이다. 그런데 사념처에 대한 순서 내용은 각 경전에서 설명하는 것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근본 뜻은 모두 동일한 내용이다. 십육특성법은 조심(調心)·수식(數息)·관상(觀想) 등 구체적인 수행방법으로 최종에 역시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는 자주 입정에 들어갔는데 “9일을 일어나지 않았다(七日爲期, 九日不起)”고 전해진다. 그리고 승조 선법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고행의 수행법인데, 그는 고행을 통해서 해탈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물론 부처님 당시의 외도들이 한 고행 수행법이 아닌, 즉 성욕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금욕·식욕절제·사상(死想)등의 수행이다. 비록 승조의 선법은 소승선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비교적 수행의 대상이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수행법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승려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특히 고행수행법은 상층부 통치자들의 지지와 추종을 받았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승조선사의 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태였으며, 당시의 보리달마 및 혜가 선사 등은 그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당나라 도선이 지은 〈습선편·총론(習禪篇·總論)〉에서 승조가 선법에 대해서 편애가 있다고 적고 있으며, 달마선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불만이 있었다고도 한다. 승조가 ‘사념처’와 ‘십육특승법’을 의지해서 수행해, 비교적 이해하기가 간명하고 쉬웠기 때문에 일반적인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받아 들이가 용이했을 것이며, 동시에 광범위하게 유행을 했었던 것 같다. 반면에 달마선법은 자심을 직관에 의지해서 깨닫는 것을 주장했으며, 특히 ‘망언망념, 무득정관(忘言忘念, 無得正觀)을 위주로 최종에는 여래장불성에 대해서 자오자증(自悟自證)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기 때문에 이 수행법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화적 소양 내지 직관의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수행법으로, 통상적으로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수행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승조의 선법은 중국의 북방지역사회에서 실제적으로 필요한 선법으로, 당시의 북방사람들의 심리상태에 적합한 수행법이었던 것 같다. 반면에 달마선법은 상대적으로 당시 북방사람들의 심리적 상태 및 환경과 부합되지 않은, 그 어떤 거리감이 존재했던 것 같다. 특히 달마선은 당시로서는 반전통의 입장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달마 및 그의 제자들이 활동상에 제약을 받았던 것 같고, 특히 달마의 독살설, 양무제와 만남에 대한 전설, 숭산의 십년 면벽 등은 이러한 당시의 풍토를 잘 반영한 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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