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의 길, 시코쿠] 7. 20~21번 사찰 가는 길
[정진의 길, 시코쿠] 7. 20~21번 사찰 가는 길
  • 박지산 자유기고가
  • 승인 2018.10.0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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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두 개 넘는 고행… 大師 함께 하니 ‘든든’
21번 사찰 타이류지로 가는 길. 한 순례자가 와카스기타니(若杉谷)의 계곡에 발을 식히고 있다. 순례길 곳곳에서 만나는 비경은 순례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21번 사찰 타이류지로 가는 길. 한 순례자가 와카스기타니(若杉谷)의 계곡에 발을 식히고 있다. 순례길 곳곳에서 만나는 비경은 순례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새벽녘의 으스스한 한기에 눈을 뜬다.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며 지도를 펴본다. 오늘은 산을 두 개 넘어 22번 뵤도지(平等寺)까지 가야한다. 20번 카쿠린지(鶴林寺)와 21번 타이류지(太龍寺)는 모두 산 정상 근처에 사찰이 있어 오르는 것이 녹록치 않다.

다른 헨로고로가시들에 비하면 편한 길인 것은 사실이지만, 차라리 산길이 계속 되면 모를까 해발 500m 가량 되는 산을 올랐다가 다시 마을까지 내려간 후 비슷한 높이의 산을 올라야 두 절을 모두 참배할 수 있다.

아침을 먹고 출발할지 고민하다가, 3km 앞에 편의점이 있으니 그곳까지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지난밤 편안한 잠자리에 감사하며 오사메후다(お納札)에 이름을 써서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오사메후다는 각 절을 참배할 때마다 자신의 이름과 주소, 소원을 써서 올리는 종이쪽지다.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전통으로 순례의 횟수에 따라 색깔과 재질이 바뀐다. 보통 처음 순례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흰색 오사메후다가 가장 많이 보인다.

오셋타이로 받은 바나나 품고
굽이굽이 순례길을 따라간다
코보 대사 연기설화 담긴 사찰
인근 계곡서 발 담그고 ‘忙中閑’
펼쳐진 비경은 순례자만의 특권

종종 금색 혹은 비단으로 만든 오사메후다를 볼 수 있는데 이는 100회 이상 순례한 순례자들의 것이다. 시코쿠 순례 중에 이것을 구하게 되면 순례길의 안전을 보장하는 호신부가 되고, 아픈 이의 베개에 넣어주면 병이 빨리 낫는다는 등 영험담이 전한다.

아직 밤의 시원한 기운이 남아있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외진 시골길이라 차는 보이지 않고, 멀리서 꾀꼬리 소리만 울려댄다. 한 40분을 걸어 편의점에 도착한다. 그래도 제법 큰 마을이라 학교도 있고 가게도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아침을 여기서 먹겠다는 계획과 달리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아 그냥 지나쳐 순례길을 따라 걷는다.

다시 3km 정도를 가니 작은 가게가 나온다. 작은 냉장고에 음료수와 우유 몇 종류가 들어있고, 철제 선반에 과자와 생필품에 쌓여있는 것이 딱 우리나라 동네 점방이다. 이른 아침부터 할머니가 나와 청소를 하시다가 나를 보곤 인사를 하신다.

“오헨로상! 이른 아침부터 걷네요!”
“네,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준비를 하시네요?”
“나야 아침 먹곤 할 일이 없으니까요. 아침은 먹었어요?”
“아, 아직 안 먹었어요.”
“앞으로는 아직 문을 연 식당이나 가게가 없을 텐데요?”
“하하, 그냥 적당히 먹을까 해요.”
“어머나, 그러지 말고 여기 바나나 하나 가져가요. 오셋타이할게요!”

선반에 있던 바나나 한 송이를 덥석 집어 주신다. 시코쿠 순례길에서 오셋타이를 거절하는 것은 큰 실례이기에 일단 받고 본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미리 써둔 오사메후다 하나를 드린다. 할머니께선 앞치마로 손을 닦으시곤 합장하신 두 손으로 오사메후다를 받으셨다.

“어머, 특이한 오사메후다네요? 근데 ‘세이큐노 쿠니(靑丘國)’가 어느 지방인가요?”
“아, 한국을 부르는 옛 이름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이건 제가 그린 오사메후다입니다.”
“어머! 일본인인줄 알았어요. 대단하네요, 직접 이걸 만들어 오다니.”
“무슨 말씀을요, 바나나 감사합니다.”

바나나를 담아주신 봉투를 배낭 옆에 묶어 매고 다시 길을 걸어간다. 10분 정도 걸으니 등산로 입구에 들어섰다. 슬슬 배가 고프기도 하고 해서 아침을 먹고 이동하려다가 1km 정도만 더 걷기로 한다. 생각해둔 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 입구부터 급한 오르막을 낑낑대며 오르니 처음 보는 휴게소가 번듯하게 서있다. 둘러보니 2~3명이 노숙하기에 좋아 보인다. 물과 화장실이 없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산길을 향해 올라간다.

계획한 일정은 200고지에 있는 미즈노미 다이시(水呑大師). 전설에는 코보 대사가 이곳에 지팡이를 꽂아 샘을 내셨다고 전한다. 돌로 만든 작은 대사당이 있고, 쉴 수 있는 공터도 있다. 2010년에는 여기서부터 21번 타이류지까지의 길이 ‘아와 헨로미치(阿波遍路道)’라는 이름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길 자체가 중세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거니와, 중간 중간에 있는 석불들 중에는 14세기 경에 조성된 것도 있다고 한다.

미즈노미 다이시 앞에 있는 벤치에 배낭을 풀고 허리를 쭉 편다. 입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튀어나온다. 대사당 밑으로 코보 대사가 팠다는 샘이 시원하게 흘러나온다. 한 바가지 물을 받아 마시고 물통에도 채운다.

아침으로 아까 받은 바나나를 먹을까 하고 봤더니 여기저기 뭉개져 있다. 잘 익은 바나나를 배낭에 아무렇게나 묶어둔 까닭이다. 어쩐지 작은 파리와 벌이 계속 꼬인다 했더니 이 바나나 냄새를 맡았나 보다.

배낭에서 생강편을 조금 꺼내고 바나나와 함께 먹는다. 물소리에 매미소리, 인적 없는 숲속에서 먹는 아침이란 천상의 공양이 따로 없다. 바나나 껍질은 벌레들에게 줄 요량으로 멀리 숲속으로 던지곤 다시 배낭을 둘러맨다. 대사당의 향로에 향을 하나 꽂고 손을 모은다.

“대사님 덕분에 이런 길을 제가 걷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또 대사님 덕에 시원한 물을 마시고, 바나나도 보시 받았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20번 카쿠린지까지는 약 1.5km. 평지라면 넉넉잡고 40분 남짓한 걸음이지만 산길이니 넉넉잡고 1시간 30분을 올라야한다. 잘 닦인 산길을 오르다 보니 저 아래 찻길에서 버스가 올라오는 게 나무 사이로 보인다. 단체 순례자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는 것을 보니 사찰이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키쿠린지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학과 관련된 연기설화가 전한다. 코보 대사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암수 두 마리 흰 학이 거대한 삼나무 위에서 춤을 추며 내려왔다. 이에 대사가 나무를 찾아가니 두 학이 날개를 펼쳐 작은 지장보살상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환희심을 낸 대사는 큰 지장보살을 직접 조각하여 모시고 학이 지키던 지장보살상을 복장으로 넣어 모시고 사찰을 세운 것이 카쿠린지의 시작이다.

이야기 속의 삼나무는 지금도 본당 뒤에 당당히 서있고, 본당 앞엔 암수 두 마리 학을 세워 그 공을 기리고 있다. 또 납경의 도장으로도 학의 그림이 들어가 있다.

카쿠린지 참배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만큼 가파르기 그지없다. 중간에 쉴만한 자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저 가파른 내리막 길만 야속하게 이어진다. 발바닥에 슬슬 불이 붙지 않을까 생각이 날 즈음에 차도와 만난다. 차도를 건너 역시나 급경사의 계단을 내려가니 드디어 쉴만한 곳이 하나 나온다.

작은 신사인데도 수도가 나오고, 청소가 깨끗한 것을 보니 마을에서 잘 관리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간단한 안내문을 읽어보니 무예의 신을 모시고 있단다. 일단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발에 수돗물을 끼얹는다. 이렇게라도 식히지 않으면 발에 물집이 잡혀 걷기 힘들어 진다. 더욱이 다시 산을 올라야하니 만큼 발을 잘 식혀줘야 한다.

가쁜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배가 고파온다. 그래도 조금 더 걷고 밥을 먹기로 하곤 다시 일어선다. 여기서 강을 건너 1.3km 정도 가면 근사한 휴게소가 있기 때문이다.

시원한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순례길은 참 각별하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여기저기 피서객들이 고기를 굽고 시끌시끌하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일본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피서하는 풍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순례길은 사람들이 오기 힘들어 오롯이 도보 순례자들의 별경이다.

목표했던 휴게소에 배낭을 내린다. 옛날 우리나라 공원들처럼 나무 모양으로 칠을 한 시멘트 휴게소지만 이끼가 파릇하게 껴서 주변과 퍽 어울린다. 배낭에서 바나나와 미숫가루를 꺼낸다. 아침에 먹었을 때보다 더 심각하게 뭉개져 있는 바나나들. 내일까지는 이것으로 버티려 했는데 지금 다 먹어야 할 판이다.

바위에 앉아 발을 계곡물에 첨벙거리며 점심을 먹는다.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정신이 번쩍 든다. 시간을 헤아려보니 오늘은 22번 뵤도지까지는 무리일 듯하다. 그냥 느긋하게 쉬어 가기로 한다.

뵤도지 대신에 숙소를 어디로 할까 고민하려니 지팡이 딛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려 길을 보니 며칠 전 길에서 만난 프랑스인 순례자와 일본인 순례자가 같이 오고 있다. 둘 다 여기서 점심을 먹을 요량이란다.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

“어제는 다들 어디서 묵었어요?”
“어제는 다츠에지 옆의 역에서 같이 노숙했어요, 오늘은 타이류지까지 가려구요”
“저랑 같네요. 오늘 어디서 잘지 정했어요?”
“아니요, 대사님이 어떻게든 해주시겠죠!”

모두 한바탕 웃으며 “코보 대사님께서 굽어 살피소서”하며 배낭을 짊어진다. 타이류지까지 약 3km, 역시 험한 산길이지만 뜻밖의 동료들이 있으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순례의 Tip

이른 아침 도로에 비친 순례자들의 그림자.
이른 아침 도로에 비친 순례자들의 그림자.

- 오셋타이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거절해선 안 된다. 다만 자동차로 태워주겠다는 오셋타이 만큼은 정중히 거절할 수도 있다. 오셋타이를 받고나선 감사의 의미로 자신의 오사메후다를 드리는 것을 잊지 말자.
- 금색이나 비단 오사사메후다를 얻기 위해 각 절에 있는 후다 상자를 뒤적이는 등의 행위는 금지! 단, 상자위에 놓여 있는 것을 가져가는 것은 괜찮다.
- 21번에서 22번 사이에는 가게나 식당이 없다. 도시락을 잊지 말고 챙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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