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월법장의 선법사상

스승 밀운과 견해 달라
자유분방한 선법체계 추구
“선종 오가는 원상 각각의 일면”

한월법장(漢月法藏ㆍ1573-1635)은 명대의 고승으로 자는 한월(漢月)이고 호는 우밀(于密)이며 만년에 천산(天山)으로 고쳤다. 속성은 소(蘇)씨이고 무석(無錫)인이다. 대대로 유학자 집안의 출신으로 소년시기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15세에 덕경원(德慶院)에서 출가를 했다. 19세에 득도하였다. 그 후 불교에 대한 연구 및 선종의 어록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유교와 선학의 관계를 융합하는 것을 중시하기도 했다. 또 그는 29세 때 운서주굉(雲棲宏)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으며, 아울러 운서주굉이 새롭게 각본(刻本)한 〈고봉어록(高峰語錄)〉을 보고 “이를 읽는 것이 마치 옛 물건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하였다. 30세를 시작으로 고봉원묘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참구했다. 수년 후에 ‘두루 옛사람들의 어록을 사서 열독을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북송 때의 혜홍각범(慧洪覺範)의 저작을 좋아하였다. 37세 때 금릉(현재의 남경)의 영곡사(靈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42세 때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천목(天目ㆍ고봉원묘)으로부터 인심(印心)을 삼았으며, 청량(淸凉ㆍ혜홍각범)으로부터 인법(印法)을 삼았으며, 진사(眞師ㆍ스승)는 곧 임제이다”고 하였다.

한월법장은 46세에 이미 명성을 얻었고, 그를 참방하고자 하는 선승과 사대부 참학자들이 멀리서 앞을 다투어 끊이지 않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곧 ‘제창무허일(提唱無虛日ㆍ쉬는 날이 없다)’을 초래했다. 다만 그는 그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정식으로 선법의 인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불정석(不正席), 불승좌(不升座)하였다. 즉 그는 정식으로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으로 법좌를 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특히 옛 선사들은 스승의 인가 없이는 함부로 법좌에 오르지 못했으며, 반드시 스승의 인가를 거쳐서 비로소 법석을 펴고, 위치를 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53세에 금율산(金栗山) 광혜선사(廣慧禪寺)의 밀운원오(密云圓悟ㆍ1566-1642)를 스승으로 삼고 바로 밀운원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밀운원오는 인가를 주고 바로 한월법장에게 ‘제일좌(第一座ㆍ처음 정식으로 법상에 오르다)’하게 하였고, 동시에 한월법장을 법제자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해에 한월법장은 임제종의 전법종사의 신분으로 종풍을 선양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상숙삼봉청량원(常熟三峰淸凉院), 소주북선대비사(蘇州 北禪大悲寺) 및 항주, 무석(無錫), 가흥(嘉興) 등 8곳에 사원의 주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62세에 입적을 했으며, 홍인(弘忍), 홍예(弘禮), 홍저(弘儲) 등의 제자가 있으며, 어록으로 〈삼봉장화상어록(三峰藏和尙語錄)〉이 있다.

한편 한월법장은 유학에 정통했던 관계로 사대부 관료들에게 매우 추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적지 않은 사대부 관료 문인들과 교유를 했고, 특히 문인 동기창(董其昌ㆍ1555-1636ㆍ명나라 후기 대신 유명한 서예가 화가)같은 사람과도 왕래를 했다. 때문에 그가 각지에서 주지를 역임할 때 이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동시에 그는 사원을 중수하고 경제를 건설하면서 농선(農禪)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 그의 사상적 세계를 살펴보면 그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약간은 자유분방한 선법체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전통 선법체계의 관점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관점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비록 그가 밀운원오(密云圓悟)로부터 법을 인가받았지만, 선에 대한 견해는 서로 현저한 차이가 있었으며, 게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한월법장이 일찍이 밀운원오에게 자기의 관점을 표명한 것을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삼봉장화상어록(三峰藏和語錄)〉에서 “심은 고봉(高峰元妙)으로부터 얻었으며, 법은 적음(寂音ㆍ혜홍각범)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이에 다시 두 가지의 법맥을 발원하고, 합해서 임제정종을 일으켰다…, 장차 (임제)운문, 위앙, 조동, 사가(四家)로 하여금 먼 것을 가까이 이어서, 오종을 다시 찬란하게 했으며, 세세생생 지속적으로 이어서 이 맥을 단절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선법사상에 있어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오직 적통계승과 한 가지 종파의 선법만 계승하는 형식만을 고집 할 것이 아니라, 기타 종파도 함께 흥성하는 오종재찬(五宗再燦ㆍ오종이 다시 빛나다)을 주장 했다. 때문에 그는 고봉원묘의 영향으로 화두 참구하는 것을 중시 했으며, 혜홍각범의 영향으로 ‘임제종지’와 〈지증전(智證傳ㆍ혜홍각범의 찬술)〉을 중시하면서 삼현삼요(三玄三要)설을 충분하게 발휘하기도 했다.

한월법장의 중요한 선법체계의 기본바탕은 간화선을 반영한 것이다. 사실 간화선은 북송시기의 대혜종고가 발의하고 발전시킨 수행법의 하나이다. 비록 한월법장이 간화선을 바탕으로 새롭게 선법체계를 수립했지만,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답습을 한 것은 아니며, 약간의 새로운 관점을 전개하였다. 먼저 그는 화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는데 “이른바 화두라는 것은 곧 목전의 하나의 일이고 하나의 법이다. 범인은 평상시에 할 일이 없으면, 마음을 따라서 임운하면서, 천 가지를 생각하고 만 가지를 헤아린다. (이것은)바른 생사처가 없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목전에 이르니, 문득 9종의 견해가 생긴다. 그래서 생사윤회를 하면서 벗어날 길이 없다. 고로 조사가 사람들로 하여금 일사일물(一事一物) 상에 앉아서 9종의 지견을 끊게 해서, 특별한 길로 갈 것을 제시하였다. 고로 이것을 간화선이라고 이른다”고 하였다. 화두는 원래 공안의 어구 하나를 의심하는 문답(問答) 혹은 답어(答語)를 가리킨다. 한월법장은 장차 평상의 일사일물(一事一物) 상에서 간화선이 원래 지니고 있던 틀에 박힌 융통성 없는 형식을 타파하고 그것을 널리 보급하면서, 그것으로 하여금 더욱더 풍부하고 유연성 있게 변화시켰다. 또 그가 강조하기를 “화두를 간(看)하는 것은, 간심간정(看心看淨)이 아니다. 리(理)를 간(看)하고 현(玄)을 간(看)하는 것이며, 비록 마음구덩이를 여의나, 오직 일상(事)을 간파하면(꿰뚫어 본다), 이른바 이 일이 구경에는 견고해진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정통적인 간화선보다는 실천의 공능을 더 강조한 것이다.

한편 그는 유식사상을 간화선에 도입하기도 했다. 그는 참선은 ‘식신용사(識神用事ㆍ의식체)’의 과정을 배척했다고 여겼다. 이른바 “심의식(心意識)을 여의고 참선을 하면 범부를 벗어나서 성로(聖路)를 배우는 것이다”고 했다. 이것에 관한 내용은 그의 어록 〈삼봉화상어록(三峰藏和語錄)〉 제15권의 〈이심의심설시선자(離心意識說示禪者)〉와 〈이심의식변시선자(離心意識辨示禪子)〉의 단편 문장에 집중적으로 찬술하였다. 그는 대혜종고가 유식사상인 ‘전식성지(轉識成智)’를 해탈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에 관해서, 심의식(心意識)은 바로 생사윤회의 근원이 되며, 일체 수행도 모두 이 심의식(心意識)을 여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식신(識神)작용을 조복할 가장 신묘한 방법으로 화두 참구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여겼다.

그림, 강병호

 

한월법장은 간화선을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간화선을 척도로 삼으면서 송, 원, 명 이래로 전통적인 선법수행 몇 가지에 대해서 비평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좌선만 하고 화두는 간하지 않는 것을 고목선(枯木禪)이라고 하며, 또 망회선(忘懷禪)이라고 한다. 혹은 좌선하는 가운데 오직 소소영영(昭昭靈靈) 자기를 위해서 비추는 것을 묵조선이라고 한다. 이상은 모두 사선(邪禪)이다. 앉아서 지관을 짓는 자는 성적(惺寂)을 서로 대립(배척)해서, 리(理)를 관하고 사(事)를 관하는 것으로, 비록 천태정맥(天台正脈) 및 여래정선(如來正禪)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식신의 작용(識神用事)으로, 소조(所照)에 즉한 경계로서, 명근(命根)을 끊기가 어려우며, 능히 꿰뚫어서 벗어 날수 없으며, 많게는 사선팔정(四禪八定) 및 5십종음마장에 떨어진다. 식신을 쓰는 연고이다”고 했다. 즉 그는 고목선(枯木禪), 묵조선 및 천태종의 지관쌍운(止觀雙運)에 대해서 반대를 했다. 그 이유는 고목선은 영성(靈性)을 잃어서 마치 사수일담(死水一潭ㆍ연못 물, 썩은 물, 흐르지 않는 물)과 같다고 했으며, 묵조선은 자기를 비추는 것으로 아집(我執)의 표현이라고 여겼고, 천태의 지관쌍운은 심식작용을 의지한 것으로 또한 구경이 될 수 없다고 여겼으며, 또 문자선과 봉활선(棒喝禪ㆍ때리고 소리치는 것)을 지탄하기도 했다.

한월법장이 비록 밀운원오의 법을 계승했지만, 다만 그는 진정으로 밀운원오에게 득법(得法)했다고 할 수 없다. 대체로 위에서 설명한 그의 선법사상은 장기간 그가 스스로 수행해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에, 그와 밀운원오의 사상은 현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특히 선종의 5종(위앙종ㆍ조동종ㆍ운문종ㆍ법안종ㆍ임제종) 종지(宗旨)에 대한 문제를 보는 관점은 더욱더 그러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스승인 밀운원오와 공개적으로 논쟁을 전개했던 적이 있다. 그의 저서 〈오종원(五宗原)〉에서 주장하기를 하나의 원상(圓相)은 천불 만불의 근본이 되며, 다만 선종의 오가는 ‘원상(圓相)’의 각각의 일면이 되며, 오직 임제종만이 정종(正宗)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승인 밀운원오는 그의 관점을 반대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비판까지 하였다. 또 밀운원오는 오가의 종지는 오직 하나로서 바로 ‘조계정맥(曹溪正脈)’이라고 하면서, 한월법장을 ‘외도종자(外道種子)’라고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월법장의 제자 담길홍인(潭吉弘忍ㆍ1599-1638)은 자신의 저서 〈오종구(五宗救)〉에서 스승인 한월법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한월법장과 홍인이 입적한 후에 밀운원오는 〈피망구략설(妄救略說)〉을 지어서 논쟁을 이어갔다. 또 이 논쟁은 계속해서 청나라 옹정황제 때까지 이어졌으며, 최후에는 옹정황제가 한월법장을 배척하고 비난하면서 마침내 이 논쟁은 역사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오종의 선법을 통섭한 것은, 사실은 대혜종고의 간화선이다.

법장은 또 간화두(看話頭)와 참청(參請)을 결합하였는데, 그는 말하기를 “다시 화두를 간하되 참정을 하지 않는 자가 있고, 또 다시 참정을 집착해서 화두를 간하려 하지 않는 자가 있다. 모두 불균형을 이룬다. 어찌 화두 의심처를 향해서 반복해서 스스로 간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참구하고, 이와 같이 간하면, (得悟)얻지 못한다고 근심 할 것이 없다”고 했다. 여기서 ‘참청(參請)’은 참선하는 사람이 밖을 향해서 참구하거나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화두를 간하는 것은 완전히 내성(內省)을 살피고 관찰하는 공부이다. 그는 득오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밖을 향해서 참학하는 것과 내면으로 성찰하는 것에 대해서 서로 대립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 두 가지를 서로 보완하면 더욱더 공부가 원만해진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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