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보대사가 고등어 든 이유는?

고등어를 손에 들고 있는 코보대사상. 고등어 공양 관련 연기 설화가 눈길을 끈다.

새벽녘 더위와 습기에 눈을 뜬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쯤 되었다. 그냥 더 잘까 하다가 어차피 6시에 눈 뜨고 준비할 걸 생각하니 그냥 일어나기로 한다. 조용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장정 아홉이 다닥다닥 누워 잠을 자는 게 생각보다 장관이다.

침낭을 말아 정리하려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다른 순례자가 눈을 떴다. 그도 시계를 보더니 곧 일어나선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아침 6시, 오늘도 걷기 시작이다.

밤중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조용한 아침 길은 각별하다. 귀에 들리는 것은 지팡이가 길을 때리는 경쾌한 소리와 자박이는 발걸음 소리.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 소리에 집중하며 한참을 걷는다. 어제 몸을 녹였던 히와사역을 지나쳐 55번 국도로 올라선다. 이제 다음 사찰까지는 약 74km. 2, 3일을 꼬박 걸어야 한다.

23~24번 사찰 거리는 약 74km
3일을 걸어야… 순례 포기 구간

순례 사이 들리는 ‘사바다이시’
고등어 공양 관련 설화 ‘눈길’
프랑스 친구의 부적 선물에 힘나

갑자기 사찰간의 거리가 확 멀어지니 많은 순례자들이 여기서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기도 한다. 23번까지 순례하는 것으로 발심의 도쿠시마가 끝난다는 것은 좋은 구실이 된다. 실제 히와사 역 앞에 고속버스도 서기에 오사카나 고베 등으로 갈 수 있다.

잠시 멈춰서 쭉 뻗은 국도를 바라본다. 어느 순례자가 기억났다. 83번 절에서 만난 그는 23번에서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단다. 그러다 23번 야쿠오지에서 쭉 뻗은 길을 보는 순간 ‘여기까지 왔는 걸’이라며 24번을 향해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3일을 걸어 24번에 도착하자, 그는 걸어온 게 아까워서 고치시(高知市)까지 걷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고치시를 훌쩍 넘어섰다. 그렇게 ‘조금만 더, 다음 도시까지만’ 하다가 80번 대에 들어와선 결원(結願)이 코앞이라며 “대사가 길에 마술을 걸어둔 게 분명하다”며 웃어보였다.

오늘의 목표는 순례길에서 조금 옆으로 빠져서 있는 사찰 죠만지(城滿寺). 야쿠오지에 30km 정도 떨어진 사찰이다. 시코쿠 88개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찰이지만 항상 들리고 있다.
두 번째 순례 당시 하루 묵었던 젠콘야도의 사장이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지도에서 이곳을짚어주며 “여기 주지 스님이 한국을 좋아한다. 매달 한국을 간다”며 순례자를 간혹 재워주니 가보라고 알려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처음엔 그저 한류를 좋아하는 스님이 계시겠거니 하고 갔더니 그야말로 학승이었다. 주지인 코야 스님은 수행은 물론, 범어와 남인도 방언인 타밀어, 한국어까지 마스터했다. 한국과 인연이 돼 해인사 승가대학에 출강을 나간 적도 있다. 젠콘야도 사장의 ‘스님은 매달 한국에 간다’는 말은 강의를 위해 한국을 왕래했음을 짐작케 했다.

어제 빗속에 경황이 없어 사찰에 간다는 언질을 못 드렸으니, 오늘 점심에는 전화를 드려야 한다. 오래간만에 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생각을 하니 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23번에서 24번으로 가는 길은 바닷가를 옆에 끼고 이어지는 단조로운 풍경이다. 처음 이 길에 들어설 때야 넓은 태평양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지만, 이내 갈매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은 바다 풍경이 지루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쉴만한 그늘이나 벤치 같은 것도 드물어 그저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기도 한다.

그래도 이곳의 바닷가는 일본에서도 해양스포츠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간간히 서핑이나 다이빙을 하는 이들이 보인다. 한 번은 더위에 지쳐 바다 근처로 걸으면 좀 시원할까 싶어서 해수욕장으로 걷는 길을 택해 걸은 적 있다. 그런데 오히려 모래의 반사열이 그대로 올라와 얼마 나아가지도 못하고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온 후론, 아무리 더워도 해수욕장 근처로는 가지 않았다. 그래도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순례자들은 종종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보낸다고 한다.

한 시간 걷고 5분가량 쉬는 식으로 5시간 정도 걸었더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꾸역꾸역 걸었더니 배가 고프다 못해 졸음이 몰려왔다. 지도를 펴고 대충 거리를 보니 20km 남짓 걸어왔다.

일단 뭐라도 먹고 좀 쉬어야 할듯 해 순례길 옆에 있는 사찰 사바다이시(鯖大師)로 들어섰다. 사바다이시는 일본어로 ‘고등어 대사’라는 뜻이다. 시코쿠에서 ‘대사’라고 하면 보통 ‘코보대사’를 말하는 것인데 ‘고등어 대사’라고 하니 또 재미있다.

사바다이시의 입구. 일본에서 ‘고등어 대사’를 본존으로 모시는 곳은 이곳뿐이다.

사찰 전설에 따르면 옛날 코보대사가 수행을 하다가 간고등어를 마차에 싣고 가는 마부에게 고등어를 한 마리 달라고 했다. 마부는 그 청을 거절하고 비린 생선을 먹는 땡중이라며 욕을 하며 떠나갔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말이 갑자기 아파하며 움직이질 못했다.

마부는 자신이 욕을 한 스님이 보통 스님이 아님을 알고는 고등어를 가져가 공양 올리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대사는 진언으로 정화한 물을 말에게 먹였고, 말은 곧 멀쩡하게 움직였다. 또한 받은 고등어를 바다에 넣자 살아서 헤엄쳐갔다. 이를 본 마부는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마음 속에 발원을 하고 3년간 고등어를 먹지 않으며 정진한 뒤에 이곳에 와서 회향하면 반드시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전설을 증명하듯, 사찰 한 켠에 고등어 석상이 놓여있고, 사람들이 소원을 쓴 나무판이 고등어 주위에 가득 놓여 있었다. 또 사찰의 대사상도 석장과 발우가 아닌, 고등어와 발우를 들고 계신 재미난 모습으로 모셔져 있다.

일단 사찰 앞 휴게소에서 배낭을 벗고 미숫가루를 타먹는다. 원래라면 반죽을 내고, 생강편이나 여타 부식을 챙겨 먹겠지만 그냥 멀겋게 타서 훌훌 들이킨다. 요기를 하고 잠시 쉬려니 졸음이 몰려온다. 아무래도 어제 잠자리가 좋지 못했나보다. 어차피 이곳 사바다이시에서 오늘 목표인 죠만지까지는 10km 남짓. 코야 스님에게 전화를 하고 한숨 자고 출발하기로 결심한다.

코야 스님은 “또 시코쿠에 왔냐”며 놀라면서도, 사찰 근처로 오면 마중 나갈테니 전화하라고 했다. 전화를 마치곤 배낭을 끌어안았다. 간혹 낮잠을 자다가 짐을 도둑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다. 배낭을 끌어안고 바람소리에 스르륵 잠에 들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인기척에 눈을 떴다.

“어! 진짜 박상이다!”
내 이름이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며칠간 같이 다닌 일본인, 프랑스인 콤비가 앞에 서있다.

“어! 두 사람, 야쿠오지에서 끝낸다면서요?”
“하하, 그게 그냥 좀 더 걷기로 했어요. 프랑스 친구는 오늘 갈 수 있는데까지 걷고 도쿠시마로 돌아갈 거래요.”
“그렇게 좀 더, 좀 더 하다가 88번까지 간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죠.(웃음)”

역시 이 길은 코보대사가 무슨 신통을 걸어두셨나보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을 다시 만나니 마음이 든든하다. 두 사람도 점심을 먹을 겸 사바다이시로 왔다고 한다. 둘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려 함께 참배를 하기로 했다.

사바다이시의 본당 옆으로는 지하로 들어가는 동굴식 법당이 있었다.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깊이 이어진다. 복도에는 시코쿠 88개소의 본존들이 순서에 따라 작게 모셔져있다. 설명을 읽어보니 본존 앞에 높인 연꽃모양 발받침아래 각 절의 흙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오스나후미(お砂踏み)라고 하는 미니 시코쿠 순례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이들을 위해 각 사찰의 흙을 조금 가져와 그 위를 밟으며 기도를 하는 것이다. 발받침을 밟으니 ‘또각’하고 소리가 난다. 확실히 밟았다는 것을 소리를 통해 알게 하는 것이 재미있다.

참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프랑스 친구가 호신부 판매대에서 호신부를 고르고 있었다.
“박! 이거 고르는 것 좀 도와줘요! 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예뻐서 좀 살까 해요.”
“이건 호신부에요, 부처님과 대사님께 기도를 해서 가피를 받은 거에요.”
“아! 그럼 더 사가야지! 친구들 줄 거에요.”

한문으로 쓰인 호신부의 공능을 하나하나 영어로 옮겨주니 학업부적을 친구 주겠다며 하나 사곤, 짚신모양의 교통안전 부적을 3개 산다. 느긋하게 절을 참배하고 쉬다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여기서 죠만지까지는 2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 마침 도쿠시마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차역이 죠만지 근처라 모두 역까지 같이 걷기로 한다.

태양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뜨거운 열기가 남은 길을 걸으며 앞으로의 길을 가늠해 본다. 오늘은 죠만지, 내일은 역시 30km 정도 떨어진 절, 그리고 24번 호츠미사키지(最御岬寺), 수행의 토사(土佐)가 시작된다.

어느새 카이후(海部)역에 도착했다. 도쿠시마로 돌아가는 기차 플랫폼에는 귀가하는 학생들이 가득했다. 난데없이 등장한 3명의 순례자에 시선이 쏠린다. 프랑스 친구는 오늘 도쿠시마에서 자고 내일 오사카로 간다고 했다.

40분정도 기다리자 기차가 들어왔다. 프랑스 친구는 아까 사둔 교통안전 호신부를 꺼내 나와 일본인 친구에게 하나씩 주었다.
“친구들! 무사히 순례해요. 88번에서 연락주고! 프랑스에 오면 연락해요!”

갑작스런 선물에 놀라움과 감동이 몰려든다. 친구에게 준다는 게 우릴 가리킨 말이었던 것이다. 꼭 연락하겠노라 다짐하고 호신부를 배낭에 달았다. 기차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친구를 배웅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기도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