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시끄럽게 들리는 매미 소리와 후끈한 기운에 눈을 뜬다.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젠콘야도에서 제공해준 이불을 덮고 잤더니 세상 모르고 잠든 것이다.오늘은 느긋하게 20km 남짓 떨어진 다른 젠콘야도까지가 목표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느긋히 갈 마음을 먹는다. 미적거리며 짐을 싸고 있으니 젠콘야도를 관리하는 할아버지께서 오셨다. 피곤하면 좀 더 있다가 가라하시는 것을 정중히 사양했다. 할아버지의 사진을 찍으려했더니 극구 거절하시기에 젠콘야도의 외관만 찍었다.대일여래 본존인 28번 大日寺이곳 오쿠노인엔 약사여
새벽녘 목청껏 우는 닭 울음에 눈을 떴다. 나름 번화한 시내인데 대체 어디서 우는 건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알람을 맞춰둔 것보다 1시간 반이나 이른 5시 30분이다. 침낭 속에서 좀 더 꾸물대다 부스스 일어났다. 지난밤은 다행히 모기가 많지 않아 편안히 잘 수 있었다.지도를 가늠해보니 오늘은 여기서 31km 정도 떨어진 젠콘야도까지 걸어야 한다. 평지라면 무난한 거리지만 27번 코노미네지(神峰寺)가 산 정상 근처라 체력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해가 떨어지기 전엔 도착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모기가 없을 것이란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몰려오는 모기들을 피해 지친 몸을 끌고 갈 곳은 없었고, 결국 판초우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잠결에 내 코끝에 모기가 한 마리 붙어 있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아침 해가 어슴푸레 뜰 새벽 무렵, 모기들의 극성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이상하게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세수를 하러 근처의 공중화장실로 갔다. 세면대의 거울을 보는 순간 그만 너털웃음을 내고 말았다. 침낭 밖으로 나와 있던 얼굴만 잔뜩 모기에 물린 것이다. 재미삼아 몇 곳이나
죠만지를 모르던 때의 일이다. 그때는 죠만지에서 조금 더 걸어가야 있는 사찰, 메이토쿠지(明德寺)의 츠야도(通夜堂)에 묵었다. 츠야도는 원래 사찰에서 장례를 치르는 상주들이 밤을 지새우면서 잠을 자는 공간인데, 시코쿠 헨로에서는 순례자들이 무료로 잘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을 말한다.메이토쿠지 츠야도에 묵는 순례자들은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바로 폭포 수행이다. 원래는 보시금을 내야 하지만, 순례자들에게는 주지 스님이 “수행의 도량인 고치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라”며 폭포 수행을 ‘오셋타이’해주신다.주지 스님에게
지난밤 묵은 죠만지(城뼖寺)는 일본 조동종 역사상 9번째로 세워진 사찰이며 시코쿠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찰이다. 일본 조동종에서 태조(太祖)로 존경받는 케이잔 선사(瑩山禪師, 1268~1325)가 생애 최초로 개산한 선사(禪寺)이자 시코쿠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인데, 전국시대에 병화로 소실되어 약 350년간 그 터만 남아 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중요성과 지역 주민들의 신심에 힘입어 다시금 절이 세워진 것이 약 20여 년 전. 지금은 고요한 옛 모습을 다시 되찾았다.처음 죠만지를 찾았을 때는 2012년 여름이었다. 88개
새벽녘 더위와 습기에 눈을 뜬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쯤 되었다. 그냥 더 잘까 하다가 어차피 6시에 눈 뜨고 준비할 걸 생각하니 그냥 일어나기로 한다. 조용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장정 아홉이 다닥다닥 누워 잠을 자는 게 생각보다 장관이다.침낭을 말아 정리하려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다른 순례자가 눈을 떴다. 그도 시계를 보더니 곧 일어나선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아침 6시, 오늘도 걷기 시작이다.밤중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조용한 아침 길은 각별하다. 귀에 들리는 것은 지팡이가 길을 때리는 경쾌한 소리와 자박이는 발걸음 소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다. 밖을 보니 밤새 비가 왔다 간 듯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숙소를 나서려니 카운터 직원이 배웅을 나온다.“오헨로상! 오늘은 비가 온다고 해요. 조심하세요.”아니나 다를까 비소식이다. 순례길에서 가장 힘든 존재는 작열하는 태양도, 발 여기저기 난 물집도 아니다. 바로 비다. 비가 내리면 배낭과 옷이 젖어 걷는 속도가 느려질뿐더러 신발에 물이 스며 걷기 불편해 진다. 최악의 경우 산길로 이어지는 순례길이 계곡이 되기도 한다.오늘의 목표는 23번 야쿠오지(藥王寺). 산길을 넘는 길이 몇 곳 있어 걱정이 앞선다.
21번을 향하는 길은 확실히 힘에 부쳤다. 길이 잘 닦여있긴 하나 쉴만한 구간 없이 그저 오르막의 연속. 배낭을 짊어 맨 채 몸을 숙여 쉬어가며 조금씩 오른다. 그래도 힘내서 걷는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도쿠시마 지방의 옛말에 “첫째는 쇼산지, 둘째는 카쿠린지, 셋째는 타이류지”라는 말로 순례의 난소를 전하고 있겠는가.또 오르는 길의 산세가 깊다보니 멧돼지나 살무사, 말벌의 공격을 받았다는 뉴스가 간혹 들려온다. 몇 년 전에 고령의 순례자가 탈진으로 목숨을 잃었다. 에히메현에서 만난 한 일본인 순례자는 그 발견자가 자신이라며 당시
새벽녘의 으스스한 한기에 눈을 뜬다.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며 지도를 펴본다. 오늘은 산을 두 개 넘어 22번 뵤도지(平等寺)까지 가야한다. 20번 카쿠린지(鶴林寺)와 21번 타이류지(太龍寺)는 모두 산 정상 근처에 사찰이 있어 오르는 것이 녹록치 않다.다른 헨로고로가시들에 비하면 편한 길인 것은 사실이지만, 차라리 산길이 계속 되면 모를까 해발 500m 가량 되는 산을 올랐다가 다시 마을까지 내려간 후 비슷한 높이의 산을 올라야 두 절을 모두 참배할 수 있다.아침을 먹고 출발할지 고민하다가, 3km 앞에 편의점이 있으니 그곳까지 가
다이니치지(大日寺)의 아침예불에는 꼭 법문이 함께 한다. 순례자가 많든 적든 반드시 간단하게나마 법문이 진행된다.“시코쿠의 네 현의 이름은 토쿠시마(德島)·고치(高知)·에히메(愛媛)·카가와(香川)입니다. 여기서 앞머리만 떼어 볼까요? 덕이 높고(德高), 사랑의 향기(愛香)가 난다는 뜻이 됩니다. 시코쿠 순례를 하는 모든 순례자 분들이 높은 덕을 갖추고, 사랑의 향기가 넘치는 이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시코쿠 네 현의 이름을 따온 법문을 들으니 시코쿠 순례길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 순례가 끝날 즈음에 난 덕과 사랑을 갖춘 사람
젠콘야도 스다치칸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다.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강을 낀 차로를 따라 가느냐, 고개를 넘어가는 옛 순례길을 따르느냐.쇼산지를 넘느라 산길은 지긋지긋하기에 차로를 따라 편하게 걸을까 하다가 지도를 보니 산을 넘어가는 게 아무래도 조금 더 빠르다. 스다치칸 할머니께서도 고개가 험하지 않으니 그냥 고갯길을 넘을 것을 추천하신다. 그래, 어제 산 두 개를 넘었는데 오늘 고개 하나 못 넘으랴 하고 고갯길로 길을 튼다.어제 산을 타면서 산길에 익숙해서일까. 삼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
1,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길, 시코쿠의 길 곳곳 순례의 흔적이 남아있다. 길가의 작은 돌부처에도 코보 대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덕분에 88개소를 순례하면서 듣는 연기설화와 전설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이러한 전설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순례의 풍습이나 전통도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이 전설들을 몇 개 살펴볼까한다.보통 88개소의 이름은 그 사찰의 연기 설화나 본존불과 관련되어 붙어졌다. 예를 들어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는 코보 대사가 영산회상의 모습을 친견한 장소에 세워졌기에 영산(靈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코쿠 순례의 오헨로상(순례자)들의 아침은 빠르다. 하루에 평균 30km 가까이 걸어야 하는데다가, 오후 5시면 사찰들의 업무가 끝나니 그 전까지는 참배해야하기 때문이다. 가장 이르기로는 새벽 4시, 늦어도 아침 7시에는 출발한다. 뜨거운 뙤약볕이 고통스러운 여름날의 순례는 낮에 어디선가 한잠을 자고 밤에 걷는 경우도 있다.전날은 11번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젠콘야도(善根宿)에 묵었다. 젠콘야도란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간이 숙박시설을 말한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근을 쌓는 숙소, 또 선근을 가진 이들이 묵는 숙소이
김해공항에서 오사카까지 약 2시간, 다시 오사카공항에서 도쿠시마 역까지 3시간 반 남짓. 다시 전차로 갈아타고 1번 절 료젠지(靈山寺) 근처의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4시 30분이 넘어 가고 있었다. 시코쿠 88개소에 포함된 절들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법당의 문을 개방한다. 순례에 필요한 흰 옷과 지팡이 등을 사고 참배를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잠시 생각한 후에 본격적인 순례는 이튿날 떠나기로 결심하고 물건을 사곤 간단하게 절을 둘러보기로 한다.흰 옷은 수의, 삿갓은 관 뚜껑‘金剛杖’ 지팡이는 묘비 상징해순례시 본
종교적 순례 의미 되새기며신앙을 가진 많은 종교인이라면 한 번쯤 나서게 되는 성지순례. 세계 종교로 꼽히는 불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모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종교적 여행은 신자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어 보편화 돼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에서는 25년에 한 번씩 희년(禧年; Iobeleus)을 두어 로마를 순례할 것을 권한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전체서 다양한 종교 축제가 열려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이 곳으로 몰려든다. 또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힐링과 레저를 위한 순례로 한국에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