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준한 산길서 내 자신을 마주하다

12번을 넘어가는 중간에 있는 암자 죠렌안(淨蓮庵). 11번 절에서 12번 절까지 약 1/3지점이다. 11번과 12번 순례길은 산등성이 3곳을 넘어야 하는 험로다.

시코쿠 순례의 오헨로상(순례자)들의 아침은 빠르다. 하루에 평균 30km 가까이 걸어야 하는데다가, 오후 5시면 사찰들의 업무가 끝나니 그 전까지는 참배해야하기 때문이다. 가장 이르기로는 새벽 4시, 늦어도 아침 7시에는 출발한다. 뜨거운 뙤약볕이 고통스러운 여름날의 순례는 낮에 어디선가 한잠을 자고 밤에 걷는 경우도 있다.

전날은 11번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젠콘야도(善根宿)에 묵었다. 젠콘야도란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간이 숙박시설을 말한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근을 쌓는 숙소, 또 선근을 가진 이들이 묵는 숙소이기에 대부분 무료, 혹은 저가로 운영된다.

젠콘야도의 전통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코쿠 순례가 확립된 에도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젠콘야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없어진 형태지만 젠콘야도에 모셔진 불단에 등을 켜고, 그 등이 꺼질 때까지 머물 수 있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퍽 낭만적인 이야기지만 형태야 어떻든 주머니가 가벼운 순례자들은 그저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잘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11~12번 사찰로 이동하는 순례길
산등성이 3곳 통과해야 하는 험로
걸음마다 편안함 안주한 자신 반성
오셋타이 등 순례자 배려 문화 눈길
현지인들 보시의 감사함에 기도한다


4월 중순이지만 등산로 입구의 젠콘야도는 사뭇 추웠다. 핫팩을 붙이고 잤는데도 새벽추위에 시큰한 코를 문지르며 일어난 시간은 오전 5시. 조용히 침낭과 매트를 정리하고 뒷사람을 위해 어젯밤 들어올 때 그대로 숙소를 정리한다. 조용한 주택가에 지팡이소리를 또각또각 울려가며 11번 절 후지이데라(藤井寺)에 도착한다. 이른 아침 아직 문이 닫힌 후지이데라의 납경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추억을 회상한다.

2012년 여름 대학친구들과 순례할 때에는 점심이 조금 지나서 이곳에 도착했다. 다음 일정과 루트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납경소의 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자네들 어디서 왔는가?”“한국에서 왔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노숙순례를 하는군, 다 불자들인가?”
“예, 다 불교를 전공하는 학생들입니다.”
“종파는?”
“아, 조계종이라고, 임제선의 한 갈래인 한국의 선종입니다.”
“아이고! 우리 집안사람이 멀리서도 왔구만!”

알고 보니 후지이데라는 88개소에서 단 3곳뿐인 선종 사찰 중 한 곳이었다. 아직 끼니를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뜨거운 물까지 손수 부어서 컵라면을 가져오셨다. 큰 호의에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스님의 과찬이 쏟아졌다.

“같은 선종을 공부하는, 그것도 시코쿠 순례를 이 뜨거운 여름에 도는 외국 청년들이라니! 정말 장하네!”

컵라면으로 감사한 공양을 들면서 사방승가(四方僧伽)의 감사함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지 않고, 직접적인 인연이 없더라도 오직 한 부처님의 제자라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따뜻한 정을 받는 것이다. 시코쿠 순례길은 이렇게 감사함이 넘치는 길이다.

시코쿠에서는 이렇게 순례자들에게 보시하는 문화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다. 현지에서는 ‘오셋타이(お接待)’라고 하는 이 전통은 작게는 격려의 말에서 크게는 금전적인 도움이나 잠자리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시코쿠의 주민들은 순례자들을 코보대사나 불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하는 신앙이 있다. 수많은 순례자들 가운데 대사님과 불보살들께서 나투셔서 시코쿠를 순례하시고, 그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려 이 세상이 좀 더 평화로워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례자들에게 행해지는 보시 ‘오셋타이’는 큰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말한다. 또 순례자들은 이러한 오셋타이를 받고, 그분들의 감사함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이것이 시코쿠 순례의 아름다운 전통인 것이다.

앞서 설명한 젠콘야도도 오셋타이의 한 방식이다. 이 오셋타이의 감사함에 대해서는 또 거듭해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2번 사찰 쇼산지(燒山寺)로 향하는 순례길은 시코쿠 순례 최초의 난관이다. 11번 절 본당 옆에서 들어가는 이 구간은 ‘헨로 고로가시(遍路ころがし)’라고 불리는데 ‘순례자가 굴러 떨어지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힘든 길이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산등성이 3개를 넘어서, 마지막 3번째 산 정상 아래에 절이 있는데다, 가는 길에 마을이라곤 단 한곳, 물을 뜰 수 있는 샘은 두 곳 뿐이다. 꽤 많은 도보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걷고 나서 초반에 포기하곤 한다.

길도 험한 산길, 미끄러운 바위틈을 지나는 소위 ‘짐승길(けものみち)’이다. 이렇게 길이 험한 이유는 쇼산지의 연기설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코보 대사가 수행 정진 중에 잠깐 잠에 드셨는데 꿈에 아미타부처님께서 “대사여! 어찌 자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온 산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대사님이 불을 끄려고 보니 평범한 산불이 아닌 요술로 생겨난 불이었다.

대사는 곧바로 계곡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진언을 염송하자 불이 사그라들었다. 불속을 가만 보니 커다란 흰 뱀이 수행을 방해하고자 불을 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뱀은 대사님의 법력에 놀라 산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코보 대사는 진언을 외며 뱀을 쫓기 시작했고, 아흐레가 되던 날 뱀을 조복시키고 바위굴에 봉인한 곳이 12번 쇼산지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길이 험한 것도, 바위틈의 구불구불한 길도, 길에 샘이나 계곡이 드문 이유 모두 불을 뿜는 뱀이 도망간 길이기 때문이라는 전설이다.

노숙장비에 식량까지 짊어지고 오르려니 시작부터 구슬땀이 흘러내린다. 해가 뜨면 더워지니 아침 일찍 시작한 것인데도 덥고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그래도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좀 익숙해진 길이지만 첫 순례 때는 너무 힘들어 중간쯤에 있는 휴게소에서 1박하여 이틀을 걸은 길이다.

인기척은 찾기 힘들고, 길옆으로 멧돼지가 들쑤신 자국이 군데군데 보여 긴장되는 길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들이다. 붉은 화살표로 그려진 표지판들을 보며 ‘그래도 이 길에 사람이 있었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또 일정하게 놓인 지장보살상들도 힘을 돋워준다. 특히 순례길가에 있는 지장보살상들의 광배에는 다음 절까지의 거리가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쵸(丁, 1丁은 약 109m)’라는 단위로 새겨진 거리의 숫자가 줄 때마다 내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쇼산지를 코앞에 둔 바윗길에서 땀으로 멱을 감으며 문득 한 장면이 머리에 스친다. 학교에서 진행된 수계식에서 있었던 일이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수계증을 받자마자 주체를 못하고 큰소리로 엉엉 우는 일이 있었다. 스님들이 뒤로 데려가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계를 받은 것이 너무나 기뻐서 운다는 것이었다. 절에 다니면서 신행활동을 해왔지만 계를 받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지금 험한 바윗길을 오르는 내 마음은 그 순수하게 기뻐하는 마음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청정한 동기로 걷고 있을까? 이 걸음걸음은 과연 어떻게 내 마음에 다가올까? 몸이 힘들다고 피곤하다며 투덜대던 내 마음이 일순 부끄러워진다.

길가에 세워진 초등학생들의 응원판. “오헨로상(순례자님), 언제나 건강하세요”라고 적혀있다.

첫날 1번 료젠지의 본당에 앉아 ‘일체중생을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겠나이다’라고 서원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몸과 마음은 그새 편하고 좋은 것만을 찾는다. 그래서 옛 말씀에 “모든 행을 ‘정념’이라는 밧줄로 묶어라”라고 말씀하시고 “이 마음 하나 붙들면 모든 것을 붙들어 맬 수 있다”라고 가르치신 것이리라.

가파른 바위틈을 넘어서자 자갈이 깔린 탁 트인 길이 나온다. 직감적으로 이 길 위에 12번 쇼산지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한 십분 남짓 낑낑대며 올라가자 절 주차장이 나오고, 작은 샘터가 하나 있다. 배낭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곤 머리에 한바가지 끼얹고는 벌컥벌컥 물을 마시니 그야말로 감로수가 따로 없다.

다시 힘을 내어 쇼산지에 도착. 산문의 코보대사상이 오도카니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정상 바로 아래 자리 잡은 쇼산지의 경내 곳곳엔 아름드리나무들이 서있어 절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산 정상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풍부하여 절 아래로는 귤 밭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납경을 받고 보니 납경소 옆으로 넓은 평상들과 의자들이 놓여있어 편히 쉴 수 있게 해두었다. 대부분의 도보순례자들은 하루나 이틀을 꼬박 12번 절에 투자한다. 이곳만 순례해도 그날의 일정이 끝나는 것이다.

아직 해가 지려면 꽤 남았으니 한숨 자고가도 된다는 납경소 직원분의 친절을 사양하고 하산길에 들어선다. ‘헨로 고로가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까닭이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포장이 잘된 차도와 만난다. 험한 산길에 이미 발에 열이 나고 욱신거리는 지라 잠시 차도로 걷기로 한다. 이대로 걷다간 발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아 신발과 양말을 벗곤 잠시 발을 식힌다. 순례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가 발의 물집이다. 같이 걷던 친구중 하나는 뒤꿈치 굳은살 안으로 물집이 잡혀 물이 터지지 않아 한참을 고생했다. 결국 굳은살을 뜯어내고서야 아물었다.

오늘의 숙소는 또 다른 젠콘야도 ‘스다치칸(すだち館)’이다. 도쿠시마 지역의 특산품인 스다치(영귤)를 재배하시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 겸 젠콘야도.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시코쿠의 온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젠콘야도다.

주인할아버지의 차를 타고 근처 온천에서 몸을 데우고 돌아오니 할머니께서 식사를 준비해 주신다. 어젯밤 으슬으슬하게 자고 하루 종일 산을 타 몸에 감사함이 스며든다. 내일은 또 어떤 감사함과 마주할지 기대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순례의 Tip
- 젠콘야도는 정말 신심을 가지고 운영하거나, 스스로 순례한 경험에서 우러나와 운영하는 분들이 많다. 젠콘야도는 시코쿠 전체에 두 자리 수를 간신히 넘는 소중한 곳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규칙을 잘 지키도록 하자. 특히 한국인 순례자들은 음주에 관한 문제가 종종 들린다.

- 잠시 쉴 때엔 반드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식혀줘야 물집이 잘 생기지 않는다. 가능하면 냉수로 발을 씻고, 새 양말로 갈아 신는 것도 좋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