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은 선종의 초월적 정신세계에 매료 중
당은 선종의 초월적 정신세계에 매료 중
  • 현불뉴스
  • 승인 2018.07.2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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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당대(唐代) 사대부와 선종

선종의 전파 사대부 주도
백거이 등 당대문인 선종 추종

선종에서 추구하는 선오(禪悟)의 경계는 바로 본래 나와 자연과 합일 내지 현실과의 일체가 되는 경계를 추구하기도 하며, 동시에 자심(自心)의 본성을 개발할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티브는 당시 문인이자 사대부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즉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며, 동시에 선종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나라 중엽(盛唐)으로 접어들면서 사대부 문인들은 보편적으로 불교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특히 불교는 그들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사유방식 및 심미적 추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가(詩歌) 예술에서 이들의 표현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시인들은 선학의 초월적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동진 이래로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 중국 전역에 불교가 유행되었다. 어떤 학식이 있는 사대부들은 불법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인과 고승들 간의 교류가 또한 하나의 사조를 이루면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당대의 유원종이 말하기를 “옛적, 사문의 상수들은 현명한 사대부와 더불어 내왕하기를 좋아했고, 진송 이래로 도림, 도안, 휴상인 등이 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교유했던 사안석, 왕일소, 습착지, 사운영, 포조 등은 모두 그때 엄선된 인물들이다. 이 진승법인은 유전과 더불어 병용하였기에 사람의 향방을 알게 했다”고 평했다. 당대는 불교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로서 종파 또한 난립하였고 승려도 많았다. 불전은 천하에 유행하였고, 사원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건립 되었다. 문인 사대부는 당나라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즉 사회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주체들이었다. 불교문화의 발전은 당연히 문인 사대부들의 참여가 아니고는 전파 할 수가 없었다. 아울러 사대부 문인들 간의 교류는 당대 불교문화를 전파하고 발전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 황제들도 불교를 숭상하였다.

당대 사대부가 불교를 숭상한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당대 불교는 대부분 통치자의 지지와 제창이 있었다. 통치자가 불교를 장려하면서 당연히 사대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사대부들은 통치자들과 영합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사대부들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승려들을 초청해서 제단을 설치하고 의식을 베풀기도(設齋念經)했다.

두 번째, 사대부들이 과거시험공부를 위해서 사원에서 은거를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불교문화에 물들었다. 불교는 사대부들이 실의에 빠졌을 때 의지처가 되기도 했다.

세 번째, 불교선종이 문인에게 준 영향이다. 범문란(範文瀾)의 〈중국통사간편(中國通史簡編)〉에 보면 “중국 사대부 입맛에 맞는 종교이다(适合中國士大夫口味的宗敎)”고 선종을 평가하고 있다. 일상 관료 정치체제 속에서 현실의 모순을 피해 잠시나마 정신적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으로 선종 총림의 선사들과의 교류를 들 수 있다. 고승들과 교유를 통해 복잡한 현실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선종만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초월적 정신세계의 경계에 그들은 점점 매료되었다.

그림, 강병호
그림, 강병호

 

선종 초기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주로 하층민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사대부 및 상층부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혜능 계통의 남종선이 전국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당나라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선종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 졌고, 선종의 존재가 당나라 사대부 및 관료 등 상층부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나라 중엽 말기의 번성기를 끝으로 안록산의 난을 거치면서, 사대부들은 선종에 대해서 더욱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중국 사대부들의 희망이 입신양명에 있다면, 그 바탕은 유교의 정신과 이념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들이 선종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를 유추해 보면 그들은 현실도피처로서 선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정신적인 안위를 받을 수 있는 방법과 심리상의 만족감을 채울 수 있는 장소 혹은 의지처로서 선종을 지목했다. 때문에 또 다른 측면에서 당대 사대부들의 참선활동은 안록산의 난(安史之亂)이후 남종선이 흥성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대(唐代)의 유명한 사대부 문인들 중에서 선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백거이(白居易)는 본래 정통한 유학자면서 도교를 깊이 신봉하기도 했다. 반면에 불교에도 정통하였고 많은 선사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그가 임종할 때 향산의 불광여만선사(佛光如滿禪師)탑 곁에 묻어줄 것을 유언하기도 했으며, 후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왕유(王維)는 하택신회(荷澤神會)와 일찍이 교류를 하였으며, 자주 만나서 도(道)에 대해서 담론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시(詩) 가운데에서 선의 철학적 의미를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유명한 시로서 ‘인한계화락(人閑桂花落), 야정춘산공(夜靜春山空). 월출경산조(月出山鳥), 시명춘윤중(時鳴春潤中)’라고 하였는데, 시의 대략적 내용은 선종의 정중동(靜中動), 공유불이(空有不離), 불이경계(不離境界) 등의 사상은 선종에 깊은 의미를 은유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고색창연한 총림에서 홀연히 만난 봄의 기운을 통해서 나름의 활연오도(豁然悟道)한 경계 및 심정을 시로 표현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묻어둔 감성 자극은 물론이거니와 선미(禪味) 내지 선리(禪理)의 철학적 경계까지 시 한편을 통해서 표현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선의(禪意)가 충만한 관계로, 사람들로 하여금 선미(禪味)를 음미토록 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일찍이 천복사(福寺)의 도광선사(道光禪師)와도 깊은 교류가 있었으며, 또 하택신회의 요청에 의해서 〈육조선사비명(六祖禪師碑銘)〉을 쓰기도 했다.

또 당대의 이백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시성(詩聖)이라는 불리는 두보(杜甫)도 선에 대해서 “신허쌍봉사(身許雙峰寺), 문구칠조선(問求七祖禪). 락범추숙적(落帆追宿昔), 야갈향진전(夜褐向眞詮).”이라며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서 쌍봉사는 동산법문의 황매조정(黃梅祖庭ㆍ근원지)을 말하고, 칠조선(七祖禪)은 달마선으로부터 북종선의 7조인 하택신회 선법을 말한다. 두보는 또 다른 시에서 “여역사찬가(余亦師璨可), 신유전선적(身猶纏禪寂). 하계우방편(何階於方便), 류인위필적(謬引爲匹敵)”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찬가(璨可)는 당연히 승찬을 말한다. 아무튼 두보는 선종의 사상 및 인물들을 매우 추종하였다. 또 당대의 현종(文宗)을 도와서 개원(開元ㆍ당 현종의 연호로서 중국 역사에서 매우 번성했던 시기이다. 즉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기 전을 말한다)의 시대를 연 명재상인 장설(張說ㆍ667~730)은 유명한 정치가이면서 문학가이기도 한데, 그도 역시 육조대사가 원적한 후에 애틋한 감정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즉 “대사염세거(大師厭世去), 공여법력재(空余法力在). 원기무애향(遠寄無碍香), 심수도남해(心隨到南海)”라고 했다. 역시 당대의 대문학가인 유종원(柳宗元)이 유주(柳州)에서 재직을 할 때 선승들과 자주 왕래를 했다. 그를 가리켜서 ‘일시남방제대덕비명지문다출기수(一時南方諸大德碑銘之文多出其手ㆍ한때는 남방의 모든 대덕들의 비문이 모두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라고 전해진다. 이외도 당대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철학가인 류우석(劉禹錫ㆍ772~842)도 혜능선사에 관한 〈사익대감선사비(賜謚大鑒禪師碑〉를 쓰기도 했으며, 많은 선승들과 깊은 교류를 하면서 당시 불교 내부의 요구에 의한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였다.

방거사(龐居士)는 선종사에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물로서 그는 본래 ‘본이유위업(本以儒爲業ㆍ본래 유교가 본업이다)’이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석두희천에게 도를 묻고 활연히 느끼는 바가 있었고, 그 후 약산유엄, 단하천연 등과도 깊은 교류를 하였으며, 그는 또 〈방온어록(龐蘊語錄)〉에서 “공리진법신, 법신즉상주, 불신지저시, 미인자불오(空理眞法身, 法身常住, 佛身祇這是, 迷人自不悟)”라는 공적무상에 대한 관점을 피력하기도 했으며, 또 “신작여래신, 지작여래고, 송출바라밀, 유통정도로, 혼신총시불, 미인자불오.(神作如來身. 智作如來庫. 涌出波羅蜜. 流通正道路. 渾身總是佛. 迷人自不悟)’ 라는 자심여래관(自心如來觀)”라는 관점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고(李ㆍ772~842)는 국자박사(國子博士)로도 유명한 인물로서 비록 유가에 몸을 담은 학자지만, 약산유엄의 ‘운재청천수재병(云在靑天水在甁)’이라는 법어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그의 철학 논저인 〈복성서(複性書)〉에서 “피이사해, 아이심통자야(彼以事解, 我以心通者也)”라고 하였는데, 선종의 즉심즉불 사상을 흡수한 것으로, 이런 그의 사상적 관점은 송명이학(理學)의 육왕심학(陸王心學)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이외도 당나라 선종(宣宗) 때 명재상인 배휴(裴休)도 많은 선승들과 교류 및 서문 저작을 남긴 거사로 유명하다. 특히 규봉종밀 및 황벽희운 등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나라 사대부들이 참선에 몰두하고 선 문화에 빠지게 된 배경에는 당시 당나라는 물질이 풍부한 사회로서 사상도 언론도 비교적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선종은 활달하고 격의 없는 가르침과 격식을 멀리하고 자유개방 혁신을 주장하면서 활발발한 생명력이 넘치는 풍토를 조성하였던 일종의 새로운 문화를 선도했던 단체라고 하겠다. 때문에 당시의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정신적인 자유에 부응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었고, 그 중심에는 앞에서도 지적 하였듯이 안록산의 난 이후 현실적으로 사대부들이 지녔던 이념과 신념 및 이상을 실현시키기에는 현실 사회가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실의에 빠진 그들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실현하는데 힘을 쏟는 것보다, 차라리 그들의 내상을 치료받을 수 있는 은둔처 혹은 도피처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선택한 장소가 바로 선종이라는 새로운 세계였고, 현실과는 분명히 또 다른 세계로서 그들을 매료시키기에는 충분한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나름의 자아의 정체성 사회적인 책임감 역할 등 현실의 도피가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우고 터득해서 마침내는 현실과 이상, 종교와 현실、출세(出世)와 입세(入世)가 둘이 아닌, 불이경계의 경계를 직접적으로 체험을 했을 것이다. 즉 그들이 방황하고 방랑하던 현실이 바로 불국토이고 이상처(理想處)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 속에서 색다른 관점으로 인생의 철학적인 가치와 이상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을 것이며,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과 가치를 분명히 발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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