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수에 삿된 번뇌를 날리다

메이토쿠지에서 폭포 수행을 하는 필자의 모습. 반야심경과 진언들을 폭포를 맞으면서 독송하는 수행으로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매우 어렵다.

죠만지를 모르던 때의 일이다. 그때는 죠만지에서 조금 더 걸어가야 있는 사찰, 메이토쿠지(明德寺)의 츠야도(通夜堂)에 묵었다. 츠야도는 원래 사찰에서 장례를 치르는 상주들이 밤을 지새우면서 잠을 자는 공간인데, 시코쿠 헨로에서는 순례자들이 무료로 잘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을 말한다.

메이토쿠지 츠야도에 묵는 순례자들은 재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바로 폭포 수행이다. 원래는 보시금을 내야 하지만, 순례자들에게는 주지 스님이 “수행의 도량인 고치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라”며 폭포 수행을 ‘오셋타이’해주신다.

주지 스님에게 폭포 수행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흔히 일본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조용히 폭포만 맞는 장면을 생각하곤 덜컥 수행을 신청했다. 주지 스님은 하얀 소복을 건네며 “속옷 외엔 다른 옷을 입지 말고, 이 옷만 입고 저녁 예불을 모신 뒤 폭포로 간다”고 말했다.

순례 중 머문 메이토쿠지서
일본 특유의 폭포 수행 체험

폭포에 서서 경전·진언 독송
얼음장 같은 물에 몸이 ‘덜덜’
수행 마치니 몸·정신 가벼워져

저녁 예불에는 주지 스님도 하얀 소복을 입고 나오셨다. 법고를 두드리며 독경을 하는 가운데 스님은 “한국에서 온 박지산, 금일 입롱수행(入瀧修行) 무사회향 기원”이라고 축원했다. 예불이 끝나고 폭포수행 방명록에 이름과 주소를 썼다. 방명록을 앞뒤로 뒤져보니 여태껏 폭포수행을 한 한국인은 나뿐이다.

수행을 하는 폭포는 츠야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스님은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이 식수가 곤란한 것을 보고 코보 대사께서 석장을 찔러 샘을 솟아나게 한 곳이 이 폭포다. 대사의 신통으로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물이 솟아나오는 영천(靈泉)”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폭포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정화해야 한다고 몸에 물을 끼얹고 소금을 뿌려줬다.

“폭포에 들어가기 직전에 합장 반배하고, 뒷목으로 폭포수를 받으면 되네. 〈반야심경〉 3번, 부동명왕 진언 7번, 광명진언 3번, 대사보호 3번, 회향문 순서로 경을 외우면 끝나네. 일본어로 경 외우나?”
“네, 외웁니다.”
“물이 차갑다 보니 몸이 놀라서 경의 순서나 횟수를 잊을 수 있는데, 내가 같이 경을 할 테니 걱정 말게.”

더운 여름날 작열하는 햇볕을 종일 온 몸으로 받은지라 ‘폭포수가 차가워 봤자’라고 생각하며 폭포로 들어갔는데,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머리끝까지 몸이 떨려왔다. 경의 어느 부분을 외우고 있는지, 몇 번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빨리 회향문이 나오길 바라면서 폭포수를 맞았다. 폭포 옆에선 주지 스님이 석장을 흔들며 독경을 이끌었다.

“바라건대 이 공덕을 널리 펼쳐….”  

드디어 회향문의 차례. 원래라면 불자로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회향을 해야겠지만 당시 나는 그저 뜨거운 샤워를 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모두 부처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외치곤 훌쩍 폭포를 뛰쳐나왔다. 부딪히는 이를 떨며 서둘러 샤워장으로 가서 뜨거운 물을 끼얹고 나오니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폭포에서는 주지 스님이 홀로 경을 외우며 폭포 수행을 하고 있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츠야도의 문턱에 앉아 있으니 한참 뒤에야 주지 스님이 온 몸에 물을 떨어뜨리며 걸어 오셨다.

“하하! 어떤가? 할만 했는가?”
“물이 차가워서 혼났습니다.”
“삿된 기운들은 뒷목의 혈을 통해 몸에 들어가지, 어째 몸이 좀 가벼워지지 않았나?”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번 자고 일어나보게, 그럼 알게야!”

스님은 오늘 하루 종일 걷느라 피곤했을 테니 내일 아침예불은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폭포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었다. 법당의 법고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알게 모르게 몸이 상쾌한 것이 폭포를 맞은 영험이 나타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정리하여 나오니 예불을 마친 주지 스님께서 배웅을 했다.

“조심해서 가게나. 부지런히 걸으면 늦어도 해질녘엔 24번 절이네.”
“감사합니다. 스님 말씀대로 폭포를 맞으니 뭔가 몸이 가볍습니다.”
“그렇지? 만약 헨로를 걷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폭포에 외운 경을 하면서 근처 산에 있는 폭포나 바다 속에 몸을 담그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헨로를 오게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순간 스님이 아무 말씀 없이 빙긋 웃으셨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나 하고 했던 말을 곱씹고 있는데 주지 스님이 법문 한 마디를 설했다.

“다음? 다음은 잘 모르겠는걸?”
“무슨 말씀인가요?”
“사람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어찌 아는가?”

무상(無常)의 법문이 마음에 스며든다. 시코쿠 순례를 나서는 모든 순례자들은 수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흰 옷을 하나의 유니폼처럼, 순례자의 상징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스님의 한 마디에 다시금 이 길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순례길임을 깨닫는다. 제행무상! 수의를 입고 걷는 이 순례는 불법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여행이다. 주지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깊이 합장반배를 올리고 길을 나섰다.

메이토쿠지에서 24번 호츠미사키지(最御岬寺)는 약 32km, 7시간 남짓 걸리는 길이다. 처음엔 태평양을 옆에 끼고 걸으니 시원한 바다풍경이 즐거웠지만 이내 곧 질리고 말았다. 아무리 시원한 풍경도 간간히 산이나 숲과 같은 주변물이 있어야 빛이 나는데 그저 바다만이 이어졌다. 길도 차도의 옆을 걷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라 금세 발이 피곤해 왔다. 게다가 태양열이 반사되어 보통 더운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순례길이 어촌 마을들을 연결하는 길로 나 있다는 점이었다. 마을들이 있어서 식당이나 슈퍼 같은 편의 시설들을 이용하기 쉬웠다. 또 이 바닷가길이 드라이브 코스라도 되는지 차도 옆으로도 식당이나 카페들이 산재해 있다.

미쿠로도 동굴 입구. 청년기의 코보 대사는 이곳에서 수행했다.

점심때가 되어서 동네 슈퍼에 들어가 콜라 한 캔을 샀다. 슈퍼 앞 벤치에서 미숫가루를 풀어 먹고 콜라를 마시니 탄산이 온 몸에 스며든다. 어차피 느긋이 걸어도 3~4시엔 24번에 도착할 테니 조금 쉴까 하곤 배낭을 끌어안고 앉았다. 바다에서 솔솔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에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스르르 잠에 들었다.

“오헨로상! 오헨로상! 이런데서 자면 위험해요!”
슈퍼 직원분이 나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시계를 바라보니 2시 반이다. 아이고! 잠깐 존다는 게 아주 제대로 자버렸다. 24번까지는 약 9km, 내 걸음으로 2시간 남짓이다. 도저히 24번의 납경에 맞출 수가 없다. 급하게 기억을 더듬어 노숙이 가능한 포인트를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값싼 숙소고 노숙 포인트고 모두 24번을 지나서 있다.

지도를 펴서보니 24번 아래의 미쿠로도(御廚人窟)부분에 메모가 있다. ‘노숙 가능’이라고 쓰여 있다. 도쿠시마에서 만난 순례자가 “미쿠로도 동굴 안이나, 앞의 사무소 건물 쪽에서 노숙이 가능하다”고 알려준 정보였다.

미쿠로도는 코보 대사가 청년기에 수행했다고 알려진 동굴. 청년기의 코보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할 때 새벽의 샛별이 입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환시를 보고 밀교의 성취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의 일은 코보 대사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 남아 있어 시코쿠를 순례하는 이들은 물론, 사적 탐방을 하는 학자들도 한 번씩은 답사하는 장소다.

전해지기로는 코보 대사는 그때 보았던 새벽 하늘과 바다에서 스스로 쿠카이(空海)라는 법명을 지었다고 한다. 일단 미쿠로도에서 노숙을 시도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부지런히 쉬지 않고 걸어 납경소가 문을 닫기 직전에 미쿠로도에 도착했다. 납경소를 정리하고 계신 직원에게 노숙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텐트를 가지고 계신다면 이 앞에 치셔도 됩니다만….”
“저는 매트와 침낭만 들고 다닙니다. 혹시 납경소 창고건물을 빌릴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저도 그냥 직원이라 뭐라 말씀 드리기가 힘듭니다.”
“그럼 미쿠로도 동굴 내부는요?”
“가능하지만, 지금 계절은 동굴천정에서 물이 떨어져서 침낭이 다 젖을 거예요.”

노숙이 가능하다는 정보만 믿고 왔는데 난감하다. 직원도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단 감사를 표하고 나와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첫 순례 때 아예 24번 산문 앞에서 노숙을 했다가 산모기들에게 밤새 시달린 기억이 생생했다. 그래도 이곳은 바람이 좀 불고 모기도 없어 보이니 그냥 대충 바위틈에 자리를 펴기로 마음먹었다.

해가 어둑어둑 져가고, 미쿠로도 앞의 바위 옆에 매트를 폈다. 밤이 되니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해 판초우의를 꺼내 침낭 위에 덮었다. 혹시 몰라 모기향도 하나 피웠는데 바람이 강해 금방 꺼져 버렸다.

잠자리에 들기 전 미쿠로도에 들어갔다. 1,200년 전 코보 대사가 바라본 밤풍경과 내가 오늘 보는 풍경이 같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작은 초를 하나 켜서 올리곤 동굴을 나왔다. 일렁이는 촛불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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