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④⑤

④ 지장암 토굴에서

“경전을 뜯어 도배해도 됩니까”

“자네들도 이 경지 이르면 해 보게”

“살려 줄테니 속히 떠나시오”

경허 스님 말없이 개심사로

“어디에서 이런 고초를 겪으셨어요”

“갯가에 구경 나갔다가 해풍에…”

경허 스님이 지장암 토굴에 있을 때의 일이다. 천장암(天藏庵)에서 조금 떨어진 산모퉁이 골짜기에 작은 초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암자가 바로 지장암이었다. 스님은 그 곳 토굴에서 한 겨울을 혼자 정진했다. 지장암은 수리를 하지 않아 벽 사이에 틈이 나고, 문창이 뒤틀린 고옥이었다.

그런 토굴에서 한 겨울을 지내게 된 스님은 불장에 보관된 〈화엄경〉을 뜯어서 문도 바르고 벽도 발라 추위와 바람을 막았다.스님을 뵙기 위해 찾아간 제자들이 이 광경을 둘러보고 깜짝 놀라 여쭈었다.

“스님, 경전을 이렇게 도배하는데 사용해도 됩니까?”

스님은 태연히 “자네들도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이렇게 해 보게나”하고 평온히 대답했다.찾아간 제자들은 스님의 깊은 경지에 자신들이 감히 미치지 못함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 암자를 나왔다.


⑤ 어촌 만행

경허 스님이 충청남도 서산 개심사(開心寺)에 주석할 무렵의 일이다.

경허 스님이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출타해 여러 날을 들어오지 않자 이를 걱정한 대중이 사방으로 찾아 나섰다.한 달가량 아무리 찾아도 스님의 종적은 묘연했다.

경허 스님이 간 곳은 서산 태안반도의 해변 어촌이었다. 생선 도매상을 하는 집에 우연히 들어가 주인에게 인사를 청하며 하는 말이 “이 곳을 지나는 중인데 배도 고프고 올 데 갈 데 없는 불쌍한 신세라오, 이 댁에 무료로 일이나 거들어 줄 테니 나를 좀 여기 머무르도록 써 줄 수 없겠소?”하고 머물러 있기를 청했다.

도매상 주인이 경허 스님을 보니 체격이 장대하고 힘깨나 쓰게 생긴 것이 아닌가. 주인은 품삯 안 주고 일 꾼 하나 잘 생겼다고 생각해 즉석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경허 스님은 그 날부터 일꾼들이 자는 머슴방에서 같이 자고 새벽부터 물을 길고, 산에서 나무를 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주인이 하라는 대로 모두다 군말 없이 할뿐더러 일도 척척 잘해 주인은 날로 경허 스님을 좋아하게 됐다.어느 날이었다. 스님은 드디어 가풍을 드러냈다.

주인집 부인이 부엌에 나와 밥을 짓고 있는데 아궁이에 불을 때던 스님은 난데없이 그 부인의 궁둥이를 넙죽한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 “참 잘도 생겼다”하고 나갔다. 주인집 부인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울면서 남편에게 무도한 머슴을 따끔히 혼내 줄 것을 호소했다.

부인의 말을 듣고 분기탱천한 도매상 주인은 “이 중놈이 오갈 데 없어 불쌍하기에 동정했더니 아주 나쁜 놈이군”하고 독한 생각을 품었다. 도매상 주인은 동네 무뢰배들에게 술을 사며 청했다.

“저 중놈이 못된 짓을 했으니, 아주 죽도록 패서 일어나 걸어가지도 못하도록 하게. 힘이 장사니 아주 처음부터 반신불수가 되도록 해야 하네”하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십여 명의 장정들이 술기운에 다짜고짜 스님을 발길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경허 스님은 조금도 피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스님은 있는 그대로 온 몸뚱이를 내 맡겨 버렸다.

동네 무뢰배들은 스님이 숨이 떨어지면 갖다 묻기로 하고 동네 생선 창고에 가두었다.그리고 15일 정도가 지났다. 다른 상인이 생선을 사려고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신의 물건을 들쳐가며 고르고 있는데 어디서 거칠게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상인은 숨소리를 따라 고기 상자를 들쳐보았다. 거적을 들추자 전신에 피가 시커멓게 엉겨 붙은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눈이 휘둥그레진 그 상인은 소스라쳐 놀라며 눈을 씻고 다시 보았다. 분명 아직 죽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부랴부랴 끄집어 내놓고 거적을 풀어보니 동네 도매상에서 예전에 일하던 일꾼이 아닌가. 상인은 더욱 놀라며 연유를 물었지만 스님은 일체 말이 없었다.상인은 도매상 주인에게 물었다.도매상 주인은 “그 중놈이 워낙 나쁜 짓을 했기에 저렇게 된 모양이오”라고 답했다.

그 상인은 도매상 주인을 보고 크게 나무라며 “그 사람이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법에 의해 처리해야지, 어찌 사람을 이처럼 잔인하게 하였단 말인가. 내가 관가(官家)에 고발해 이런 무도한 행패를 막겠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할 테니 그리 아시오”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야 주인은 상인을 붙잡고 “제발 고발만은 말아주시오. 우리가 잘못했소. 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잘 치료해 자기 본처로 보내겠소”하고 통사정 했다.도매상 주인의 다짐을 받은 상인은 자기 물건을 싣고 길을 떠났다.

그 뒤 도매상 주인은 경허 스님에게 “살려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속히 당신 갈 곳으로 가시오”하며 떠나기를 재촉했다.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집에서 나와 개심사를 향해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서 경허 스님은 큰 스님을 찾아 나온 만공 스님과 혜월 스님을 만났다.

경허 스님의 모습은 옷이 다 찢어지고 얼굴이 전부 깨진 상처투성이가 돼 차마 몰라볼 만큼 초라했다.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에게 “스님 어디에 가셔서 이런 고초를 겪으셨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갯가에 구경나갔다가 해풍이 심해 자연 이렇게 됐다”며 크게 웃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난 뒤 그때 스님을 구했던상인이 우연히 개심사를 방문했다. 그 상인은 당시 머슴이 경허 스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다른 스님들에게 알렸다. 그제야 대중들은 깜짝 놀랐다.경허 스님 일화 편집자는 말미에 ‘스스로 마군과 부처를 동시에 작했고, 생사 없는 곳에서 생사 있는 곳까지 등한히 체험하셨다’는 평구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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