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시코쿠 순례길

12번 사찰 죠산안(杖杉庵)에 있는 에몬 사부로의 동상. 코보 대사를 홀대해 천벌을 받은 에몬 사부로는 대사를 만나 참회하기 위해 시코쿠 순례를 시작했다. 그는 지금의 시코쿠 순례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1,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길, 시코쿠의 길 곳곳 순례의 흔적이 남아있다. 길가의 작은 돌부처에도 코보 대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덕분에 88개소를 순례하면서 듣는 연기설화와 전설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이러한 전설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순례의 풍습이나 전통도 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이 전설들을 몇 개 살펴볼까한다.

보통 88개소의 이름은 그 사찰의 연기 설화나 본존불과 관련되어 붙어졌다. 예를 들어 1번 사찰 료젠지(靈山寺)는 코보 대사가 영산회상의 모습을 친견한 장소에 세워졌기에 영산(靈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3번 콘센지(金泉寺)는 절에 대사가 팠다는 우물이 있기에 샘(泉)이라는 이름이다.

이런 연기설화들을 살펴보자면 한 두 개씩 마음을 울리는 것들이 있다. 발심의 도량인 아와, 도쿠시마현에서 필자가 좋아하는 연기설화는 10번, 18번 사찰의 설화다. 두 사찰 모두 효(孝)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1200km 순례길 곳곳에는
연기설화·전설들이 존재해
12번 사찰 죠산안 설화는
시코쿠 순례 기원과 연관돼
순례 풍습·전통 연계 ‘중요’


10번 사찰 키리하타지(切幡寺)는 333개의 돌계단으로 순례자들을 지치게 하는 곳 중 하나이다. 산등성이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본당 옆으로 등신대의 관세음보살이 서있다. 오른손에 가위, 왼손에는 베틀 북에서 풀지 않은 천을 들고 있는 이색적인 모습이다. 키리하타, ‘번(幡)’을 잘라낸다는 절의 이름은 바로 이 관세음보살상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있다.

코보 대사가 이 산의 계곡에서 7일간 수행을 하고 다시 만행을 나섰다. 오랜 수행 정진에 다 해어진 승복을 기워보고자 민가를 돌며 천 조각을 구하던 중 산 중턱의 낡은 집에 도착했다. 홀로 베를 짜던 소녀는 코보 대사의 이야기를 듣곤 베틀에서 짜던 천을 아낌없이 잘라내어 공양 올렸다.

이에 감동한 코보 대사는 소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소녀는 돌아가신 양친을 위해 불상을 조성하고, 자신은 출가하기를 원했다. 대사는 손수 하룻밤 만에 천수관음상을 새기고 소녀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코보 대사가 출가한 소녀에게 관정(灌頂)을 내리자 소녀는 한 순간에 부처의 경지를 이루어 천수관음이 되어 사라졌다. 이에 코보대사는 소녀가 지극한 신심과 효심으로 즉신성불 했음을 알고 이곳에 사찰을 세웠다. 그래서 사찰의 이름이 베틀의 천(機)을 잘라낸(切) 절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현재의 하타(幡)라는 이름은 베틀로 짠 직물을 뜻하는 ‘하타(機)’가 후대에 좀 더 불교적인 뜻이 담긴 ‘하타(幡)’로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18번 사찰 온잔지(恩山寺)는 코보 대사 스스로의 효성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온잔지는 8세기경의 고승인 쿄키(行基) 스님이 세운 절로, 원래 여인의 출입이 금지된 도량이었다. 약 100여 년 뒤에 코보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할 때 소식을 들은 대사의 모친 타마요리 고젠(玉依御前)이 찾아왔다. 

어머니를 절에 모셔 효를 다하고 싶었으나, 100년 전 절을 세운 쿄키 스님의 법력으로 세워진 결계는 여성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에 코보 대사는 산문인 인왕문 근처에서 호마단(護摩壇)을 세우고 7일 밤낮을 기도한 끝에 결계를 풀 수 있었다. 코보 대사는 사찰로 어머니를 모셔와 극진히 봉양하였다고 전해진다.

88개소 외에 번외영장(番外靈場)들의 전설들도 흥미롭다. 대부분 코보 대사가 만행 중에 지역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보이신 행적들과 연관이 깊다. 물이 없는 곳에 샘을 만들었다거나, 요괴를 퇴치했다거나, 불당과 탑을 세웠다는 등의 이야기다.

특히 12번 절에서 하산하는 길가에 있는 암자, 죠산안(杖杉庵)에 전해지는 설화는 시코쿠 순례의 기원과 관련되어 있다. 시코쿠 순례를 하다보면 이곳 죠산안의 설화는 반드시 듣게 된다. 또 이 설화 속에서 앞으로 보게 될 순례의 여러 가지 전통이나 풍습의 기원이 들어있기에 좀 긴 이야기지만 모두 살펴보려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도쿠시마현과는 멀리 떨어진 시코쿠의 또다른 현, 에히메현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47번 사찰 야사카지(八坂寺) 근처에 에몬 사부로(衛門三郞)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야기에서 그는 꼭 우리네 전래동화에 나오는 놀부와 이미지가 겹친다. 인색하고 탐욕스러웠으며, 출가자를 홀대했다.

마침 코보 대사가 시코쿠를 돌며 수행 중이셨는데, 어느 날 문수보살이 나타나 에히메에 사는 에몬 사부로를 제도하라고 하셨다. 이에 코보 대사는 에몬 사부로의 집 앞에서 탁발을 받으면서 제도할 기회를 가늠하기로 했다. 에몬 사부로는 당연히 코보 대사를 무시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7일째 되던 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염불소리가 들리자 화가 단단히 난 에몬은 빗자루로 코보 대사의 발우를 내리쳐 부셔버렸다.

에몬 사부로의 묘. '시코쿠 순례 원조'라고 써 있다.

코보 대사는 그날로 에몬의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에몬의 여덟 자식이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명을 다하고 말았다. 슬픔 속에 지내던 에몬은 탁발을 온 스님의 발우를 박살낸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게 바로 그 죄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수소문 끝에 코보 대사가 머무르고 있던 사찰로 찾아갔다. 그러나 코보 대사는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난 후였다. 사찰의 주지스님은 찾아온 에몬에게 “대사는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 손수 무덤을 만들어주고 49재를 지내는 동안 매일 아이들을 위해 독경을 하셨소”라고 전해주었다.

에몬은 그때서야 천벌을 받은 것을 알고, 코보 대사를 뵙고 참회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순례에 나섰다.

시코쿠를 20바퀴 돌았을 때, 에몬은 문득 자신이 살던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한결 같이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는 전날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에 에몬은 “시코쿠를 거꾸로 돌면 스님을 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고, 거꾸로 순례를 시작한다.

그렇게 역으로 순례하기를 3번, 몸을 아끼지 않은 순례에 병이 들었고 쇼잔지(燒山寺) 아래에서 힘이 다해 쓰러지게 되었다. 그때 에몬의 머리맡에 코보 대사가 나타났다. 용서를 구하는 그의 참회를 받아준 코보 대사는 그의 생명이 다해감을 알고 마지막 소원을 물었다. 그러자 에몬은 말했다.

“제가 온갖 악업을 쌓고 인색했는데 그것이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다음 생에는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선업을 많이 쌓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던 집을 절로 만들어 후세의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쿠보 대사는 작은 돌에 글을 몇 자 쓰고 그의 오른손에 쥐어 주자 에몬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집은 문수보살을 본존으로 한 몬쥬인(文殊院)이라는 절이 되었다.

죠산안에는 이 전설들을 증명하듯 한켠에 에몬 사부로의 비가 서 있다. 이 비 옆에는 커다란 삼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는데 에몬 사부로의 무덤가에 꽂았던 지팡이가 자라난 것이라고 한다.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에히메 지방의 영주에게 아들이 태어났는데 오른손을 꼭 쥔 채로 펴지를 않았다. 의사를 부르고, 스님을 모셔다 기도를 해도 오른손을 펼 줄 몰랐다.
영주의 아들이 3살이 되던 해 봄, 영주는 가신들을 이끌고 꽃구경을 나섰다. 연회가 열린 가운데 아장아장 걸어 나온 아이가 갑자기 두 손을 모으고 “나무대사변조금강(南無大師遍照金剛)”이라고 염불을 했다. 이는 코보 대사께 귀의한다는 문구였다. 이와 함께 펼쳐진 오른손에서 작은 돌이 굴러 나왔다. 돌에는 ‘에몬 사부로의 재래’라고 쓰여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전설속의 에몬 사부로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깊은 서원과 코보 대사의 법력에 감격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에몬 사부로의 전설을 증명하는 장소나 물건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지팡이는 큰 고목이 되었고, 그의 저택이었다는 곳은 절이 되었다.

또 시코쿠 순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역순례(逆打ち)의 시작도 여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역순례란 말 그대로 88번에서 1번을 향해 거꾸로 순례하는 것이다. 역순례는 일반순례에 비해 이정표나 안내가 자세하지 않아 배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역순례를 떠나는 순례자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코보 대사를 만날 수 있다’라는 희망에서이다.

앞선 글들에서 이야기 했지만 시코쿠에서는 아직도 코보 대사가 시코쿠를 돌고 있고, 순례자들은 적어도 한 번 그 화신을 뵐 수 있다는 신앙이 전해진다. 그렇기에 전설처럼 역으로 순례한다면 코보 대사를 뵐 확률이 높아진다고 믿는 것이다.

이 에몬 사부로 전설에서 기인하는 순례의 전통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흰옷과 삿갓, 지팡이를 순례의 복장으로 시작한 것도 그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순례자들이 각 사찰에 공양 올리는 오사메후다(納め札)라는 종이도 에몬 사부로가 시조라고 전해진다.

오사메후다에는 보통 순례자의 이름과 주소, 소원을 써서 공양을 올린다. 이야기에는 에몬 사부로가 코보 대사를 쫓아 순례할 때 어느 법당에 있던 코보 대사의 불상을 보고, ‘대사를 다시 뵙길 바란다’는 내용을 쓴 종이를 올린 게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이렇게 시코쿠 순례는 전설이 살아 숨쉬는 순례다. 수많은 전설과 설화들은 순례자의 신심을 더욱 고양시키고, 순례는 더욱 풍부한 내용을 가지게 된다. 시코쿠 순례 길은 흔히 1,200km라고 한다. 리(里)로 따지면 삼천리 정도. 말 그대로 ‘전설따라 삼천리’ 길인 것이다.

순례의 Tip
- 순례자의 지팡이는 코보 대사의 화신으로 여기기에 취급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팡이 끝에 거스러미가 일었을 때, 칼이나 가위로 잘라내선 안 된다.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두거나, 바위나 나무에 비벼서 떼어내야 한다. 또 다리를 건널 때는 지팡이를 짚지 않고, 손에 든 채로 건너야한다는 규칙이 있다.  

-  오사메후다는 순례자들 간에 명함처럼 쓰이기도 한다. 또 순례의 횟수에 따라 색깔과 재질이 바뀐다. 일반적으론 흰색 종이로 만든 것(1~4회)이 가장 많이 보인다. 비단으로 만든 오사메후다(100회 이상)를 순례 중 받거나 줍게 되면 몸을 지켜주는 부적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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