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쇼지’, 순례 의지 다잡는 도량

다이니치지(大日寺)의 아침예불에는 꼭 법문이 함께 한다. 순례자가 많든 적든 반드시 간단하게나마 법문이 진행된다.

“시코쿠의 네 현의 이름은 토쿠시마(德島)·고치(高知)·에히메(愛媛)·카가와(香川)입니다. 여기서 앞머리만 떼어 볼까요? 덕이 높고(德高), 사랑의 향기(愛香)가 난다는 뜻이 됩니다. 시코쿠 순례를 하는 모든 순례자 분들이 높은 덕을 갖추고, 사랑의 향기가 넘치는 이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시코쿠 네 현의 이름을 따온 법문을 들으니 시코쿠 순례길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 순례가 끝날 즈음에 난 덕과 사랑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런 소망을 가지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미 17번까지 순례를 했으니 곧장 18번 온잔지(恩山寺)로 향한다. 국도를 타고 쭉 내려가면 되는 길이지만 이번엔 고갯길을 넘기로 한다. 이전 순례들에서 산을 타기 싫어 시내를 통과하는 길을 잡았다가 길을 잃고 헤맨 까닭이다. 사실 길만 잃지 않고 걷는다면 시내를 통과하는 길과 고개를 넘는 길의 소요시간은 거의 비슷하다.

고갯길로 접어들기 전에 잠깐 옆길로 새기로 마음먹는다. 어차피 오늘 참배할 사찰은 두 곳, 납경소가 열려있는 시간에 여유롭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 옆으로 살짝 빠져나온 192호 국도변. 또 다른 젠콘야도 ‘사카에 택시’를 들르기로 한다.

4개현에 걸친 순례 코스에
각각 1곳 있는 칸쇼지 도량
순례 의도 불순·악업 많은지
불보살·대사가 순례자 점검
바른 마음으로 순례하란 경책


사카에 택시는 토쿠시마 시에선 꽤나 유명한 젠콘야도. 나 역시 여러 번 신세를 진적 있다. 택시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회사 2층 한 쪽을 순례자를 위해 내어준 곳으로 이부자리는 물론 샤워에 세탁까지 할 수 있는 젠콘야도다. 시설이 좀 낡고,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이래저래 사건사고도 많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순례자들에겐 감사한 곳이다. 

혹시 사장님께 인사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봤더니 너무 이른 시간인지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있다. 젠콘야도로 올라가보니 전날 순례자가 묵었는지 감사 문구가 쓰인 오사메후다가 테이블에 있었다. 휘휘 둘러보며 잠시 추억에 빠진다.

2011년 첫 순례 때는 사장님이 당신네 택시를 태워줘 토쿠시마의 야경을 보러 전망대에 갔던 기억이 있고, 4번째 순례 때엔 특별히 이틀을 연박한 적도 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어 간다. 해가 더 높게 뜨기 전에 고개를 넘어야한다. 다시 배낭을 둘러메고 걷기 시작한다.

19번 사찰 다츠에지로 향하는 빗속의 순례길. 우의를 뒤집어 쓰고 나아간다.

토쿠시마 시내 한가운데 낮게 솟은 비잔(眉山, 290m)의 옆 줄기를 타고 넘어가는 지죠고에(地藏越) 고갯길은 겨우 140m 높이의 언덕이지만 그 경사가 상당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비지땀을 흘리며 정상에 도착하니 작은 지장보살상이 모셔져있다. 지장보살 앞에 잠시 손을 모으고 고개를 내려간다.

새벽에 내린 비로 가뜩이나 급경사의 고갯길이 더 위험했다. 젖은 바위를 잘못 디뎌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지장보살의 가피려니 생각한다. 작은 하천을 따라 내려가다 다리를 건너 국도로 합류한다. 여기서부터는 아주 지긋지긋한 길이다.

거의 3km가까이 되는 직선 아스팔트길. 그렇다고 도로 주변에 볼만한 게 있는 것도 아니다. 드문드문 식당이나 편의점이 보이지만 하필이면 다 도로를 건너서 있다. 그나마 고갯길을 넘어와서 이 징그러운 길을 3km만 걷는다. 시내를 통과해서 나오면 근 5km의 살풍경한 길을 걷게 된다.

낑낑대며 국도를 지나 야트막한 산길을 걸으니 온잔지 주차장으로 길이 연결된다. 무거운 배낭은 잠시 벤치에 아무렇게나 풀어두고 본당으로 향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힘들다고 배낭을 아무 곳에나 풀어두는 건 꽤나 위험한 짓이었다.

온잔지의 이야기는 앞서서 간단히 말한바 있다. 시코쿠의 여러 사찰들 가운데 효행에 과한 설화가 전해오는 절이다. 본당에 가니 보시함 옆에 작은 상자가 있다. 공양미를 올리는 상자라고 쓰여 있었다.

중세에 시코쿠 88개소를 도는 순례자들 중엔 쌀을 올리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당시엔 쌀이 화폐처럼 쓰였으니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현대에도 쌀을 가져와서 올리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 다만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절에서 공양미를 사서 올리는 문화가 없어 집에서 쌀을 가져오는데 양이 그리 많지 않다. 끽해야 한 두 줌의 백미. 잘은 모르겠지만 온잔지에 이런 상자가 별도로 있는걸 보니 여긴 또 공양미를 올리는 분들이 많은가 보다.

납경을 받고서 시간을 확인해본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다음 사찰 다츠에지(立江寺)까지는 4km. 도보로 한 시간 남짓이다. 그냥 여기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한다.

배낭 깊숙이 넣어둔 미숫가루를 꺼내선 발우에 넣고 물을 조금 부어 손으로 반죽한다. 물에 풀어 마시기보다 그래도 고체를 먹기 위해 미숫가루 반죽을 먹는다. 티베트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짬빠 먹는 방법을 흉내 낸 것이다. 반찬으론 말린 살구에 생강편. 처음 순례 왔을 땐 오직 미숫가루뿐이었다.

이리 먹어도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난다. 일본 순례자들처럼 편의점이나 슈퍼를 찾아 순례길에서 멀리 떨어질 일도 없고, 쓰레기도 나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식비가 대폭 줄어드는 것은 덤이다.

다만 문제는 짐의 무게가 늘어난다는 것. 예전에 나를 따라 걷던 친구는 너무 힘들어 들판에 미숫가루를 다 던져버린 일도 있다. 또 함께 순례한 적 있는 한 비구니 스님은 “업을 짊어지고 다니다가, 하나하나 까먹으니 참말 업장이 소멸되는 느낌”이라 말하며 웃기도 했다.

참고로 일본에는 미숫가루가 드물다. 그나마 비슷한 게 핫타이코(はったい粉)라는 것이 있는데 쌀보리를 볶아 만든 가루다. 내가 사찰 한 켠에서 미숫가루를 먹다보면 대체 이게 뭐냐고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중에 시코쿠의 노인들에게 들으니 2차 세계대전 당시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에는 많이 먹었는데, 지금 젊은 세대는 잘 모를 것이라고 했다.

점심을 때우고 다시 일어나 걷는다. 산문 앞으로 난 숲길을 빠져나와 시골길을 따라 걸어간다. 19번 절 직전에 새로 생긴 순례자 휴게소가 보였지만 그냥 지나쳐 걷기로 한다. 강을 건너 마을로 접어드니 19번 사찰의 지붕이 보였다. 산문에 들어서기 전에 조금 긴장하고서 들어간다. 이곳은 ‘칸소지(關所寺)’이기 때문이다.

‘칸소지’란 순례자가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순례했는지, 순례 중에 악업을 지은 것은 없는지를 불보살과 쿠카이 대사에게 검사받는 절이다. 만약 악업이 무겁거나 동기가 바르지 않으면 이 사찰이나 부근에서 사고가 나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전한다. 이러한 칸소지는 4현에 각 1개소씩 있는데 다츠에지는 토쿠시마현의 칸소지다.

칸소지인 만큼 그에 어울리는 전설도 전한다. 200여 년 전, 시마네현에 살던 오쿄(お京)라는 여인이 정부와 함께 남편을 살해하고 도망쳤다. 두 사람은 피신을 겸하여 시코쿠 순례에 나서 이곳까지 이르렀다. 오쿄가 다츠에지에 도착하여 범종을 치려고 하는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있는 것 마냥 당목의 밧줄에 휘감겨 들었다. 이에 두 사람은 무고한 이를 죽인 것에 대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깊이 참회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사찰을 참배했다. 그러나 대사당 옆의 작은 사당에 이야기의 전문이 새겨진 비석과 함께 오쿄의 머리칼이 휘감긴 밧줄이 모셔진 것을 보았을 땐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부터 칸소지들을 참배할 땐 조금 마음을 다잡고 참배를 하고 있다.

납경소에 들러 납경을 받으면서 스님과 이야기를 해본다.

“오면서 보니까 못 보던 휴게소가 생겼더군요.”
“아, 거기 말이죠. 원래는 암자 터였는데 그렇게 활용하게 됐어요.”
“아, 원래 사찰이었나요?”
“네, 거기가 전설의 오쿄가 살다가 죽은 암자에요. 오쿄가 참회하고서, 그곳에 암자를 지어 평생 순례자들에게 맞이하던 곳이었지요. 오래전부터 터만 남았는데 그렇게 순례자들을 위한 휴게소를 짓게 되었습니다.”

납경소 스님의 말로는 휴게소 안쪽에 감실을 두고, 오쿄의 위패를 모셔두었단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새롭게 보인다. 오면서 ‘들려볼 걸 그랬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긴 싫으니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 묵는 곳은 사찰에서 4km 남짓 떨어진 젠콘야도. 사실 젠콘야도라기 보단 마을에서 과일을 출하할 때 쓰는 휴게소로 내어주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무인에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지만 이부자리와 화장실이 갖춰져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한 시간가량 시골 마을을 따라가 도착한 휴게소.

문을 열어보니 낮의 열기가 꽉 찬 채로 갑갑하기 그지없다. 창문이란 창문을 다 열고, 모기향을 피워두곤 앞의 논두렁으로 나간다. 날은 어둑어둑 져가고 다른 순례자가 올 기미는 안 보인다. 순례자 노트를 보니 일주일 전에 딱 한 사람이 묵었다 간 모양이다. 여름철 순례라는 것은 참 사람 보기 힘든 고행길이다.

순례의 Tip

젠콘야도 ‘사카에 택시’. 택시회사가 운영한다.

- 배낭을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가 도난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주의하자.
- 19번 다츠에지 앞의 작은 슈퍼를 빼고, 6km 가량을 더 걸어가야 편의점이 있다. 가급적 19번 앞에서 먹을 것을 사자.
- 이번 순례기에 나온 젠콘야도 2곳은 여성 혼자 묵기엔 위험한 점이 있으니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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