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중 보듬은 약사여래의 가피

28번 다이니치지의 오쿠노인 ‘츠메보리 야쿠시’의 모습. 오쿠노인은 일본 사찰에만 있는 전각으로 사찰 창건과 연관 있는 불보살·조사를 모신 곳이다.

어디선가 시끄럽게 들리는 매미 소리와 후끈한 기운에 눈을 뜬다.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젠콘야도에서 제공해준 이불을 덮고 잤더니 세상 모르고 잠든 것이다.

오늘은 느긋하게 20km 남짓 떨어진 다른 젠콘야도까지가 목표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느긋히 갈 마음을 먹는다. 미적거리며 짐을 싸고 있으니 젠콘야도를 관리하는 할아버지께서 오셨다. 피곤하면 좀 더 있다가 가라하시는 것을 정중히 사양했다. 할아버지의 사진을 찍으려했더니 극구 거절하시기에 젠콘야도의 외관만 찍었다.

대일여래 본존인 28번 大日寺
이곳 오쿠노인엔 약사여래 모셔
쿠보대사가 손톱으로 그려 조성
영험 받고자 日민중 참배 이어져


젠콘야도를 출발하려는 찰나에 할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여기 지팡이 하나씩 더 챙겨가.”
“네? 이미 하나 있는데요?”
“그래도 2개 있으면 발이 덜 피곤해서 빨리 갈 수 있어. 쓰다가 필요 없어지면 순례하는 사찰에 두고 가고.”

지팡이를 하나씩 더 잡고 출발한다. 양손에 지팡이를 잡으니 확실히 걷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래서 등산할 때 스틱을 두 개씩 쓰나보다. 푹 자서 피로도 많이 풀렸겠다. 지팡이도 2개겠다. 말 그대로 날듯이 걸어간다.

젠콘야도에서 이어지는 순례길은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중간 중간 있는 터널들이 꼭 동굴같이 축축하면서 시원해 기분이 좋다. 흥얼거리는 노래가 터널 안에 울려 더욱 신이 난다.
도중에 자전거 도로가 끝나고, 차도와 만나는 길이 나왔다. 헌데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없어 전차가 다니는 고가로 아래의 길을 순례길 삼아 걷는다. 순례 이정표도 마침 고가로 아래를 안내하고 있었다. 잠시 후 횡단보도로 길을 건너자 인도가 나오고 ‘헨로 휴게소 500m 앞’이라는 표지판도 나온다. 마침 햇볕이 따가우니 잠시 쉬어갈 생각을 하고 걷는다.

500m쯤 걸어도 휴게소가 안 보여 두리번거렸더니 길에서 살짝 떨어진 공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 보니 ‘가가미 휴게소’라고 되어있는 곳이다.

휴게소에 들어섰더니 오래돼서 때가 잔뜩 낀 아이스박스가 하나 놓여있다. 뭐 있으려니 하고 별 기대도 없이 열었더니 얼음이 동동 떠있는 얼음물 속에 캔커피와 녹차가 들어있다. 예상외로 아직 현역인 아이스박스였다.

캔커피를 꺼내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니 휴게소 뒤에 분리수거 통이 있다. 캔을 집어넣는데 빈 콜라캔이 잔뜩 있다. 원래는 아이스박스에 콜라가 있었나 보다. ‘콜라가 더 좋은데’라며 잠시 아쉬웠지만, 그래도 시원한 음료를 이렇게 보시 받는 게 내 인연 아니겠는가.

가정집들 사이로 난 길들을 따라 걷다가 55호 국도와 만난다. 햇살이 점점 강해져 헉헉 거리면서 가는데 길 옆으로 ‘에이★맥스’라는 슈퍼와 마주친다. 분명 젠콘야도의 할아버지가 싼 도시락을 파는 슈퍼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 들어가 본다. 도시락 칸으로 갔더니, 꽤나 그럴 듯한 도시락이 단돈 200엔, 납경료도 안 되는 가격이다. 점심으로 먹기로 하고 단박에 사버렸다.

도시락 봉투를 손에 들고 슈퍼를 나오니 아주 본격적인 땡볕이 내리쬔다. 게다가 국도 옆을 걷는 길이라 그늘도 변변찮다. 그늘만 보면 조금씩 쉬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28번 다이니치지를 대략 4㎞쯤 남겨두고 편의점 써클 케이에 들어간다. 무엇인가 사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에어컨을 쐬려고 들어갔다가 1리터에 105엔이라는 싼 가격의 음료수가 눈에 띈다. 1리터가 105엔이라니 가난한 순례자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피인가 보다.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니 더위와 햇볕에 찌푸렸던 눈이 번쩍 떠진다. 힘차게 28번 사찰로 향한다. 역시 더울 땐 그저 시원한 게 최고다. 이열치열이란 말은 지금의 나에겐 안 맞는 말이다. 
야트막한 산길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자 곧 28번 다이니치지(大日寺)가 나온다. 다이니치지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흔한데, 이는 비로자나불의 밀교적 모습인 대일여래(大日如來)에서 유래한다. 28번 다이니치지의 본존도 역시 대일여래다. 

다이니치지의 오쿠노인에는 쿠보 대사가 손톱으로 눌러 그린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이름을 써 돌을 던지면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다이니치지는 본존불보다 ‘오쿠노인(奧之院)’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이 유명하다. ‘오쿠노인’이란 일본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이다. 보통 해당 사찰이 창건되는데 인연이 깊은 불보살이나 조사스님을 모신 법당을 ‘오쿠노인’이라고 한다. 이곳의 오쿠노인에는 코보우 대사가 손톱으로 눌러 그렸다는 ‘츠메보리 야쿠시(爪彫り?師)’라는 약사여래가 모셔져있다. 대일여래라는 부처님이 아무래도 서민들에겐 낯선 부처님이라 서민들이 친숙하게 사찰에 참배할 수 있도록 조성해서 모셨다.

어차피 오늘은 이 28번 사찰만 참배하면 시간에 쫓길 것이 없으니 느긋하게 마음을 먹었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충분하니 시코쿠에서 처음으로 예불을 칠정례로 올렸다. 우리말로 예불을 올리고 있으려니 단체순례자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예불을 마치고 종각 앞의 벤치에 앉아 아까 산 도시락을 먹고는 납경을 받았다. 내친김에 유명한 오쿠노인까지 가보기로 했다. 원래 오쿠노인은 본래의 사찰에서 멀리는 수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이 많고, 보통은 산꼭대기나 외진 곳이라서 가볼 엄두를 내질 못하지만 다이니치지는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코보 대사가 손톱으로 그렸다는 약사여래의 모습을 뵐 수 있을지 몰라 잠긴 문 안으로 들여다보지만 비단 장막으로 가려서 보이질 않는다. 약사여래 부처님답게 이곳은 여러 병에 영험이 있다고 한다. 특히 목 위에 있는 눈이나, 귀, 등의 질병에 영험이 있단다.

아픈 이들은 구멍이 뚫린 돌에 이름을 써서 공양을 올리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당의 마루 밑으론 사람들이 이름을 써서 봉헌한 돌무더기가 쌓여있었다.

오쿠노인 옆으론 약수가 흐르고 있었다. 약사여래 부처님의 가피가 녹아든 ‘가지수(加持水)’란다. 거기에 토사 명수 40선에 들어있는 맛있는 물이라고 한다. 몸에 좋고 가피도 있다기에 일단 한 바가지 가득 마시고는, 물통의 물을 비워 약수로 채웠다.

길을 내려와 다시 논길 사이로 난 순례길을 걸어간다. 날벌레들이 득시글해서 걸어가기가 힘들 정도다. 한참을 걷다가 거의 다 왔나싶어 길을 물어보는데 다들 젠콘야도의 위치를 모른다고 한다. 혹시나 싶어 젠콘야도 근처의 대사당을 물어보니 역시 모른다고 한다. 지도를 펴서 보여주니 아직 젠콘야도와 대사당이 있는 지역에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부지런히 걷다가 일단 젠콘야도 리스트를 보고 전화를 걸어 젠콘야도를 관리하는 니시오카 씨에게 젠콘야도를 사용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젠콘야도에 열쇠가 따로 걸려있지 않으니 마음껏 사용하라는 답을 받았다.

한참을 걷다가 늦은 오후가 되어서 젠콘야도 근처에 있는 마츠오 대사당(松尾大師堂)에 도착했다. 휴게소와 대사당을 겸해 놓았기에 배낭을 내려놓고 간단하게 기도를 했다. 대사당 안쪽으론 화려하게 채색된 코보 대사상이 모셔져 있었다. 잠시 쉬려고 앉았더니 모기가 무리로 몰려든다. 앉아 쉬기는 힘들어 몸을 풀 겸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모기를 쫓았다. 그렇게 서성이고 있으니 차 한 대가 대사당 앞에 선다. 차를 몰던 아저씨가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이야기를 걸었다. 

“오헨로상! 혹시 젠콘야도 가는 한국인 헨로상인가?”
“예, 그렇습니다.”
“다행이네! 길 헤매는 것 같아서 데려가려던 참이었어요.”
“네? 니시오카 씨세요?”
“그래요, 내가 니시오카에요, 차에 타요. 젠콘야도 가는 동안에는 시원하게 갑시다.”

차에 올라 5분정도 달리자 젠콘야도가 나왔다. 이곳의 젠콘야도는 공동묘지 바로 옆에 있기로 유명하다. 커다란 유리문 넘어 다닥다닥 서있는 묘비가 훤히 보인다.

“여기 한국인이 왔다 간적 있나요?”
“방명록은 보면 몇 명 왔다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방명록을 살펴보니 한국인 2명이 다녀갔다. 그중에 한 분은 스님이셨다. 한국어로 쓰여 있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니시오카 씨께 즉석에서 번역해 읽어주니 매우 기뻐했다. 내용은 대부분 여기까지 무사히 순례해서 기쁘다, 이런 곳에 묵게 된 것에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니시오카 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본이 전쟁 때에 참 나쁜 짓을 많이 했지. 한국이나 중국에 몹쓸 짓을 많이 했어요.”

일본인들과 이야기를 할 때 가급적 피하는 주제가 역사와 정치 문제다.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먼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조금 놀라서 가만있으려니 이어서 이야기가 나왔다.

“잘못된 전쟁을 일으켜 다른 나라를 침략했으니 질 수 밖에 없었겠지요. 지금 이렇게 외국의 순례자들이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순례를 하고, 내가 만든 젠콘야도에 묵어준다니 선조들의 악업이 조금이나마 씻길지도 모르겠어요.”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니시오카 씨는 환하게 웃으며 오늘 이렇게 묵어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어 화장실이나 세면대 같은 시설과 주변 지리안내를 들었다. 특히 냉동고에 얼음이 있으니 먹거나 가지고 가거나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숙박료인 300엔은 불단에 놓인 상자에 넣어두면 된다고 했다.

곧바로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서 대야에 넣고 얼음물로 족욕을 했다. 더위에 지친 몸에 한순간 냉기가 올라오니 정신이 번쩍 든다. 오늘도 감사함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가가미 헨로 휴게소. 시코쿠 순례길 위에서 시설이 좋기로 꼽히는 휴게소다.

순례 TIP
- 순례기에 나온 니시오카씨의 젠콘야도는 현재 여러 사정으로 폐쇄되었다.
- 도보 순례 중에 수분 섭취는 매우 중요하다. 보통 500ml 페트병 두 개에 물을 담아 다니는 것이 무난하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