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 수행 일화 <26>

“너하고 나만 알자, 내가 죽였다”

만공 스님, 스승의 뜻밖의 말에 당황

사미승 죽음에 ‘살인누명’

변명없이‘못난 중생 지은 죄 대신 받자’

갑산으로 떠난 후 결백 밝혀져

<26> 살인 혐의를 쓰다

경허 스님은 화광동진(和光同塵) 직전에 살인 누명을 쓰게 된다.

경허 스님이 시봉인 사미 영주 스님을 데리고 충남 공주 계룡면 양화리에 위치한 연천봉(連天峰) 등운암(騰雲庵)에 갔다 올 때의 일이었다.

연천봉(連天峰)은 계룡산의 한 봉우리로 동학사(東鶴寺)에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다. 등운암은 초가 한 칸으로 양화리 방향으로 10리 가량을 다시 내려가면 신원사(新元寺)가 나온다.

영주 스님이 경허 스님과 함께 등운암에서 신원사로 향하던 때였다.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영주 스님의 걸망은 퍽 두둑했다.아래쪽에서 젊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동학사에서 심부름과 잡일을 하던 양화 김 도령이라는 이도 있었다.

영주 스님은 김도령을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아니, 양화 김도령 아닌가유?”

양화 김도령은 그저 영주 스님이 멘 두둑한 걸망을 훑어 볼 뿐이었다. 김도령은 경허 스님을 보고 말했다.

“이 사람과 긴밀히 할 얘기가 좀 있구먼요. 잠깐이면 되니까 스님은 먼저 내려가세요. 이 사람도 곧 뒤따라 갈 테니까요”

경허 스님은 영주 스님이 김도령 일행과 잘 아는 사이로 알고“그래, 할 말이 있다면 하고, 곧 내려 오거라”하며 별로 의심하지 않고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다.

경허 스님이 한참을 내려와 뒤를 돌아보아도 영주 스님의 기척이 없었다. 의아스러워진 경허 스님은 영주 스님과 헤어진 곳까지 다시 산을 올랐다.

하지만 이미 영주 스님과 김도령,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젊은 사람들은 바로 산적이었다. 산적들은 경허 스님이 하산하자 영주 스님의 걸망을 가로챘다.

“있는 돈 모두 내놓아!”

“가진 거라고는 그 것밖에 없는데유”

“잔말 말고 돈을 내놓지 않으면 네 목숨이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라.”

돈이 없는 영주 스님은 강도 일당에게 두 손 모아 빌 수밖에 없었다.

“양화 김도령! 필요한 돈은 다음번에 만들어 드릴테니 어서 큰 스님을 따라 가게 해주우”

애원하는 목소리에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그들은 빼앗은 걸망을 풀어 헤쳤다. 그러나 그 속에는 노잣돈 몇 푼이 있을 뿐 헌 옷가지와 책 몇 권 밖에는 없었다. 강도 일당들은 푼돈을 거두고 나서 닥치는 대로 옷가지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시봉의 몸까지 샅샅이 수색하였지만, 돈이 나올리는 만무했다.산적 무리는 돈이 없자 영주 스님을 폭행했다. 사정없이 스님을 발길로 차 쓰러뜨리고는 저만치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 잔혹한 살인까지 자행했다. 그들은 영주 스님을 후미진 숲 속 나뭇가지에 매달고는 자취를 감췄다.한참 만에 다시 올라온 경허 스님은 그 현장을 미처 찾아내지 못하고 “허참, 괴이하구나! 다른 길로 간 모양이군!”하고 중얼거리며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사까지 혼자 넘어 온 경허 스님은 이상한 생각에 갑사(甲寺)에 사람을 시켜 영주 스님이 갑사로 가지 않았는지 물었다. 갑사에서 연락을 받고 영주 스님을 찾았지만 스님의 종적은 묘연했다.그러던 와중 어느 날 한 나무꾼이 깊은 산골에서 나무에 매달린 사람의 시체를 발견했다.

바로 영주 스님의 시체였다. 경찰의 현장조사 결과 바랑이 옆에 있고 발갱기(버선이나 양말 대신 발에 감는 좁고 긴 무명천. 주로 먼 길을 걷거나 막일을 할 때 쓴다)로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경허 스님의 시봉이기에 발갱기와 바랑도 경허 스님의 소지품이었다. 경찰은 더 이상의 단서가 없자 경허 스님을 의심했다.“필시 스님이 살인을 했나 보다.”이런 사실도 모르고 경허 스님은 해인사 학명 스님을 만나러 경상도 지역으로 향했다.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시봉에 대한 소문이 해인사까지 전해졌다.

그러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몰랐던 경허 스님은 살인 누명에도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었다. 당시 경찰 수사는 발달되지 못한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진범을 찾을 수 없는 까닭에 경찰과 주변 사람들은 경허 스님을 의심했다. 경허 스님에 대한 수근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경허 스님은 해인사 퇴설당 선방에 내려가 있었다. 서산 개심사 선방의 입승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노스님께서 정말로 영주를 죽인 걸까? 어쩌다 잘못해서 죽였나? 큰스님이 왜 시봉하던 스님을 죽인단 말이냐?’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그 승려는 그 길로 해인사를 찾아 경허 스님을 만났다.

하지만 경허 스님을 보는 순간 ‘생로병사 자체가 마음에 없는 저 어른이 어찌 영주를 죽였겠는가?’는 생각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다시 돌아와 만공(滿空) 스님을 만나 인사드리자, 만공 스님이 물었다.“그래, 스승님께서는 잘 계시느냐?”“소문에 큰 스님께 직접 묻고 싶었는데 부처님께 ‘아난존자를 죽였습니까? 수보리를 죽였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아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왔습니다.”

만공 스님이 스승님께 문안인사도 드릴 겸 해인사로 내려갔다. 퇴설당 선방에서 경허 스님을 만나 만공 스님이 살짝 여쭈었다.

“영주 사미의 생사는 어떻게 된 겁니까?”

경허 스님이 제자 만공 스님의 손을 꼭 잡으시며 말했다.

“너하고 나하고만 알자. 영주는 내가 죽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만공 스님의 경지에도 경허 스님의 말은 뜻밖이었다.

상당한 시일이 지나 공주경찰서에서 산적 무리를 검거하면서 경허 스님의 결백은 밝혀진다. 경허 스님이 열반의 길을 찾아 함경도 갑산으로 떠나고 만공 스님이 수덕사를 지킬 무렵 산적에 의해 살해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경찰 입장에서는 경허 스님의 소지품이 살인도구로 사용됐어도 정황상 경허 스님이 시봉을 해칠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범행 조사 중 산적들이 갑사 영주라는 사람을 죽였다는 자백을 했다. 그 이유는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산적무리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산적들은 자신들의 출신과 정체를 아는 영주 스님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만공 스님은 경허 스님을 조금이나마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사흘 밤낮을 울었다.

경허 스님이 사건에 대해 일체 말이 없었던 까닭은 ‘살인을 한 사람을 위해 대신 형무소에 갈 수도 있다’고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중생이 못나서 지은 죄를 대신 받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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